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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믿음의 발자국> 한국 교회의 이단 _ 전인수 교수 (그리스도대학교 역사신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42    등록일시 : 2015-01-19    인쇄

한국 교회 믿음의 발자국


한국 교회의 이단


글_ 전인수 교수 (그리스도대학교 역사신학)


한국 교회 이단의 뿌리
한국교회사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이단의 등장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봐야 한다. 1920-30년대 독자적인 성서해석과 개인의 신앙체험이 접목되면서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그들이 체계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고, 또 개인적 신앙체험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종교에 침잠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이들의 일탈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이단은 대부분 장로교회를 통해 결정되었다. 장로교회는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70%가 넘는 성도 수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선교 초기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서북지방의 장로교는 교권이 강했고, 신학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당시 장로교회가 주목한 것은 신비적 신앙이었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이런 경향을 ‘신령파’(神靈派)라고 부른다. 굳이 신비주의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신앙적 경향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입신(入神)이나 예언, 계시 등 개인적 신앙체험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무당들이 하는 신탁행위가 기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들에게는 무교(巫敎)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신령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새주교회의 김성도(金聖道, 1882-1944), 원산파인 유명화, 예수의 목이 자신의 목에 붙었다고 주장한 황국주 등이 있다. 김성도는 ‘새 주’를 자처했으며, 유명화는 예수의 영이 자신에게 친히 임했다(親臨)고 주장했다. 황국주도 한때 자신을 예수라고 여겼다. 재미있는 것은 김성도가 죄의 뿌리가 음란이며 예수는 한반도에 재림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란과 재림 모티브는 김성도 밑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는 김백문(예수교이스라엘 수도원)을 통해 문선명(文鮮明, 1920-2012), 박태선(朴泰善, 1917-1990)에게 이어졌다.


문선명의 통일교
통일교와 전도관은 김성도-김백문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부흥하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독교계에는 많은 신흥종교가 등장하였다. 많은 이들이 신비적인 체험, 그리고 현세적 축복을 찾게 되면서 기복주의(祈福主義)적 신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1) 또한 이런 틈을 이용하여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구원과 안위를 약속하는 신종교 집단이 파고 들어왔다.2)
문선명은 1920년 음력 1월 6일(양력 2월 25일),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문경유, 어머니 김경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선명의 어릴 적 이름은 용명(龍明)이었다. 그는 16세 되던 1936년 4월 17일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고통 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고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3)
문선명은 1945년 해방 직후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에게서 6개월간 성경을 배웠다. 그리고 1954년 문선명은 통일교를 세운다. 1957년 8월에는 『원리해설』을 발행했다가 1966년 5월 이를 『원리강론』으로 보완하여 간행하였다. 문선명은 1960년 성정여고에 재학 중이던 18세의 한학자와 결혼하였다. 통일교는 1958년 초부터 김영운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미국선교를 시작하였다.4)
문선명은 성적타락을 죄의 본질로 여기는 사상을 『원리강론』에서 체계화시켰다. 그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성적인 범죄라고 해석했다. 그 근거를 범죄 후 아담과 하와가 하체를 가린 것에서 찾았다. 이 때문에 성적타락의 회복은 피가름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문선명은 예수님을 영적 구원만을 성취한 자로 규정하고 자신을 육적 구원을 성취할 재림주, 메시아로 암시했다(제3의 아담). 그리고 한국에 지상천국을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통일교에서는 지상천국이 참부모가 주도하는 축복결혼(합동결혼식)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참가정(통일교 가정)을 기반으로 건설된다고 본다.
통일교는 1960-70년대 반공논리로 미국과 한국의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았고, 한국의 군수사업(통일산업)에 진출하여 이득을 얻었다. 통일교에서 주장한 승공(勝共)운동은 박정희 정권과 통일교를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통일교는 1960년대 중반부터 헌금이나 기업 활동, 신자들에게 꽃, 양초, 인삼 등을 판매시켜 막대한 부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통일교는 전두환 정권과는 밀월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5) 또한 북방외교로 노태우 정권과도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6)
통일교는 1980년대 말부터 승공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반향을 전환하였다. 1990년대 초 문선명은 북한을 방문하여 이전과는 다른 유화적인 태도로 북한을 대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에는 세계일보 회장 박보희를 조문사절로 보낼 정도로 북한진출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북한에 있는 통일교 시설로는 평화자동차, 보통강호텔, 정주평화공원(문선명 고향), 평양가정교회 등이 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북한선교 시 이미 북한에 상당한 지분을 확보한 통일교와의 갈등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7)
통일교는 근래 정계진출도 시도하고 있는데 제18대 총선(2008)에서는 평화통일가정당(가정당)으로 참여하여 1.05%를 획득했다. 당시 기독당은 45만 표로 2.6%를 획득했다.
통일교는 2012년 9월 교주인 문선명이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통일교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에 대한 기독교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통일교는 문선명의 사망 전후로 한동안 후계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문선명의 사망 즈음에 7남 문형진과 4남 문국진에게 통일교의 주도권이 승계된 바 있지만 지금은 부인 한학자가 통일교의 중심에 서 있다.8) 그럼에도 통일교는 종교적인 조직인 동시에 경제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 세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곧 통일교는 조직과 교리의 체계화 작업으로 문선명 사망 후에도 계속 존속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의 통일교 신도는 2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태선의 전도관(천부교)
박태선은 한국전쟁 시기에 성장한 또 다른 기독교 신흥종파의 교주로서 1990년대까지 맹위를 떨쳤다. 그는 자신을 영모(靈母), 감람나무,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읍 읍남리에서 태어난 후 1990년 2월 7일 사망하였다. 그는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서 큰 감동을 받고 기도하다가 뜨거운 불을 받았다고 한다.9) 그는 이후 1956년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를 조직하고, 1957년부터 신앙촌을 건설하여 자신만의 종교적 아성(牙城)을 구축하였다. 첫 번째 신앙촌은 부천 소사에, 두 번째 신앙촌은 양주 덕소에(1962), 세 번째는 경남 양산에 건설하였다(1970). 박태선은 1960-70년대 신앙촌에 시온산업을 설립하여 100여 개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였는데, 이는 신흥종교가 기업과 연결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전도관은 1980년 전환점을 맞는다. 박태선이 예수와 성경을 비난하면서 기독교와 단절을 시도하고 교명도 천부교회로 바꾼 것이다. 이때 많은 신도가 전도관에서 이탈하였다. 1970년대 1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으나 실제적으로 천부교에 속한 신도는 수만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몇 천 명 수준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박태선의 영향을 받아 생긴 분파는 20여 개를 헤아린다. 대표적인 것으로 ‘영생교 하나님의 성회’의 조희성, ‘장막성전’의 유재열, 그리고 장막성전에서 분립한 ‘신천지’의 이만희, 동방교의 노광공 등이 있다.10) 조희성은 박태선 전도관 전도사 출신으로 1980년 초에 영생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박태선의 감람나무 둥치의 사명이 끝나고 이제 감람나무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사명을 자신이 맡았다고 주장했다.11) 노광공(1914-1967)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박태선을 따라 다니며 예배 때마다 북을 쳤다. 그는 대구에 동방교회를 세우고 경상남북도를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유명세를 탔다. 당시는 박태선과 나운몽의 부흥회가 전국을 휩쓸 때였다. 한국 교회는 1955년부터 통일교와 전도관을 사이비 혹은 이단으로 비판하여 교회들이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만희의 신천지
현재 한국 교회에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있는 이단은 신천지(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다. 이는 거의 모든 교회 앞 현관에 ‘신천지 신자를 사절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1984년 세워진 신천지는 박태선계, 특히 유재열의 장막성전의 영향을 받았다. 신천지를 세운 이만희(1931년 경북 청도 출신)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천지에서는 신자의 숫자가 14만 4천 명이 될 때 자신들이 왕과 제사장이 된다며 포교에 열중한다. 그런데 그들의 전도방식 때문에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고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교회신자들을 집중적으로 회유하여 신천지로 데려오거나 교회 자체를 신천지로 접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신천지의 훈련된 신자들은 ‘추수꾼’이라고 불린다. 추수꾼은 관계전도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성경공부 모임인 ‘복음방’으로 데려온다. 복음방에 온 이들은 신천지식 성경공부를 하게 된다. 문제는 추수꾼이 전도를 하기 위해 접근하는 방식이 매우 비상식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선교방식을 ‘모략’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포섭의 대상으로 삼은 교회를 ‘추수밭’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전도를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또한 교회에 침투하여 헌신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의 리더가 되어 세력을 확보하려 한다. 곧 이들은 교회에 침투하여 이를 접수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한국 교회에 큰 혼란을 주고 있다.
또한 신천지는 가정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들은 14만 4천 명이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신자가 된 이들은 가정과 학업을 포기하는 것이 다반사다. 또 직장을 나가는 이들도 그 목적이 포교인 경우가 많다.
신천지는 모든 성경을 ‘비유’로 풀어간다. 엉터리 해석이지만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단순하고 명쾌한 뜻풀이, 비유풀이로 여겨설득을 당한다. 처음부터 이만희를 보혜사라 소개하면 믿지 않겠지만 단계식 성경공부에 세뇌되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주장에 넘어가는 것이다. 신천지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회자가 모르는 교회 밖 성경공부를 조심하는 것이다. 교회 밖 성경공부는 십중팔구가 신천지이다.


안상홍의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 앞에서 언급한 이단들과는 그 뿌리가 다르다. 통일교나 전도관, 신천지 등은 김성도나 김백문 혹은 그들에게서 파생된 통일교나 전도관의 영적·역사적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교회는 미국에서 출발한 안식교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한국 교회 이단 중 가장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분파이다.
안상홍(1918-1985)은 1962년 안식교에서 탈퇴하고, 1964년 ‘하나님의교회 예수증인회’를 부산에 창설하였다. 이후 1985년 안상홍이 죽자 ‘하나님의교회 안산홍 증인회’로 교단명칭을 바꾸었다. 1980년대 하나님의교회는 1988년 늦은 비 성령이 오시면 14만 4천 명이 휴거 받고 지구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2)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을 ‘재림 그리스도’와 ‘(성령)하나님’으로 믿고, 장길자를 새예루살렘의 어머니,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 장길자는 1981년 안상홍으로부터 하나님의 신부로 택함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가장 큰 교리적 특징은 하나님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창세기 1장 26-27절, 갈라디아서 4장 26절,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을 그 성서적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안식교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절기를 매우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을 지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월절이다. 그들은 이를 구원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성만찬도 유월절에만 거행한다. 자신들이 이러한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이것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교회는 부활절을 지키지만 일반 교회와 날짜가 다르다. 그들은 기성교회의 부활절 관습이 이교적이라고 비판한다. 하나님의교회는 ‘무교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에 부활절을 지키며, 달걀이 아닌 떡을 먹는다. 그들은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누가복음 24장 13-32절,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찾는다.
하나님의교회는 해외선교에 적극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때문에 해외의 신도들이 성지순례로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 하나님의교회측 주장에 의하면 20-40대 젊은층이 많고, 하나님 어머니가 있다는 주장에 동감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하나님의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으로 선교하고 있다. 그들은 150여 국가에 1,900개(국내 400개, 해외 1,500개)의 교회가 있으며 등록신도는 145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2010년 한해 등록신도만도 22만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13) 이처럼 하나님의교회는 사회적 공신력을 통해 교세를 확장하는 전도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봉사활동은 이들의 중요한 전도방법이다. “하나님의교회 봉사의 모토가 ‘어머니의 마음’으로”라고 말한다.14) 한 이단연구자는 이 전도방법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정확하게 알게 하는 전략”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5) 최근 하나님의교회는 신천지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반사이익을 챙기며 성장하고 있다.16) 하나님의교회는 교리적 이단의 성격이 강하다. 때문에 한국 교회는 기독교 신학을 변증하는 논리적, 신학적 작업을 충실히 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거울이자 반면교사
저명한 역사신학자이자 조직신학자인 맥그라스(Alister Mcgarath)는 이단을 계획적이기 보다는 우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뒤집고 동요시키고 심지어 파괴하게 된 기독교 신앙의 한 유형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이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제를 특정 방식으로 정립하려고 시도했지만 파르테논 신전을 보수한 니콜라오스의 꺽쇠처럼 결국 교회에 더 큰 화를 불러온 실패작이다.17) 곧 이단은 본래 교회를 파괴할 생각으로 시작한 사상이나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교회를 더욱 파괴시킨다는 뜻이다. 이는 이단의 주장이 처음에는 매우 그럴듯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마침내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의미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사의 여러 이단들을 통해 충분히 인지한 바 있다.
우리가 이단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치명적이다.18) 교회사에서 이단의 출현은 기존 교회의 부패와 영성의 고갈, 세속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존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이단의 틈새를 교회 자체가 제공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성도들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자기정화와 개혁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곧 이단에 대한 비판적 대응도 중요하겠지만 이단적 종파가 발생하는 근본적 원인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단들이 기성 교회에 던지는 하나의 긍정적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을 우리의 거울이자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이단을 신학적으로 알아야 하는 이유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단을 앎으로써 정통신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단은 정통신앙이 왜 괜찮은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나 기독교 진리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그럼에도 정통신앙은 당시 시대 속에서 기독교 신학에 대한 최선의 고백이자 진술이다.19) 때문에 이에 대한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자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 준다. 우리는 많은 이단의 도전 속에서 더욱 성장한다.



전인수 교수
그리스도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있다. 그리스도대학교에서 신학을, 서강대에서 사학을 전공하였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를,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경대학교에서 중국근현대사로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신학이 공론화, 사변화하는 것을 경계하며,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환원운동, 한국 교회의 주체적 신앙운동 및 선교역사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김교신 평전』, 『기독교 한국에 살다』(공저)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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