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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된다는 것-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을 읽고 -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리더의 DNA, 다윗 “대통령이 다윗 같았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내 안의 야곱 DNA』를 집필한 후, 다음 책은 삼손 아니면 다윗을 예상했었다. 나름 예수 잘 믿는다는 내 속에서 영적 축복과 세속적 축복을 동시에 갈망하는 야곱스러움을 보았다면, 평범한 사람 속의 욕망은 삼손의 그것이 아닐까?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탕진한 삼손이 현대인의 자화상이지 싶었다. 내 속에는 야곱도 있지만 삼손도 있다.다윗은 우리 사회 리더의 모델이자 모형이었으면 했다. 천사의 영성과 동물적 정치성 즉, 노래하는 시인이자 무장한 전사인 그를 한국 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본받아야 할,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롤모델이라 여겼다. 역대 대통령들의 면면을 보면, 저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듯했다. 시인의 감수성을 갖고 있으면 현장의 감각이 조금 떨어지고, 대중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데 탁월하면 인문학적, 도덕적 지수가 부족해 보였다.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다윗을 읽기 위해,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이 땅에 다윗과 같은 대통령을 기다리며, 나는 공자의 『논어』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탐독하고 있다. 내가 바위산 얼굴을 날마다 바라보는 어니스트라도 된 듯이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서 난 자가 인류와 세계를 구원한다면, 그 다윗의 길을 따라 정치를 하는 탑 리더가 등장할 때,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성큼 다가오리라. 2. 두 얼굴의 사나이: 구직자인가 혁명가인가?어디서 시작할까? 책 밖과 안에서 실마리를 잡아당길까 한다. 먼저 책 밖으로 나가보자.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1469년에 태어나서 1527년에 죽었다. 그의 생몰연대는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 마르틴 루터와 상당히 겹친다. 1483년에 출생해서 1546년에 운명했던 루터가 열네댓 살 아래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 문에 95개조 논박문이 걸린 것이 1517년이었고, 마키아벨리가 죽기 10년 전이니 어쩌면 두 사람은, 아니 적어도 마키아벨리는 루터의 이름을 들었을 법하다.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호명한 까닭은 남유럽의 르네상스(Renaissance)와 중부와 북유럽의 종교개혁(Reformation)의 선두 주자가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특히 피렌체는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 도시였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를 규정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것. 루터는 철저히 기독교적이면서도 독일적이었다. 이 책은 신이라는 작업가설을 배제하고 철저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정치와 권력의 메커니즘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탈리아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이번에는 책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매사의 시작과 끝을 보면 전부를 알 수 있으니, 이 책의 서두와 결말을 통해 책 전체를 휘어잡아보도록 하자. 시작은 이러하다. 로렌초 대인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의 헌정사의 맨 마지막 구절은 애절하다. “만약 대인께서 서 있는 높은 곳에서 때로는 이렇듯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신다면, 운이 부당하게 가하는 거대하고도 끊임없는 심술을 제가 어떻게 참아내고 있는지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여백에 이렇게 메모했다. “나 알아 달라! 나 여기 있다!”실패한 구직서이다.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에 의해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고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사보나롤라가 집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축출된 뒤에 들어선 정권에서 29세의 마키아벨리는 혜성같이 등장해서 15년 정도를 제2 서기라는 직함으로 봉직하였다. 그냥 고위 외교관으로 보면 된다. 최고행정기관인 10인 위원회의 비서도 겸직했다.피렌체의 안정과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한 그는 각 나라의 왕들과 귀족, 장군을 만나서 대화하는 경험을 풍부히 쌓았고, 그것이 이 책의 자산이 되었다. “이는 제가 현대의 일들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고대의 일들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다가 복귀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복귀를 노리며 절치부심하던 그는 이 책을 헌정함으로 당시의 실권자에게 피렌체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고자 했다. 이 책을 헌정 받은 로렌초는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그러나 실패했기에 더 위대해졌다. 의 공자도 14년간 천하를 주유했으나 실패했고, 예수의 사역 역시 겉으로만 보면 당연히 패배이다. 제자단의 핵심이 스승을 배반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단기적 안목으로 한 사람 전체의 인생을 평가하기에는 무리다. 권력의 눈 밖에 나, 로마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했던 이 책이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은 마키아벨리의 시대가 수용하지 못할 불온한 사상이었기에, 그래서 시대와의 불화를 빚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는 실패로 보였지만, 결국 그가 이긴 것이 아닐까.나는 마지막 단락을 읽고서야 이탈리아의 통일과 부국강병의 이상이 오롯이 담긴 책임을 알았다. 제목은 “이탈리아를 지키고 야만인들로부터 그곳을 해방하기를 촉구함”이다. 밀레네 공화국, 피렌체, 로마교황청,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공화국 등 강력한 몇 개의 나라와 도시국가를 합하면 대략 서른 개의 나라로 분단된 조국, 그러면서도 서로 물고 뜯느라 외세를 끌어들이고 능욕당하는 조국. 그러니까 그가 로렌초 대인에게 자리를 구걸해서라도 욕망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이탈리아의 영광의 회복이었다.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가? 대제국 로마의 땅이자 후손의 나라가 아닌가. 그랬던 이탈리아가 갈가리 찢겨 프랑스와 스페인 등 열강의 노략물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비통함과 새로운 이탈리아에 대한 비장함이 책 전체에 흐른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군주가 비운의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을까? 3. 제목과 구성이 책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제목과 구성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제목 잡기이다. 제목 하나에 글의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군주론의 이탈리어는 ‘일 프린치페’(Il Principe)이다. 영어로는 The Prince이다. 왕이 아니라 왕자이다. 영어사전을 들추면 왕자라는 뜻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다음이 ‘작은 왕국의 남자’ 혹은 그 나라의 군주라고 되어 있다.만약에 당시의 이탈리아가 왕국이었다면, 군주론이 아니라 황제론, 또는 왕론이 되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정상 군주이었으니까 군주라고 쓰고, 왕, 대통령으로 읽으면 된다. 한 사람의 군주에게 바치지만, 이탈리아의 수많은 군주가 이 책을 읽고 강인한 군주가 되어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책은 여타의 고전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다. 분량이 그리 긴 편이 아니다. 150쪽 정도이다. 기다란 해설이 보태지고, 용어 설명을 곁들여서 두껍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내용도 난해하지 않다. 세계를 뒤흔든 10권의 책 중 , , , 등에 비해서 어렵지 않다. 다만,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스킵하고 넘어가도 무방하다. 이것은 독서 방법론이기도 한데, 처음에는 전체의 윤곽을 잡는 것에 주안점을 둔 다음, 꼼꼼하게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구성도 심플하다. 총 26개의 장이 있어서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4개로 묶을 수 있다. 1-11장까지는 군주국의 다양한 종류를 나열하고 각각의 장단점에 따른 통치 방식을 설명한다. 두 번째는 12-14장인데, 군대에 관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자국의 군대가 아닌 용병에 의존했다. 마키아벨리는 일관되게 타인의 힘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군대로 국가를 수호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강국의 기초는 좋은 법과 좋은 군대이고, 군주가 해야 할 딱 하나의 일을 고르라면, 전쟁의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세 번째인 15장에서 23장은 군주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어떤 군주가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조언한다. 여기서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헛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위험천만한 주장들이 많이 한다. ‘자비로운 군주가 되기보다는 잔혹하라’,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안겨주라’ 등 냉철하고 사악하다는 평판을 들을 내용이 수두룩하다. 마지막은 24장에서 26장이다. 저자가 하고픈 말들이 여기에 담겨있다. 왜 찬란한 로마 문명의 후손들인 이탈리아와 군주들이 야만인과 다름없는 북쪽의 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는지를 성찰한다. 무엇보다도 운에 의존하지 말고 덕에 기반하고 성품을 훈련하여 야만인의 지배와 조국의 분열로부터 해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글을 맺는다. 4. 덕(비르투) vs. 운(포르투나)나는 군주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며, 한 쌍을 이루는 덕과 운에 초점을 제한해보려 한다. 그리고 저 개념 쌍은 사분오열되어 있는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고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이상을 현실화한다는 조건 하에서 군주에게 필요한 것들이고,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이탈리아어 비르투(virtu)는 학자에 따라 ‘덕’(德)이라고 하고, ‘역량’으로 번역한다. 이 개념에는 나름 족보가 있는데,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바로 ‘아레테’(arete)인데, 오늘의 ‘덕’ 혹은 ‘미덕’이라는 단어의 시작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서 보는바, 아레테는 덕이 아니라 ‘탁월함’(Excellence)이었다. 구두장이가 구두를 잘 만드는 것, 전사의 전투 능력이 걸출한 것, 말이 잘 달리는 그것을 ‘아레테’라고 했다. 구두장이의 탁월함이 구두장이의 미덕이다. 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답게 사는 것일진대, 그 이상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바로 아레테이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에는 미덕으로서의 덕, 정치 능력으로서의 역량이라는 의미를 두루 담았다.다음으로 마키아벨리가 사용한 운의 라틴어는 포르투나(Fortuna)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운명의 여신 튀케(Tyche)의 로마식 변용이라 보면 된다. 인간에게 행운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운명의 여신의 이름이다. 한 사람의 타고난 숙명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한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유지하는 데는 이 ‘운빨’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의 물음은 마키아벨리가 왜 운 또는 행운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냐는 것이다. 본시 정치란, 폴리스이었던 그리스 사회나 인문주의자인 마키아벨리에게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뜻을 물어 정치하던 히브리 문명의 다윗과는 달랐다. 인간의 정치 행위에 신을 개입시킬리 만무한데 말이다. 그에게 종교는 초월적 가치보다는 한 사회를 조직하고 통일하는 데 긴요한 사회학적 효용성일 뿐이다. 그런 그가 왜 행운의 여신을 말할까?그가 살펴본 군주들은 운명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길 없는 인간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마키아벨리가 모범으로 삼았던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는 그 자신의 타고난 운과 뛰어난 역량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열망을 실현할 듯이 보였으나, 아버지인 교황의 죽음과 함께 외부의 운이 소진되고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로 좌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마키아벨리는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운명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운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할 것을 군주들에게 주문한다. 운명에 기대는 자는 여신이 변덕 부리면 곧바로 파멸하기 때문이다. 운은 삶과 정치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할 뿐 전체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나머지 절반은 우리의 자율적인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25장 4절).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덕이란 구체적으로 뭘까? 예를 든다면, 용병이 아닌 자국군대를 양성하고, 군사력을 튼튼히 다지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용병에 의존했는데, 그들은 이익을 따라 행동할 뿐 목숨 바쳐 싸우지 않는다. 그들의 배반과 나태함으로 낭패 보기 십상이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운이나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될 것과 자신의 나라는 자신의 힘으로 보호하는 안보력의 강화를 역설한다.외치와 관련해서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고, 내정과 관련해서는 귀족과 시민을 지혜롭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 핵심은 ‘~처럼 보이기’이다. 그가 실제로 자비롭든 냉혹하든 상관없이 시민들에게 자비로운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나 사랑받는 군주가 될 것인가, 두려운 군주가 될 것인가라는 양단간에 결정할 시간에는 주저 없이 공포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사랑받으려는 것은 타인의 의지와 호의에 기대게 하고, 혼란을 가속화하는 우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국정의 안정을 위해서 잔혹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군주는 “스스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선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리고 필요에 따라 이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15장 6절) 우리는 여기서 ‘필요’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폭군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선하면 군주만이 아니라 국가도 악한 자와 외세에 의해 멸망될 것이고, 항상 악하면 선한 민중이 권좌에서 축출할 것이다. 해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운명이고 역량인 것이다.군주의 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유명한 사자의 무력과 여우의 지혜이다. 현명한 군주라면 사자의 무력으로 군주를 두렵게 여기게 해야 하고, 여우의 지혜로 군주가 인자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야 한다. 바로 ‘위장과 은폐의 대가’(18장 11절)가 되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야수와 같은 잔인한 조치를 취할 줄도, 상황에 따라 인간적인 따뜻한 온정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든 “운의 방향과 사물의 변화가 그에게 지시하는 대로, 스스로를 바꿀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18장 15절)결국 군주는 도덕적 대의명분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어떤 규칙이나 규제도 없는 방종은 폭정으로 이끌 것이다. 이탈리아의 해방과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해서, 시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도덕과는 전혀 다른 게임의 룰이 작동하는 정치의 세계를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5. 다윗 군주론다윗의 일생은 여우와 사자의 이중성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 양의 두 얼굴을 본다. 파스칼이 말한바, 인간 안의 천사와 동물의 양면성이 너무나 매끄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다. 그가 선보인 행동 하나가 천사의 영성과 동물의 정치성을 이음새가 없이 통으로 짠 옷처럼 산뜻하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볼까나. 요나단과의 우정이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다. 나는 다윗이 요나단에 대한 사랑이 진심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떤 계산도 없는 순수 무구한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목숨처럼, 아니 제 목숨 이상으로 사랑한 것은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이었다(삼상 18:1, 3 그리고 20:17, 공동번역). 단언하건대, 요나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윗은 왕은커녕 장인의 손에서 살아남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 다윗의 영원한 2인자 요압이 제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암살한 적이 있었다. 아브넬은 사울의 사후, 북이스라엘의 실권자이었다. 사울의 집안이 갈수록 몰락하고, 다윗의 기세는 욱일승천이다. 아브넬은 생각했을 것이다. 일신의 안전과 함께 분단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을 들어 다윗에게 바치기로. 그런 그를 요압이 아무도 모르게 모살해버렸으니 누구라도 다윗의 지시라고 믿을 수 밖에.소식을 들은 다윗은 애달프게 운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준다. 그를 위한 구슬픈 애가를 부른다. 그는 곡기를 끊는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제야 다윗의 짓이 아님을 안다(삼하 3:37). 이 구절을 근거로 역으로 추적하면, 다윗의 일련의 행동은 자신의 오해를 벗어나기 위한 눈물이었다. 상당히 정치적으로 장례를 이용한 것이고, 자신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방책이 장례와 애가이었다. 한날한시에 죽은 사울과 요나단의 장례에서도 그랬듯이, 그의 눈물은 진정성이 있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무엇이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진실로 슬퍼하는구나. 철천지원수로 여길 법한 사울을 사랑했구나. 그런데도 사울은 옹졸하게도 충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애를 썼구나. 못난 사람, 못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다윗의 눈물은 정치적이었으면서도 진심이 담긴 영적인 것이었다. 사실, 내가 다윗의 눈물을 들먹이는 까닭은 보수이든 진보이든 간에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의 죽음 앞에 울 줄 알았으면, 아니 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성군 다윗처럼 진정 어린 눈물은 아니더라도 마키아벨리가 바라는 군주처럼 ‘우는 척’이라도 해 주었으면,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죽음 앞에, 그리고 박정희와 김영삼의 죽음 앞에 눈물을 떨굴 줄 아는 대통령을 바라면?내가 다윗을 사랑하면서도 공포에 가까운 경이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찬스를,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나, 요압을 위시한 부하들의 간곡한 호소를 만류하고 끝내 돌아서는 장면이다. 나는 그 대목을 묵상할라치면, 칼에 손을 댔다가 떼는 다윗이 상상 속에서 그려진다. 충성을 다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오해와 살해 위협이 아니었던가. 다윗이 사는 세상에는 사울이 없고, 사울의 세상에 다윗의 자리는 없다. 그것이 사울의 세계관이었다면, 다윗에게 사울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제거의 대상은 아니었다.다윗에게는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이유가 수두룩하다. 다윗이 왕이 될 것임을 이미 천하가 알지 않는가? 당사자인 사울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미친 왕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지 오래다. 살지 죽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칼을 빼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왕이 악하고 무능하다고 베어버리면,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후에 자신이 세울 왕국의 왕 중 목숨 연명하고 부지할 왕이 몇 명이나 될까? 제 눈에 옳은 대로 왕들을 사울 같다고, 사울이라고 갈아치울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사울을 죽임으로 그도 사울의 길을 걷는다. 다윗이 사울처럼 되면 하나님은 무엇 하러 사울을 폐위시키겠는가.어떤 이는 다윗이 정치적 계산에 탁월하다고 은근히 비아냥댄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그런 정치적 감각 없다면 그것도 문제다. 반대로 종교적인 신앙으로‘만’ 행동했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힘과 힘, 칼과 칼이 부딪치는 현장에서 정치성 없는 순전한 영성으로 다윗이 움직였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영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따금 다윗은 사울을 살려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을까? 자책하지 않았을까? 시편을 보면,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다윗이 자주 보인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믿음, 지금 왕좌에 앉은 이를 무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반복되는 반정의 빌미가 될 것이므로 끝내 포기한다. 이는 사자의 강인함과 여우의 영리함이 공존하고 통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그 이후 다윗이 통일왕조의 기틀을 반석 위에 세웠건만 철없는 르호보암에 이르러 다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기이하게도 남 유다는 어떤 정변도 없는 안정적인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다. 북 이스라엘이 호시탐탐 왕좌를 차지하려는 군웅들의 혈투로 정국의 안정이 요원했던 것과는 판이했다. 왜 그랬을까? 딱 하나다. 다윗은 자신의 전임 왕에 대한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도 거부했기 때문이다.한국 정치사, 특히 2천 년대 이후의 정치의 비극은 두 번의 탄핵이었다. 노무현과 박근혜 두 대통령에 대한 탄핵. 나는 이 두 사건이 앞으로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탄핵 트라우마는 상대방에 대한 끝도 없는 미움과 증오를 탄핵의 추억으로 정당화하면서 어떠한 대화나 타협도 없는 전쟁 상태로 몰아넣었다. 천금 같은 두 번의 탄핵 기회를 날려버리고 쿠데타나 반역이 없는 정당한 권력 승계로 이어진 나라를 건설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서 칼을 빼지 않은 군주일까? 기도한다. 다윗 같은 대통령을 볼 수 있기를. 다윗과 같지 않아도 좋다. 다윗을 닮은 그런 리더가 대통령이 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으리. 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용서한다는 것- 자크 데리다의 『용서하다』(이숲)를 읽고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1. 용서, 그 놈 참불편한 말이다. ‘용서’, ‘용서하다’라는 표현 말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파고들려고 해도 용서란 놈이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감정이 개입되고 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복잡하여 풀기 힘들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문제)은 저리 가라다. 단칼에 베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건 논란의 종착지가 아니라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기,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기다. 나는 언젠가 여러 곳에 단편적으로 발표한 글을 묶어 ‘용서’에 관한 책을 쓰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책 제목을 이렇게 잡았다. 이 말은 용서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은 일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 되는 일을 해야 하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고 비현실을 현실화하라는 요구다.그 힘든 용서를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도 용서하기 싫은 이가 있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의 힘으로 용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용서가 없었다면 여태껏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혀 내 삶은 엉망이 되고 망가졌을 것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나를 살렸다.하지만 용서는 아프다. 아리다. 누군가 노래했듯이 ‘가슴이 멍들고 맘의 눈은 멀어도 다시 또 발길은 그 자리.’ 용서는 내가 용서 받았던 십자가로 이끈다. 문제적 철학자의 세속적 용서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의 용서를 짚어볼까 한다.2. 데리다, 그 사람 참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책은 1990년대의 한국 사회에 급격히 유통되었다. 어디를 가나 데리다의 이름이 호명되는 통에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저서를 띄엄띄엄 읽던 차에, 박사과정 중 참여한 세미나는 다른 어떤 책도 읽지 않고 그의 주요작품인 『그라마톨로지』에 오롯이 바치게 만들었다. 어려웠다.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그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플라톤(Platon)과 특히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대한 선이해가 부족해서 그랬고, 또 하나는 그의 현란한 글 솜씨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 책 『용서하다』를 읽은 나의 책 벗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 문장이 너무 길고, 하이픈과 괄호 안에 쉴 새 없이 담겨진 말들로 인해 방해가 된다. 그때 나도 그랬다. 세미나 중간쯤에 이르러서야 나는 확고하게 결심했다. ‘데리다를 읽지 않겠다!’ 겁도 없이 우리 당대 최고의 전위이자 칭송받는 학자를 박사과정 학생이, 고작 한 권을 세밀하게 읽다가 내던지다니. 데리다가 아닌 나를 비웃는 손가락질이 여실히 느껴진다. 지금 돌아보면, 젊은 날의 싱그러운 패기였던 것 같다. 그 이후의 궤적을 좇아서 부지런히 데리다를 읽었다면, 나의 생각은 훨씬 더 넓어졌을 것이고, 나의 문장은 이처럼 딱딱하지 않았으리라.당시 그를 ‘때려치운 이유’가 있었다. 데리다의 이름 앞에 언제나 따라 붙는 수식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해체’다. 해체라는 단어에서 나는 시체 해부의 냄새를 맡았고, 건물 해체의 먼지를 보았다. 서구 사상가의 기초와 전제를 폭파시켜 버리는 그의 과감함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해체가 파괴는 아니다. ‘Deconstruc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풀어보면, 접두어 ‘de’는 뒤에 따라붙는 단어의 의미로부터 벗어남, 이탈함을 말한다. 반대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구성과 구조(Construction)를 파괴한다는 말이렷다.나의 독후감은 이랬다. “아, 데리다는 파괴하고 해체할 무언가가 있구나!” 그는 치고받을 서구의 아버지 플라톤이 있었고, 씹고 까고 뒤집어엎을 프랑스인 루소가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인이자 기독교인인 내게 해체할 대상은 무얼까?’라는 의문에 이르자 절망에 빠졌다.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을 해체하려면 한문으로 된 문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한문으로부터 단절되었고, 그렇다고 영어와 독어,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서구 문헌을 읽을 능력도 부족하다. 겨우 영어로 더듬더듬 읽을 뿐. 그래서 데리다 읽기를 관두었다.그랬던 이 파괴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가 종교를 말한단다. 어떻게 부수고 세웠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결정적으로 나를 흔든 것은 『신앙과 지식』(아카넷)에 실린 대담, 와 이 책, 『용서하다』이다. 아니, 용서라니?! 망치를 들고 다니며 온통 부서뜨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계보를 이은 이 철학자가 기이하게도 용서를 주장한다는 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말한 해체는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해체가 아니다. ‘Construction’을 ‘De’하자는 것을 넘어서 ‘De’해서 ‘Construction’하자는 말로도 읽힌다. 즉 이전의 것을 파괴한 다음에 새롭게 구성하자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적자와 같았던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 용서란 과연 뭘까?3. 종교라는 것데리다는 용서에 관한 말을 하기 전에 종교가 뭔가를 설명한다. 그는 종교를 ‘악’이라는 너무나 분명한 현실과 연관 짓는다. 한마디로 종교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 시대가 ‘종교로부터의 회귀’라고 운운하지만, 결국 그것은 ‘구원에 관한 담론’일 수밖에 없다. 그 구원도 바로 악에서 출발하는 것이고.나는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인생 최고의 물음,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왜 내게 고통이 있는가?”라고 역설한 바 있다. 악이라는 실재가 없다면, 고통이라는 주관적 현실이 없다면, 종교는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과는 현격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그러나 악에 대한 문제는 비단 종교만 독점하지 못한다. 저 많고 많은 문학작품들이 인간의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종교가 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여타의 영역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 종교가 악과 고통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면, 다른 분야와는 구별되는 출발 지점은 어디여야 할까?데리다의 대답을 읽는 순간, 나는 전율했다. 종교의 아포리아(하나로 어떠한 사물에 관하여 전혀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를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계시란다. “계시성(Offenbarkeit)은 계시(Offenbarung)보다 더 근원적”(『신앙과 지식』, p. 100)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적 계시가 아니라 계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원초적이라는 것인데, 데리다가 ‘계시’를 말할 줄이야. 자유주의 신학과 인간 중심의 신학에서, 하나님 은총의 신학 기치를 올린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일성(一聲)이 ‘계시’가 아니던가?계시는 이 세상 밖에서 이 세상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어떤 것이다. 이 세계와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낯선 것, 그래서 그 갑작스러운 방문 앞에 우리는 현기증을 일으키고, 두려움과 떨림, 공포와 전율을 느낀다. 그래서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사 6:5)를 부르짖거나 베드로처럼 ‘나를 떠나소서’(눅 5:8)라고 외친다.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의 영토이고, 그 불가능의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하기 싫다고, 하기 어렵다고 밀쳐두었던 것을 과감히 시도해 보라고. 이 세속의 철학자가 강대상 위의 설교자마냥 강력하게 선포한다.4. 용서라는 그 불가능한 것데리다가 말한 해체는 부정과 파괴가 아니라고 앞서 언급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권위 있게 주어진 것을 ‘다르게 읽기’, ‘뒤집어 읽기’이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대화 파트너가 있다. 꼼꼼하게 읽고, 그가 말한 것 안에서 그를 뒤집어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파묻는 것이 아니라 되살려내는 작업을 한다.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데리다는 선행하는 작업에 딴죽을 건다. 러시아계 유대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이다. 그는 초기작인 『용서』에서 무조건적 용서를 주장했다. 용서란 본시 이유가 없는 것, 어떤 대가를 기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도 필요치 않다. 때문에 그것은 형법의 논리와 배치된다. 죄지은 자에게 오로지 벌만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닐 것이다.그것이 1967년에 출간된 책에서의 주장이었다면, 1971년에 발표한 논문 에서 이전의 입장을 뒤엎는다. 그의 이 한마디는 강력하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용서하다』, p. 22) 그는 왜 종전의 주장을 철회했을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용서를 청하지 않은 자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특이성이다. 나치는 특정한 이유가 없이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할 권리 자체를 원천 박탈하는 최악의 범죄이자 완전한 의미에서의 악을 자행하였다. 이런 죄는 용서할 수도, 용서 받을 수도 없다.나는 장켈레비치의 상호모순적인 주장을 십분 이해한다. 나 개인의 문제로 국한해서 말하면, 용서해야만 한다는 생각, 용서하고픈 의지가 내 일부를 차지한다. 또한 ‘그런 못된 작자에게 용서가 가당키나 한 건가’ 하는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과 징벌을 요구하는 분노가 있다. 나는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장켈레비치는 전자에서 후자로 확고한 전환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데리다의 출발점은 바로 이곳이다. 장켈레비치의 이율배반적인 주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용서의 무조건성에서 조건적인 용서로의 이행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다. “불-가능을 실현하고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만 용서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고 용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p. 34) 용서가 죽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 진정한 용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불가능하기에 용서는 용서이다. 가능한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에만 용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나는 다음 문장을 읽고 경건한 신자의 고백이거나 고대의 영성가의 글이라는 착란을 일으킬 만큼의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변상하고자 하고, 용서를 빌려고 그 잘못에서 벗어날 때만 그를 용서한다면, 이런 용서는 용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어떤 계산적인 논리에 휘둘리게 됩니다(p. 81).저 문장에 합당한 한 단어가 우리 기독교에 있다. 바로 ‘은혜’이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p. 124-5)에서 은혜와 매매를 대립시킨 바 있다. 돈이란 매매의 세계이다. ‘기브 앤 테이크’의 논리가 엄격히 지배한다. 반면 은혜란 ‘거저 줌’의 논리이다. 까닭 없이, 그가 누구이고, 그가 어떻게 살았던지, 지금 어디에서 살고 거머쥔 것이 얼마이든지 무관하게 베풀어지는 것이 은혜다. ‘거저 줌’의 세계는 매매의 세계를 무력화하고, 매매의 법칙의 권력을 무위로 돌린다.여기 은혜의 법칙을 말하면서도 종내는 매매의 논리를 따라 말한 철학자가 있다. 내게 ‘용서’가 한 개인의 치유적 효과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행위라는 것, 인간의 조건 자체를 회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각인시켜 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다. “인간사의 영역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인간의 조건』, 한길사, p. 303)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연과 인간의 필연적 조건, 곧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들,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타자로부터 받았던 상처에 영원히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은 용서라고 단언한다. 용서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자신을 타인에게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과거의 나로 축소되지 않는 열린 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그러나 한나는 용서가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처벌과 보복의 정당성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용서의 힘을 제한한다(p. 42). 왜 그런가? 용서받을만한 것은 용서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처벌받아야 한다면, 그건 용서일까? 그렇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언제까지나 용서받지 못하리라.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은 자신이 받은 피해로 인해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용서를 청하지 않아서 용서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 과연 용서란 존재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자신의 주장과 달리 회복하는 힘으로서의 용서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처벌 받아 마땅한 죄와 보복하려는 의지를 담대하게 단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그렇다면 과거의 특정한 잘못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되풀이하지도 않을 것이다.주의할 점은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용서라는 이름으로 조건적 용서를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가능은 언제나 가능과 함께 있다. 가능한 것이 있기에 불가능이 있고, 가능성의 세계에 살면서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무조건적 용서 없는 조건적 용서는 맹목이고, 조건적 용서 없는 무조건적 용서는 공허하다.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은혜의 세계를 역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용서만이 악, 악인, 괴물과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괴물과의 싸움(p. 46)은 괴물의 존재 방식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괴물을 괴물의 방식으로 투쟁하는 것은 그 자신이 괴물이 되는 첩경이다. 비즈니스적 관계로 사람을 물건화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해체하는 유일한 길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 이유 없이 용서받았듯이 이유 없이 용서하는 그것뿐.나는 데리다가 ‘권력 없는 용서’를 말하는 대목이 신학적으로 놀라운 통찰이었다고 본다. 그는 용서에 관한 인터뷰의 말미에서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용서는 ‘권력 없는 용서, 즉 무조건적이지만 주권 없는 용서’(, p. 262)라고 했다. 권력과 주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용서하면서 타인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너를 용서했다는 주어와 주체가 되는 순간, 용서받아야 할 타자, 객체에 대한 지배권을 암묵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용서를 빌미로 상대방은 나의 노예가 된다.데리다의 말을 신학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예수만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예수 외에 다른 무언가가 지배력을 가진다면, 그것의 적절한 이름은 ‘우상’이다. 사영리의 그림처럼 내 마음의 왕좌에서 예수를 끌어내리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꼴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한다.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권을 내가 소유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상적 용서이다. 자기 숭배의 변형이고 신앙의 변질이다. 용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주어진 것, 우리는 그것을 받은 대로 돌려줄 뿐, 소유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5. 용서, 그것 참!데리다의 『용서하다』를 읽으면서 그가 대중적 용서 이해의 한계를 꼬집는 대목은 통쾌했다. 용서의 본질과 의미를 극한의 지점까지 밀어붙여서, 불가능하기에 용서이고 무조건적인 용서만이 진실한 용서라는 말은 세속적 버전의 기독교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유구한 전통을 해체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그가 선물과 정의, 환대와 용서에 관한 대담한 논리를 읽으면서 초기의 데리다가 맞는지 갸우뚱할 지경이었다.그래서 그의 용서론은 객관적인 ‘신’이라는 용어로 명명했을 뿐, 기실 그것은 ‘예수’에 다름 아니었다. 무조건적 용서에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기입해 넣으면 단박에 이해가 된다. 바로 그렇기에 그에게는 예수라는 특정한 한 인물, 십자가라는 특별한 한 사건이라는 실체가 없기에 데리다의 모든 생각은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용서를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그의 마지막 말은 ‘꿈’이다(, p. 262). 무조건적 용서에 대한 꿈 말이다. 불가능하기에 꿈인 것이고, ‘사유를 위한’ 것이기에 꿈이다. 현실을 변혁하는 꿈이기도 하지만, 현실로부터 추상되었기에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 꿈이라도 꾸는 것이 어디인가 싶지만, 꿈이 가리키는 실재가 없다면, 꿈이 현실과 연동되어 있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한낮의 꿈일 뿐이다.반면, 기독교는 용서의 현장이 있고, 실재가 있다. 바로 십자가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도, 무엄하게도 하나님이신 분을 십자가에 매달고도 희희낙락하는, 자기 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을 영겁의 징벌로 복수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아들과 딸로 입양하시는 절대 이해 불가한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그것은 단지 지식에 그치지 않고, 예수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스데반과 바울로 이어지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 대열의 끄트머리에 나도, 당신도 있다. 그날 밤, 그를 용서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데리다와 달리 우리가 용서를 말하는 출발점, 생생한 실재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서는 꿈이 아니라 실재이고, 불가능이지만 가능이고, 당위이자 현실이다. 또한, 데리다가 하나 놓친 것이 있다. ‘용서한다’와 ‘용서받는다’는 다른 층위의 것이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용서를 받을 것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가 없어도 용서하기는 가능하지만, 그는 결코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는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용서 못 할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름 받은 자는 많건마는 대답하는 이, 구원받은 이는 적은가? 용서하기는 무조건적이지만, 용서받기는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개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지만, 십자가의 강도처럼 회개라는 반응이 있을 때에 그 용서는 나의 것이 되는 법이다.사실, 장켈레비치가 절대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정의’의 차원 때문이다. 영화 의 학원 원장이 여전히 고통 중에 있는 당사자와 무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용서받았으며 그로 인해 감사하다고 미소를 띠며 말했을 때. 그때 용서는 응당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함으로 인해 죽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용서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없는 용서가 용서를 죽이는 살인범이다.이것을 조금 확장하면 용서는 정의를 폐기하지 않고 완성한다. “내가 정의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용서를 통해 정의를 완성하러 왔다.” 어디에서 용서와 정의가 일치하는 것을 보는가. 바로 십자가다.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을 수행하신다. 인간의 죄는 용서받아야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행사하신다.‘희망의 신학’을 말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희망의 출처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적절한 신학,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은혜가 되는 복음은 십자가이고, 용서의 복음이다. 데리다가 꿈만 꾸었던 광기 어린 용서, 그 미친 사랑. 우리는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다. 그것이 그와 우리의 차이이다. 그래, 지랄 같지만 용서가 답이다. 벼락 같은 은총인 용서가 참이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죽는다는 것-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죽은 아버지아버지가 죽었다. 시편이 노래했듯 터가 무너지는 경험이었고, 나는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죽은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숱하게 캐물었다. 이전과 이후는 달랐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후의 삶은 신산했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었고, 나와 형제들은 고아가 되었다. 어촌이어도 제법 큰 마을에서 땅 사고 집 사서 떵떵거리고 살 때쯤, 그분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아버지의 죽음 하나로 나의 인생은 BC와 AD가 갈라졌다. 왜 그랬을까? 시골 교회 학생부는 예배 때마다 꼬박꼬박 출석을 불렀고, ‘아멘’이라고 간단히 답하거나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하곤 했다. 나의 단골 메뉴는 전도서 1장 2절이었다. 헛되다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솔로몬의 바로 그 구절 말이다. 죽음은 고작 중학생 남자아이를 고뇌하는 철학자로 만들었다. 나는 회의하는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죽으면 끝이다. 죽어버리면 끝장이다.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두 자만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가 되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으며, 죽음만큼 인생을 고달프고 서럽게 만드는 것도 없다. 대학 시절, 칼 마르크스(Marx Karl)에 매료되었으면서도 키르케고르(S. Kierkegaard), 도스토예프스키(F.M. Dostoevskii), 카뮈(Albert Camus) 같은 실존주의에 흠뻑 빠져들고, 지금도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는 까닭은 ‘죽음’ 때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아예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공포와 전율’이다.실존주의자와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을 유한하다고 정의했다. 여기서 유한성이란 죽음을 말한다. 아무리 오만방자해도 공평한 죽음 앞에서는 인간임을 자각한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죽음을 통해 ‘나는 인간이로구나, 신이 아니로구나, 신이 필요하구나’를 말하게 만드는 그것이 죽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 한계를 인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내가 예수를 믿게 된 자초지종을 이따금 성찰해 보면, 아비 없는 자식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종교들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아니 의연하다고 해야 할까, 태연하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태도를 견지한다. 황동규의 연작 시편 『풍장』을 읽은 적이 있다. 풍장이란 사자의 시신을 볕이 잘 드는 나무나 바위에 올려놓고 비바람과 함께, 세월과 함께 그렇게 소멸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장례법이다. 우리나라 서해의 일부 도서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죽은 자를 바라보는 초연한 태도, 생활 터전의 일부에 들어와 있는 망자. 그것은 유한성에 몸서리치는 내게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그녀 혹은 그들의 죽음이 아닌 소유격 ‘나의’를 필요로 하는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남의 죽음인 양 울지 않고, 통곡하지 않고 대범하고 대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죽음이란 그런 걸까? 아비의 죽음이 남긴 충격으로 내 인생 전체가 출렁거렸다.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데, 나그네와 행인처럼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가당키나 할까? 2. 죽어가는 자의 어머니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1926년생이다. 그녀의 부모는 스위스 취리히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정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완고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사이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고작 900g의 몸무게로. 어머니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녀에게 세쌍둥이는 악몽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p. 20)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비슷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삶을 고민했기에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강요에도 의사라는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그리고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뉴욕으로 이주한다.그랬던 그녀가 죽어가는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경험이었으리라.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이었다. “네 번의 유산을 경험하고 두 아이를 낳은 여자로서 나는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사이클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의사의 대부분은 남자였고, 극소수를 제외하면 죽음을 실패 또는 패배라고 생각했다.”(『생의 수레바퀴』, p. 157)남성 의사들은 죽어가는 환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학문적 연구도 수행하고, 그들이 좋은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상당히 꺼렸다. 남성 의사들에게 죽음은 나와 마찬가지로 허무한 끝이었다. 인생을 성공과 실패라는 단일 키워드로 바라보는 한, 죽음은 언제까지나 실패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반면, 퀴블러 로스는 죽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만큼 탁월한 스승은 없다.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 사이에는 넓고 옅은 회색지대란 없다. 삶은 성장하는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죽음을 보다 너그럽게 맞이할 수 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생의 수레바퀴』, p. 300) 성장에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자기만큼 배우면 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되는 것.그런 그녀에게 시카고 신학교 학생 네 명이 찾아온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중이었다. 매 주일 오전 예배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설교하는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죽음을 정직하게 직면한다. 허나, 막상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를 심방할라치면 두렵고 무력감에 빠진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그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을 앞둔 환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주변 의사들의 냉대 속에서도 말기 환자 5백 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이야기할 공간을 열어주고, 들어줌으로써 그들이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도록 도왔다. 1967년 상반기부터 금요일마다 ‘죽음과 죽어감’이란 비공식적이지만 정기적인 세미나를 시작했다. 여기에 신학생은 물론이고 의대생들, 말기 환자들까지 참여하였다. 이 세미나는 지의 보도로 널리 알려졌고, 그것이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데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정신과 의사인 그녀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죽음학(Thanatology)의 대가, 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퀴블러 로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고,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고 썼다. 그녀는 자신이 쓴 대로 살았다. 2004년, 죽어가는 자의 어머니로 살았던 그녀는 7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가 선물로 남긴 이 책은 오래도록 읽히며 그녀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3. 죽어가는 자의 이야기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저자가 정립한 죽음의 5단계일 것이다. 부정과 고립의 1단계로부터 분노하는 2단계, 협상하는 3단계를 거쳐서 우울에 빠지는 4단계, 마침내 5단계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죽어간다는 것은 저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고, 죽음이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시한부 환자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거의 모든 환자에게서 이런 심리가 나타나며, 초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종종 본다. 부정하는 단계가 반드시 나쁘거나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건전한 반응일 수 있으며 ‘일종의 완충재 역할’을 해서 자기 삶을 돌아보도록 돕는다. 주변 사람들이 해 주어야 할 일은 부정하려는 욕구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부정에서 수용으로 곧바로 넘어가면 오죽 좋으련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와 광기, 시기, 원한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그는 묻는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누군가를 분풀이 상대로 삼는다. 환자의 분노를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반면, “적절한 존중과 이해를 받고, 관심과 시간을 누린 환자들은 곧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분풀이를 멈춘다.”(p. 87) 분노에 대한 공감만이 수치심과 죄책감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p. 290)3단계인 협상의 내용은 간략하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신다면, 이러저러하게 잘 살겠습니다.” 앞의 것이 내 운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라면, 이것은 내 운명의 주관자요 주인인 그분과의 협상이다. 이것은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p. 138) 그럼 왜 이런 협상을 할까? 바로 죄책감이다. “죄책감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동반자다.”(p. 262) 잘 살아내지 못했다는 때늦은 후회 말이다. 그런다고 해서 변한 것이, 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환자들은 우울감에 빠진다. 죽음이란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지 않은가. 가족과 친구들은 한 사람을 잃지만, 그는 모든 사람과 작별해야 한다. 엄청난 병원비뿐만 아니라 간병하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치면서 상실감에 젖어 든다. 이는 그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이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등의 용기를 주는 말은 쓸데없다. 한편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극도로 우울해하던 환자들이 자신들의 심각한 상태에 관해 속내를 털어놓고 난 뒤 서서히 달라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p. 232) 다른 한편으로 차라리 “말보다는 그저 손을 잡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조용히 함께 있어 주는 것과 같은 작은 표현들이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p. 145)최종적으로는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 엘리자베스는 “이 수용의 단계가 행복한 상태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p. 185)고 주의를 준다. 격렬한 저항과 몸부림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긴 여행을 끝내고 편안히 쉬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감정의 공백기’라고 표현한다. 라인홀드 니버(Niebuhr Reinhold)의 유명한 기도문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가 필요한 때다. 이 모든 단계는 하박국과 닮아 있다. 나는 나의 책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의 1부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남유다 말기의 예언자는 의로운 자가 고통받고, 악한 자가 형통한 당시의 사회의 모순을 하나님 면전에서 따진다. 부정과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성질을 다 부린 그는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과 협상의 과정을 거치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나라를 위한 깊은 애도와 슬픔의 기도를 드린다.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그 뜻이 선함을 믿고 수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드린다. 4. 죽어갈 자의 어느 날 일기아래 내용은 2009년 11월 5일(木)의 독서일기인데, 내 내면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나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서울역 대합실 2층 카페 한구석에서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리며 글을 쓰던 나를 말이다. 이 책이 주는 감동과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왠지 서러웠고, 죽는다는 것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진실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을 읽고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KTX 안에서, 가평 필그림하우스로 가는 경춘선 열차에서, 기윤실 사회적 책임 컨퍼런스에 참여한 2박 3일 동안 잠시 짬 나는 시간에, IVF 경인 지방회 세계관 학교에 강의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 하룻밤 신세 진 이진오 전도사 집에서, 뉴스앤조이 김종희 대표를 만나기 전 비는 시간에 사람 만날 스케줄 잡지 않고 서울역 파스쿠찌에서 죽치고 앉아 읽는다.죽음은 인간에게 공포요 불안 그 자체다. 최대의 적이다. 성서는 죽음을 원수라 했다. 원수 중에 가장 큰 원수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달라도 정말 달라졌을 것이다. 종교도 없다.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종교의 모양과 특성도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게 있다면, “죽음과 죽어감, 그리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p. 14) 그것이 종교인 한에 있어서, 종교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죽음과 함께 종교도 탄생하고,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때로 장렬한 영웅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개 추레하고 비루하다. 비참하다. 퀴블로 로스는 죽음을 통해 인간이 품위 있게 죽어야 하며,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할수록 삶이 충만하다는 것을 시한부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밝혀낸다. 그뿐만 아니라 환자들이 죽음에 맞닥뜨린 순간에 가지는 ‘부정’에서 ‘수용’하는 데까지 이르는 5단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뜬금없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게 죽음은 여전히 아버지와 다른 말이 아니다. 같은 말이다. 그분이 일찍 운명하심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이 말 못 할 고생을 했고, 내게 큰 상실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늘 다짐하곤 한다, 지금도. “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죽을 수 없다, 절대로!”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에서 부모에게 주어진 정언 명령이요 지상 사명이다. 인간이 신에게 직접 범하는 죄를 제외하고 가장 난폭한 범죄행위다. 부모가 없는 것보다 나쁜 부모가 더 낫다. 살아있으라!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아버지가 돌아가실 적,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정확하게 지금 희림이가 그렇다. 15살이다. 그때 나는 그분의 죽음과 죽음이 남긴 가혹한 시련으로 아파했다면, 지금 아들은 학교 공부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나는 전도서 1장 2절을 묵상하며 허망한 인생사를 복기하곤 했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아들은 내가 인생의 허무함과 상실감에 빠져있었던 나이에 절망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 아비 부재의 시대를 살던 나와 달리 아들은 희망 부재의 연대를 살아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없었고, 아들은 꿈이 없다. 아들아, 미안하다. 아버지, 왜 그리 급하셨어요?그분은 죽음의 5단계 중 어디에 이르렀을까?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 나이가 되어서도 그분의 마음을 짚어내지 못하는 바보구나 싶어 울적하다. 미루어 짐작건대 아버지는 타향에서 죽도록 일하시다 그렇게 죽어버렸으니, 게다가 많은 경제적 빚을 두고 가셨으니 당신의 병과 죽음을 인정하기까지 힘겨웠을 것이고,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꼬박 2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셨던 분이고, 어머니와 형, 친척들과 주변분들 말씀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신망 높은 지역 유지였으니 부정과 분노의 단계는 넘어섰지 않았을까 싶다. 협상과 우울, 수용 그 어디쯤일 텐데, 그분이 마지막 말씀을 남기지 않았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걸음으로 황망히 가셨다.지금 아버지가 겪었을 죽음의 5단계 중 어디인가를 추정하고 추적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나는 어떤 단계에 있는가.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나는 아버지를 보내지 못했다. 그분은 죽었지만 떠나지 못했고, 그분을 묻었지만 나는 아직 거적때기로 덮어두고 있을 뿐이다. 수용은커녕 부정과 분노 속에서 협상의 단계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 죽음이나 암과 같은 단어를 들어도 달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p. 424)고 말한다. 그 말에 의하면 아, 나는 아직도 순례자가 아니라 도망자다.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의 권세와 위력을 상실했다는 희망이다. 죽음은 여전히 강력한 적으로 남아있고,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굴복하거나 함몰하지 않는다. 하여,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도 나는 두렵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나는 불안하다. 내가 아버지 운명하시던 그 나이 어간이 되어간다는 것이. 그러니 나는 아직 예수와 죽지 않았고, 죽은 적이 없으니 살아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하고 있다.아버지가 남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음에 관한 말은 곧 삶에 관한 말이다. “30년 이상 죽음을 연구해온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악착같이 살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닌 삶다운 삶, 죽음을 품위 있게 받아들임으로 품격이 있는 삶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죽음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을까?첫째는 나와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감사할 것. 더 말할 것이 없다. 둘째, 더 나아가 무언가를 남기며 사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고,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고, 자신들의 불멸성을 증명하고 싶어”(p. 412) 한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남기고, 내가 읽었고, 생각했고, 말하고 싶어 했던 것, 바로 그것을 글로 남길 것. 이번 독서로 예기치 못한 전리품을 얻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아, 버, 지, 당, 신, 이, 그, 리, 워, 요! 5. 잘 살다 죽고자 하는 자어느 부활절에 나는 폭탄과도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있다.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는 목사의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정수요 근본인 부활을 믿기 어려워한다니, 그것도 성도도 아닌 목사가 말이다. 대경실색할 노릇이다.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서 어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목사이겠는가.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던 터라, 누구보다도 부활을 소망한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으며,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낸단 말인가. 고통과 죽음에 의미가 있고,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온전한 삶이란 없지 않은가. 믿지만,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앞에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뼈가 썩는 듯 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박국처럼(합 3:16).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부활을 절실히 소망할까? 그런 내게 저자의 말은 내 폐부를 찌른다. “종교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앙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며, 무신론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p. 418) 신앙이야말로 죽음을 소망 중에 맞이하게 한다. 바로 그것이 죽음을 살아가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이유이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쉰다는 것-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읽고 -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그건 불순종이예요아끼던 후배 목사가 공황장애를 앓았다. 교회는 1년간 안식년을 허락해 주었고, 시간을 보내면서 부산에 온 김에 나에게 들렀다. 내가 쓴 『내 안의 야곱 DNA』를 읽고 꼭 보고 싶었단다. 그의 어려움은 단지 육체적이거나 심리적 스트레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로 깊은 성찰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교회다운 교회,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에 관한 원초적 물음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처음에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들었을 때는 울었다. 이게 비단 그만의 일이겠는가. 담임목회자로서 지고 가야 할 숙명,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다가 그는 내 삶을 뒤흔들만한 강펀치를 날렸다. 약간의 일중독이 있는 내게,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내게 날린 그의 한 마디는 얼얼하다 못해 아팠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불순종이더라고요. 안식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십계명을 어긴 거니까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니, 의식을 잃었다고 해야 맞을 거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부지런히 사역하는 것이 불순종이라고? 그것이 안식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 바로 십계명을 위반한 것이라고?” 나는 소심하게 저항했지만, 곧바로 진압 당했다. 안식 없이 노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창조 질서에 순응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불충한 것이지 충성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충성된 일꾼으로 일하고 섬겼거늘, 자부했거늘, 그것이 불순종이었다니! 그와 헤어진 다음,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책 두 권을 끄집어내었다. 하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동네)이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에서 각광받는 그야말로 스타철학자이다. 길고 긴, 그래서 머리와 꼬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난해한 독일어 문장이 아닌 군더더기 하나 없이, 기름기가 전혀 없는 단문으로 툭툭 치고 가는 문장과 기존의 사유를 뒤집는 전복적 세계관이 독일에서 먼저 인정받고 한국에 상륙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정신적 질병은 ‘우울증’이다. 이전의 사회가 ‘무엇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지배했다면, 지금은 ‘나는 할 수 있다’는 무한한 자기 긍정이 통치하는 사회이다. 허나, 인간이란 존재는 제약적이기도 하다. 무한한 자기 긍정은 자기 스스로 설정한 과제와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자아는 피로하고, 우울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외부의 강요가 아닌 자기 스스로 닦달한다지만, 직장인들에게 물어보라.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야근하고 공휴일 반납하고 일하는지. 현대사회는 은근히, 한국사회는 대놓고 부채질한다. 사자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가젤은 죽을 때까지 뛰고 또 뛰어야 한다. 아니 사자에게 먹혀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달리다가, 한도 없이 달려서 죽고 만다. 그럼에도 쉼 없이 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병철의 다음 책, 『시간의 향기』(문학동네)처럼 신학적으로 말하면 묵상하는 시간, 인문학적으로는 성찰하는 시간의 여유가 피로사회의 대안이다. 사람은 정녕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지만, 인간은 소위 멍 때리는 시간 속에서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은 줄이고, 쉼은 늘리는 것이 순종하는 길이리라. 2. 이런 사람이 썼다고요?그때 내가 다시 읽었던 것은 『게으를 권리』였다. 하루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를 즐길 권리를 옹호하는 이 책은 저자의 특이한 경력 때문에 시선을 더 받게 되고, 이 책이 출간되던 시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독자들은 여기서 잠깐 멈칫했을 것이다. 3시간, 3시간이라고? 겨우 그 정도 일하고 나머지는 놀자고? 그렇다. 이 미친 주장이 우리를 미치게 행복하도록 이끄는, 그리하여 창조의 원리이자 십계명의 안식을 누리게 하는 하나의 길일 수 있다. 그의 주장만 경악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 사람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세 딸 중 둘째인 ‘라우라’의 남편이다. 그랬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을 일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 저술이 『자본이라는 종교』(새물결)이다. 장인이 자본주의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사위는 종교로 파악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종교임을 역설하기 위해 그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조를 슬쩍 패러디해서 신을 숭배하듯 자본을 숭앙하는 자본주의를 비꼬고 조롱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의 사위일 뿐, 마르크스가 아니다. 즉, 마르크스와 별개의 인격체이고 사상가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라파르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는 그의 가계도이다. 그는 쿠바에서 184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계, 어머니는 프랑스계 유대인이다. 조부모는 자메이카 출신의 인디오와 아이티 출신으로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이다. 그러니까 그는 특정한 순수 혈통과 민족의 적통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성격은 상당히 낙관적이고 활동적이다. 그것이 지나쳐서 충동적,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마르크스는 라파르그의 미숙함과 과격함을 걱정하면서도 종종 놀리곤 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념적으로 쾌락을 긍정했으며, 오직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만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즐거울 수 없다고 보고, 여전히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유서를 남기고 서둘러 이 땅을 떠나갔다. 3.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하루에 세 시간이라…, 주 40시간 노동을 외치지만 현실은 그마저도 이상적이라는 비웃음을 사기 일쑤다. 세계경제 10위권인 나라에서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조차 무리라며 난색을 표하는 21세기이다. 이런 마당에 1883년,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의 한 감옥에서 이 글이 쓰였다는 점이 신기하고 신비로울 지경이다. 이 주장이 그리 낭만적 현실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당대의 노동현실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라파르그가 활동하던 프랑스만 해도 노동자들은 매일 14시간 또는 16시간을 꼬박 일했다. 물론, 거기에는 점심 식사와 약간의 휴식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빼면 최소 12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기계의 노예가 되어, 기계처럼 일을 해야 했다. 때문에 그 시대의 박애주의자들은 노동시간을 14시간에서 12시간으로 줄일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이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단번에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6-7세 아이들이 방적 공장에서 14시간 혹은 16시간씩 노동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또한 그런 공장 내의 근무환경이나 식사의 질 또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인구 사망률이 높았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 때문이었음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저자가 제시한 또 하나의 예는 노동자들과 죄수, 노예들의 노동시간 비교였다.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의 경우 하루에 10시간을 일하고, 서인도 제도의 노예들은 프랑스 노동자 보다 훨씬 적은 9시간을 일했다. 그에 비해 1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는 기계나 노예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했다. 더 이상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문학의 목적이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가꾸는 것이고, 인간 자신의 행위를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여 되돌아봄이라고 한다면, 과연 노동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자체로도 인간의 비인간화가 심각하거늘, 삶의 질이야 말해 무엇 하리. 비단옷을 생산하는 노동자는 몸단장은커녕 제 몸에 걸칠 변변찮은 무명옷 하나도 없었다. 뼈 빠지도록 노동해서 생산해도, 제 자신이 소비하고 즐길 돈이나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만큼 일했으면 최소한 삶의 안정과 물질적 기반을 확보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실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란한 가족을 죄다 일터로 내몰고 노동력을 비틀어대니 가정은 파탄 직전이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이 책의 백미다.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51쪽) 이는 다른 여타의 해방 선언보다 더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다. ‘인권 선언’이나 ‘노동할 권리’(83쪽) 이상으로 이것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기초적인 주장이다. 이쯤 되면 반문이 터져 나올 것이다. 저 정도 일하는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겠는지를. 라파르그는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가 보기에 영국이 당시 세계 경제 1위를 달리던 이유는 장시간 노동을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루 10시간 이하로 제한한 점이 제일의 산업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2시간 노동 시간을 단축한 결과 영국의 생산성은 무려 1/3이나 증가했다. 영어판 역자는 각주에서 미국의 경우를 또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미국이 영국을 앞선 것은 영국 보다 훨씬 적은 노동 시간 때문이라는 것이다(71쪽). 그래서 그는 반문한다. “하루 노동 시간을 3시간으로 제한하면 얼마만큼의 숨 막힐 듯한 속도로 프랑스의 생산이 증가하겠는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쉼 있는 노동이다. 노동이 있는 쉼이라고 해도 되겠다. 안식일이 나머지 6일의 삶을 존재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듯이, 여가와 한가로움이 노동과 활동의 근거이다. 그럼에도 그런 삶을 가로막는 장애는 무엇일까?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되는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만큼이나 이 책의 첫 문장도 강렬하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그 환몽이란 다름 아닌 노동을 성스러운 것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경건하게 맹세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여타의 생명체 혹은 존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노동한다는 것이고, 노동의 가치만큼 인간은 그 값어치를 지닌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한병철의 주장처럼, 외부의 누구나 무엇이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의 고혈을 짜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일조한 것은 우리 개신교다. 18세기 사회학의 최고 저술이자 앞으로 수 세기 동안 고전의 반열에서 벗어나지 않을 불후의 명작인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그것이다. 칼뱅(Jean Calvin)으로 대표되는 개신교의 금욕과 근면 정신은 근대의 경제 이데올로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종교가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작게나마 일조했고, 역으로 자본주의적 발전 양식을 따라서 종교도 확장되었다. 둘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 않고 복합미묘한 것이라서 정면으로 다투지 않겠지만, 어찌되었건 베버에 따르면 근대 개신교회가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라파르그는 창세기와 산상수훈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은 노동이 아니라 안식이라고 역설한다(27-33쪽). 노동은 타락한 인간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었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친히 먹이고 입히는 것을 믿으라고 명령했다. 인간은 신의 저주를 축복으로 변질시켰고, 종교는 신의 이름을 빌어다가 정당화했다. 그러나 종교가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공휴일을 줄여달라는 프랑스 왕의 요청에 대해 교회가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중세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일, 52일의 일요일과 38일의 공휴일을 보장했다.”(55쪽 각주 11번) 저 날짜를 합산하면, 무려 거의 1년의 절반은 쉰 것이다. 총 180일이니까 1년 365일에서 2-3일 모자라는 절반이다. 하루 일하고 하루를 쉰 것이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에서 보듯이 탐욕이 만악의 근원이기에 노동을 통한 수입 증대는 탐심이고, 그것은 필히 다른 누군가의 삶을 해치는 것이 되고 만다. 게다가 하나님의 창조는 노동이 아니라 안식이 목적이었다. 나는 청중들에게 종종 묻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며칠 동안 창조하셨나요? 대개 6일이예요, 라는 답은 듣는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라. 7일 창조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7일째 쉬었는데 어떻게 7일이냐고? 그렇다. 쉬었던 그 7일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하루이다. 우리로 하여금 패닉으로 몰고 갈 내용이 저 창조 이야기에 담겨 있다. 첫날부터 6일까지는 해가 지고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라는 구절이 반드시 있다(창 1:5, 8, 13, 19, 23, 31). 그런데 7일째는 없다(2:1-4).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의 열정과 열심으로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얻고, 찾고 열린다고 했어도 7일이 지나고 8일이 되었다거나, 다시 첫째 날이 돌아왔다는 일언반구도 읽을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창조한 그날부터 지금까지는 7일인 거다. 다음 날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나 모세가 그 말을 기록하지 않은 이상, 지금은 아직도 창조시의 그 일곱째 날이다.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우리 모두가 안식을 누려야 할 날인 것이다.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창조의 정점이자 절정은 모든 피조물의 안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은 노동하는 인간 이전에 놀이하는 인간, 안식하는 인간이었다. 이것이 성경이 바라 본 창조 질서이자 법칙이고, 성경적 인간관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의 어느 민족이나 시대에서도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처럼 노동을 신성시 한 적은 없다(85쪽 이하).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이다. 이들은 모든 노동을 노예에게 맡겼다. 자유 시민들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심지어 자신들의 기품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만으로 노예가 아닌 여인들이 실을 짜고 바느질을 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을 정도니까. 저들과 달리 노예 출신의 히브리인들은 모든 사람이 노동하고 모든 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사회를 설계했다. 창조주 하나님도 6일 동안 노동하셨으므로 그 어떤 인간도, 그가 왕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노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노동을 했고, 피조물의 본질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기에 그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처럼 노동하고, 하나님처럼 안식하고. 이것이 히브리적 세계관과 그리스 로마적 세계관의 결정적 차이다. 4. 이제 와서 쉬라노동이 종교(the religion of work, 36)라는 라파르그의 글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고 떠들썩하던, 약 스무 해 전의 한 대화를 떠올려주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한 달 가량 풀러신학교를 방문했고, LA 근교의 어느 집에서 생활했다. 학교 앞 한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그러나 어색한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가. 둘러봐도 한국 사람은 없다. 내 맞은 편 끝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미국인들이 크게 웃고 있다. 책상을 치면서 ‘빨리 빨리’를 연발하면서. 홈스테이를 하던 집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60대 초반의 대학 선배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2년 만에 완공해야 할 건축물을 1년 만에 완성했다고 자랑합니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 2년이 걸리는 일은 2년 동안 일해야 하지요. 한두 달 앞당길 수는 있어도 절반을 단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된 거지요.” 그건 라파르그의 말이다.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69쪽) 빨리빨리 병은 한국 사람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노동을 종교로 섬기는 사회가 그 어디나 기계처럼 일하도록 인간을 닦달하는 곳이라면 찰리 채플린의 영화 의 한 장면처럼 식사를 하면서도 노동하는 기계를 고안하고, 화장실에서 잠시 쉬는 것도 감시하며 일하라, 쉬지 말고 일하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우리는 라파르그의 주장처럼 하루 3시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를 강요당하게 될지 모르겠다. ‘노동은 금지되고 여가는 강제되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이다. AI시대 말이다. 인공 지능과 기계화에 의해 갈수록 사람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비율이 높아만 간다. 노동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쉬고 싶지 않아도 쉬어야 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그런 시대를 예감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여전히 노동을 숭배하고 인간을 노예화하는 사람들은 “기계가 바로 인류의 구원자로, 천박한 일과 돈 때문에 하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자유를 마련해 줄 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92쪽) 그가 말한 기계가 지금으로는 인공지능이라 하겠다. 사람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대체하고 어쩌면 인간은 노동 현장에서 기계에 의해 쫓겨날 판이다. 그것이 라파르그가 예상한 대로 인간 해방이 될지, 여전히 종속과 가난의 시대가 될지는 우둔한 나로서는 예단하지 못하겠다. 섣부른 환상은 희망 고문이 아니던가. 아직까지 목회자들은 3시간 노동으로 생활할만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 목사요 저자인 나도 다르지 않다. 글만 써서 밥 먹고 살기 어렵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허나, 나는 단 하나의 일에 오롯이 3시간의 노동을 하려 한다. 다름 아닌 성경 묵상이다. 나는 월간 묵상집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한다. 얼마 전부터 성경 읽고 글을 쓰는데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바치고 있다. 다른 저술 작업에 지장을 초래하고,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 H.D 소로의 『시민 불복종』 (사과나무)을 읽고 -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왜 그랬을까?80년대의 나는 그랬다. 몸은 백면서생이면서도 입은 열혈투사였다. 학생운동의 전면에 서지 않았고 핵심에 끼어든 적도 없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곁불을 쬐지도 않았다. 반면, 입은 진보의 첨단을 달렸다. 말로야 무슨 말을 못하겠냐마는 운동권 용어가 툭툭 튀어나왔다. 민주주의, 자유, 통일, 혁명이니 하는. 지금 생각하면 그리 위험할 것도 없는 그런 말이 20대의 나에게는 어마무시하게 휘황찬란했다. 그게 언제인지, 왜 모였는지조차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모임에서 나는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어느 유명 강사의 강연이 끝난 다음, 삼삼오오 모여서 조별 토론을 벌였다. 나는 조장을 맡았다. 강연 주제는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토론이 아니었다. 30여분 남짓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나 혼자 떠들었으니까. 내가 그 부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으며 고민하고 있는지 자랑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허세작렬이었다. 그날 나는 로마서 13장은 정당한 권세에 관한 것이고 정당한 권력에 정당한 복종을 말한다면,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부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끼니는 걸러도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QT)을 한 번도 빼먹지 않는 신앙 훈련에 특심한 제자이면서도 어설프게나마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해방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던 때라, 어디선가 읽었던 것을 내 생각인 양 떠들어댔을 것이다. 속으로, ‘와, 내가 이렇게 말을 잘 하다니’ 내심 감탄하면서 말이다. 둘러앉은 처음 본 학우들은 그냥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런 일들이 어디 한 두 번이겠냐 마는 유독 그날, 그때, 그 일은 잊히지 않는다. 시쳇말로 쪽팔리는 일일 텐데 사진첩에 오래 둔 흑백사진마냥 이따금 생각난다. 중년이 되어 읽게 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시민 불복종』 때문일까? 불의한 권력에 대한 투쟁과 저항을 외치던 새파란 20대가 조금은 소극적이고 한 발 물러선 듯한 불복종으로의 전환이 씁쓸했던 걸까? 2. 왜 썼을까?이 책은 자신의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의 한 문화회관에서의 강연 원고에서 시작되었다(앤드류 커크(Andrew Kirk)의 『세계를 뒤흔든 시민불복종』(그린비) 참조). 당시 미국은 정치, 문학은 물론이고 과학과 예술 분야에 이르는 주제로 강사를 초청하는 순회강연회가 매주 열렸다. 그것이 계몽이자 쏠쏠한 유흥이자 재밋거리였다. 매사추세츠 주만 해도 문화회관이 137군데라고 하니 강연회 인기가 폭발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본디 제목은 지금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딱 한 번 발간되고 곧 바로 폐간된 지에 발표될 때의 제목은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었다. 강연을 한 해는 1848년, 잡지에 실린 것은 이듬해인 1849년이었다. 그가 1862년 폐결핵으로 사망한 다음, 책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그해가 1866년이었다. 소로 사후에 그가 남긴 글을 편집하던 벗들과 편집자들이 제목을 바꾸었다. 남북전쟁이 1861년에 시작해서 65년에 끝났으니, 그때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제목을 바꾼 것이다.강연은 감옥에 갇혔던 경험에서 시작한다. 비록 하룻밤이기는 했지만, 그는 왜 옥에 갇혔던가? 주 정부에 인두세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는 인두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조세 저항이 아니었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거부했던 이유는 매사추세츠 주가 도망 노예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에 대한 항의 차원이었다. 본래 연방법에 의하면 탈주 노예는 노예주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격렬한 항의가 있었고, 결국 주 관리는 도망 노예를 반환하는 일에 협력해서 안 된다는 법이 통과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가 1843년이었다.그리고 1846년에서 48년까지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이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 연방인 텍사스를 미국이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패전한 멕시코는 텍사스만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단돈 1,500만 달러에 미국에 넘겨야 했다. 소로는 이 전쟁이 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내는 세금이 그 전쟁과 그 전쟁을 수행하는 불의한 정부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멕시코와의 전쟁이 일어나자 항의하는 논설을 신문에 실었고, 세금징수원인 친구에게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불가피하게 친구는 그를 가두었으나 누군가 그를 대신해서 인두세를 납부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어찌 보면 가벼운 해프닝이었는데도 여기서 그는 시민의 양심과 국가와 정부라는 제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 산물이 바로 이 책이다. 3. 뭐라고 했지?나는 편집자들이 제목을 저항에서 불복종으로 바꾼 것이 나름 일리 있다고 본다. 소로는 불의한 정부와 법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시민운동가들처럼 대중을 선동하고 조직하여 시위를 주도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는다. 그는 인두세 거부 운동을 벌인 적도 없고, 전쟁에 반대하는 데모를 주도하지 않았다. 강연하고, 글은 썼어도, 개인적 차원이었고, 소극적으로 저항했을 따름이다.정부를 근원적으로 부정한 것도 아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유명한 문구,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말이 이 책의 첫 문장이다. 그는 정부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각 개인의 양심에 위배되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의 진정한 속내는 건국 아버지들이 주창한 대로의 정부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지금보다 나은 그리고 지금 당장 건국 이상을 따르는 ‘보다 나은 정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p. 20)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불의한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p. 36) 저 물음을 미세하게 구분하자면 세 개이고,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불의한 법을 지킬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소로의 생각은 정의를 행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정의를 따라 행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정의를 행할 수 없다. 또한 모든 불의와 싸우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을 의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p. 33)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따라 자신의 방식대로 생활하는 것은 오롯이 그 자신의 선택이다. 그렇더라도 인간의 의무를 저버리고 타인의 삶을 고달프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현실주의가 아니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참지 못했다. 소로가 겨냥했던 사람은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인데, 그는 ‘정부가 사회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정부에 순종해야 하고, 혁명을 통해서 얻는 결과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큰 손실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시민으로서 정치적 행위를 할 때는 자신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소로의 정치 참여는 도덕과 정의라는 기준을 따르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을 딱 질색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의 편리나 다수의 공리가 아니라 오로지 정의롭게 사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국민으로 태어나기 전에 인간으로 이 땅에 온 것이고, 따라서 국민으로서 요구받는 것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헌데, 이런 소극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저항을 권위주의적 정부는 참아내질 못한다. 그의 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바로 감옥이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p. 41) 이 말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강변하는 소로의 깐깐함도 느껴지고, 그다지 전국적 지명도도 없는 인사의 비판을 감옥으로 대답하는 정부의 폭력성에 대한 날선 비판도 느껴진다. 참,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소로의 정신적 멘토였던 랄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감옥에 있는 소로를 찾아가서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자네는 왜 여기 있나?” 소로도 지지 않고 거칠게 응수했다. “선생님은 왜 여기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소로가 교도소에 갇힌 것은 이때뿐이었고, 하룻밤이었기 때문이다. 에머슨이 알 턱도 없고, 알았다 한들 찾아오기에는 늦었을 테니까. 아무튼, 소로의 고집불통이랄까, 강인하달까, 그의 일면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소로의 행위의 밑바닥에는 인간은 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흐른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p. 50-51) 이는 근대인들의 사유방식이다. 근대의 탄생은 개인의 발견이다. 개인은 신으로 대표되는 권위나 외부의 통제보다도 신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 그리고 집단에 반하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주체적인 행동을 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공동체 전체를 개인을 희생하자는 따위의 사고는 안중에도 없다. “사회라는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p. 51)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시민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p. 21) 신이라는 절대 권위도 거부한 마당에 신을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서서 한 개인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4. 어떻게 되었을까?이 저작은 당대에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월든』에 나타난 소박한 자연주의가 얼마간의 시선을 받은 것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이다. 거의 잊히다시피 한 이 작품을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읽었고, 소로 전기와 작품의 명맥이 이어졌다. 그것이 영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를 하던 한 인도인의 손에 들려졌다. 그는 인도의 오랜 전통과 불의한 국가와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강인한 정신과 유연한 전략을 배웠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또 한 사람이 있으니,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이다. 킹의 비폭력은 산상수훈에서 받은 영감이 컸지만, 소로의 영향도 작지 않다. 그는 자신의 연설과 글에서 종종 소로를 인용했다. 흑인을 차별하는 미국 정부를 향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을 실현할 것을 촉구했고, 백인들에게는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불의한 문화와 체제의 일부가 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흑인을 향해서는 그 악한 법률에 결코 복종하지 말자고 외쳤다. 소로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그 목소리는 한국 사회에서도 크게 들린다. 거슬러 올라가면 4·19로부터 시작해서 7·80년대의 민주운동, 그리고 90년대를 거쳐 현재 진행 중인 다양한 시민참여는 대개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의 틀로 얼추 묶을 수 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참여가 예전보다 훨씬 확대된 지금은 시민불복종의 정신과 원리에 기반을 둔 실천이 더 없이 중요하다. 학계에서 정리된 바에 따르면, 시민불복종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공개성, 공공성, 의도성, 비폭력성, 위법성, 불가피성의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오현철, 『시민불족종』, 책세상. p. 41) 물론, 저 개별적인 요건에 대한 해석과 찬반 논쟁도 계속 될 것이다. 공적 이익을 위해 적법한 절차를 통한 최선의 노력이 한계에 부닥칠 때, 법적 처벌을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고서라도 의도적으로 정부의 정책이나 법률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비폭력적 방식의 운동이라는 큰 틀은 바뀌지 않으리라 본다. 5.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시민불복종은 기독교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일 수 있을까? 이것은 정부와 정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부합한 걸까? 우리는 성경에서 정책과 법률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감지한다. 한편으로 국가에 복종하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롬 13:1)과 “사회의 기본적인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벧전 2:13)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듣는다. 기독교를 혁명의 종교로 보는 해방신학이 있지만, 성경 전편을 살펴보면 기성세력에 대한 혁명적 전복을 주장하거나 실천한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현존하는 시스템의 용도 폐기보다는 용도 변경에 가깝다. 예수도, 바울도, 초대교회도 체제 부정을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그런데도 성경에는 불복종의 사례가 의외로 많다. 가장 최초의 사례는 히브리 산파들일 것이다. 그녀들은 태어난 남아를 모두 죽이라는 지엄한 국가 최고 권력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분노한 바로가 질책을 하자,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고한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과 달라서 산파인 저희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습니다.” (출 1:19, 새번역성경) 아마도 불복종 사례가 가장 많은 구약 정경은 다니엘서일 것이다. 왕이 특별히 하사한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것은 합법적인 틀 내에서 아주 미약하나마 불복종이라 하겠다(1장). 세 친구들은 금 신상 숭배를 거부하고 수천 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내던져졌다(3장). 다른 신에게 기도하라는 왕의 교서를 거부한 대가로 표적이 되어 결국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6장)의 행위는 불복종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신약의 대표적 사례는 베드로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구주임을 강력히 선포했다. 예수를 죽인 자들에게 그 메시지는 불온했고, 말을 그치게 했다. 베드로는 결연하다. 그 무엇으로도, 그것이 국가이든, 정부이든, 하나님에 앞서지 못하고, 하나님을 막지 못하기에 자신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정부와 의회에 대한 불복종으로 나타난다. 산파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공통 특징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권력에 대한 불복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복종하기에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또한 “자유롭기에 불복종하고, 불복종할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의 말 또한 옳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정치적 사안이 아닌 종교적 영역에서 불복종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도전이 아닌 다음에는, 그들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박살낸 민족의 원수인 느부갓네살 체제의 관료로 충성을 바쳤지만, 신상에 절하라는 신앙의 영역에서는 단호하게 저항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 하나님 노릇하려고 하면, 목숨을 걸었다. 감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돌에 맞아도, 톱질을 당해도, 칼에 찔려도, 불가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대에 막 소년티를 벗고 혁명을 운운했던 청년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어떤 침해도 없다면 그 정부와 정책에 순종할 용의가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면, 산파들처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베드로와 사도들처럼 불복종을 감행하자는 다소 온건한 쪽으로 관점의 이동과 변화가 있었다. 그런 나는 보수 기독교가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사회 참여의 원칙으로 삼았으면 한다. 근본적으로 정부와 정권을 악마화하거나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찬성과 반대가 가능한 방식이 시민불복종일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것이, 무서운 것이 없는 우리 성도들은 절대 권력의 부당한 정책과 법률에 저항하는 절대 내공을 갖고 있다. 불복종의 수칙들, 공공성, 불가피성, 비폭력성을 숙지하고 정치에 참여한다면, 바로와 느부갓네살에게 불복종했던 성경 사람들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우리 사회에서도 지금보다는 더 기독교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라 믿는다. 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 칼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나의 스무 살대학에 갓 입학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두 가지이었다. 연애와 데모. 어촌 구석에서 자랐던 나는 대학에 가면 ‘미팅’을 꼭 하고 싶었다. 당시는 청바지에 통기타를 멘 채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넘기며 술 한잔하는 것을 낭만으로 여기던 때였다. 장계현이 노래했던 의 한 구절처럼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살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직접 해보고 싶었던 미팅과 달리 데모는 그저 구경만 하고 싶었다. 그들이 무섭고 나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캠퍼스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할 때면 그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왜 저렇게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가난한 대학생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고생하는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동시에 예수를 믿는 기독 청년이니, 하나님도 모르고 국가의 권위에 거역하는 운동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알게 된 80년 광주의 진실은 나를 뒤흔들었다. 불행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수록 슬픔은 깊어졌고, 정의감에 불타게 되었다. 농민과 도시 빈민, 그리고 노동자. 그들과 어머니의 얼굴이 포개졌다. 내가 읽었던 성경은 늘 말해 주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성경 어디를 펼쳐도 가난한 자, 가슴 아픈 자, 약한 자, 소외당하는 자를 사랑하라는 말이 없는 곳이 없으니 나의 일신을 위한답시고 그 고단한 현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나도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당시 운동권 친구들은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절반 가까이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거나 부모님이 독실한 신도라는 점이었다. 어려서부터 배운 기독교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사회의 불의를 참지 못하게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기독교 신앙이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불의에 편승하는 기득권의 종교가 되었기에 신앙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죽어도 떠날 수 없었고, 교회를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았다. 누구도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는 시골 교회에서 자란 내게 경건의 시간(Quiet Time)은 성경을 읽는 최고의 방법이자 통로였다. 하숙 생활이라 제때 식사하지 못하면 남들이 먹고 남긴 식어 빠진 음식을 먹어야 했다. 나는 영혼의 양식을 먹을까, 육체의 양식을 먹을까를 고민하긴 했지만, 확고히 신앙을 지켰다. 당시 나의 화두는 “‘복음의 진리와 역사의 진실’은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인가?”였다. 인류를 구원한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이 왜 이 땅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민중을 외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분단과 독재에 맞서 싸우면서도 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너무나 간단하게 무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 형들은 나에게 데모한다고 나무랐고, 운동권 친구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조롱했다. 둘 사이에서 나는 부초처럼 떠다녔다. 2. 아니, 마르크스라고?그런 내게 칼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넘지 않으면 안 될 산이었다. 운동권 친구들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하며 혁명의 대상이자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그 말을 절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외치셨던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마르크스의 저작 대부분을 읽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서, 종교에 관한 가장 비판적 사상가인 그에게서 종교의 희망과 근거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를 열심히 읽었다.그렇지만 기독교인들에게 마르크스의 이름은 불온하기 그지없다. 동과 서가 반대를 향하는 것처럼 적대적이다. 그런 마르크스를 읽자는 것이 과연 온당한 걸까?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로 종결된 마르크스를 재론하는 것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사울의 마지막 몸부림이 아닌가? 마르크스는 연기를 끝내고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았는가? 또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개되는 폭발적인 종교 현상은 마르크스의 종교소멸론을 무장해제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마르크스를 말한다는 것은 철 지난 옷을 꺼내 입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가? 절대적 교리체계로 자신을 고양했던 마르크스주의는 비신화화(非神話化)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일한 체계(the System)가 아니라 하나의(a System) 방법론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해야 한다. 많고 많은 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읽으면 된다. 3. 비판 서문이란?내가 마르크스의 종교 이해를 위해 꺼내든 글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으로, 스물다섯의 마르크스가 쓴 초기 저작이다. 저널리스트다운 현란한 언어와 문장의 남용도 엿보이지만, 위대한 사상가가 될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명문장이 가득한 짧은 글이다. A4 7장 남짓한 소품이다. 독일의 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정부를 향한 날 선 비판으로 명성을 얻은 동시에 정부로부터 감시와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그는 단 한 번 발행된 라는 잡지에 두 개의 글을 기고한다. 하나는 유대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서문이다.이글은 1843년 6월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발표는 1844년 봄에 이루어졌다. 이후 두 번을 수정하려 했으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 1883년 이후에는 묻히는가 싶더니 1922년에 재발견되어 1927년에 정식으로 출판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르크스는 종교에 관해 그리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유대인이었고, 기독교 국가에서 성장했기에 기독교의 언어를 은유로 종종 사용했지만, 체계적이고 일관된 글을 남긴 적은 없다. 아마 종교에 관해 가장 많은 말을 남긴 것이 이 ‘서문’일 것이다. 다른 저술에서도 드문드문 종교에 관해 말했지만,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마르스크의 종교관은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4. 종교는 민중의 아편인가?나는 미시적으로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저 한 구절에, 거시적으로는 저 말의 배경이 되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려 한다. 먼저 포이어바흐의 견해를 간략히 스케치해 보자. 포이어바흐는 오직 인간만이 무한자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자신의 본질과 무한성에 대한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그 무엇’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즉, 신의 본질에 대한 모든 규정은 실제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 본질의 왜곡된 반영이다. 종교를 통해 인류는 인간을 하늘에 투사하고, 인간의 속성을 신으로 간주함으로, 자신을 왜곡된 환상의 반영물인 신에게 종속시킨다. 종교는 소외된 의식의 표현이며, 전도된 세계관의 표상인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게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신에게 소비된 경배와 사랑은 마땅히 자신(인간)에게 돌려야 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피조된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며, 신의 본질의 비밀은 인간 본질의 비밀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관심사는 종교를 감각적인 것,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마르크스는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수용한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화들짝 놀라 자빠질 불경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는 종교 자체에 대한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상에 대한 것이다. “즉, 인간은 버겁기만 한 삶의 고단함을 종교적으로 풀어낸다는 말이다.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종교에 더 열정을 품게 되고, 바로 그 열정이 종교를 만들어낸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이해이다. 포이어바흐적인 인간은 역사적 과정과 사회관계로부터 고립된 존재이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사회적 제 관계(諸關係)의 총체이다. 무한에 대한 의식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 제한받는다. 신을 파괴하기만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환경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는 포이어바흐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관념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다른 하나는 종교를 만들어내는 것의 기초에 대해 이해를 달리한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출현을 인간됨의 본질에서 찾는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를 주조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가 아니라 빈곤과 사회적 억압으로 인한 피조물의 탄식 때문이다. 종교의 소멸은 의식의 혁명적 전환이 아니라 사회 혁명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환상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삶의 관계를 실천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자, 여기서 문제의 구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을 살펴보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한 단어, 한 구절만 따로 떼어내 보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고, 반드시 그 말씀이 자리한 맥락에서 보라고 말한다. 문맥이 해석의 왕이다. 이는 인문학에서도 동일하다. 저 말은 저 말이 있기 위한 앞뒤의 흐름이 있는데 별도의 콘텍스트에 집어넣으면 이상한 문장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의 말 전부를 인용해보려 한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현실의 반영이고 저항이라는 두 측면을 갖고 있다.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 보인다. 우리는 지치면 위로받을 곳, 위로해줄 이를 찾는다. 잠깐이나마 쉼을 누릴 수 있으며, 삶의 여유를 되찾고 다시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술과 마약에서 위로를 구하면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삶을 견뎌내고 헤쳐나가는 힘이 아니라 끝없는 도피처가 된다면, 그것은 아편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요는, 종교가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다. 비루하고 비참한 내 삶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종교의 중요한 기능이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 우리는 무정한 세계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쏟아낸다. 하늘의 음성인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리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예수께서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면서도 치유 사역에 그토록 에너지를 쏟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그는 목자 없는 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셨다. 동시에, 종교는 현실에 저항하는 동력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으로 저항의 모습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소극적인 저항과 적극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겠다. 교회는 노인이나 청소년, 빈곤층에게 도시락을 배달하거나, 장학금을 주고 교육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소극적이나마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북미의 흑인해방신학, 우리나라의 민중신학 등은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저항의 양상은 나라마다, 교단마다, 교회마다, 개인마다 다르다. 어떻게 달랐든지 간에 종교가 현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해석은 지나치게 종교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듣기 딱 좋다. 마르크스는 일평생 무신론자이었고, 그의 글에 종교를 언급할라치면 일관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 서문’에도 종교를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다. 아편이라는 말만큼 비판적인 말을 찾기 어렵지 않겠나. 그런데 아편(모르핀)이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한마디로 진통제이다. 의사가 하는 일의 절반은 통증 관리이고 완화라고 한다. 통증이 극에 달하면 그로 인해 다른 병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모르핀으로 통증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아주 소극적이기는 해도 치료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치료제보다는 통증 완화제로 기능한다. 어찌 되든 환자의 고통을 광범위한 의미에서 치료한다.나와 마찬가지로 비판 서문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을 논문으로 쓴 안상헌 교수에 따르면,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과 관련된 문장은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종교를 말한 것이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문구는 현실 저항과 연관된다. “마르크스의 글 전체 맥락에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순수 이론도, ‘적극적인 철학적 무신론’의 개진도 아니다.” 게다가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다. 종교를 추상이 아닌 구체적인 것 안에서, 이론적 접근이 아닌 실천의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 마르크스이다. 종교가 타락한 체제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신의 이름으로 악한 체제의 비판자가 될 공산도 크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종교가 현실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 그동안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덜어낸 것만 해도 나름대로 소득이 있다고 본다. “그가 비판한 것은 종교 자체보다는, 잘못된 종교를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5. 또 다시 나의 스무 해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동안 고민이 참 많았다. 아들은 ‘철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학부에서 부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했고, 가난한 형편에 복수 전공을 접었던 전력이 있던 나로서는, 그리고 기독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나로서는 당연히 환영했다.그때 나는 아들에게 철학을 공부하려면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주장이나 사상도 그것을 만들어 내는 물질적 토대를 간과하면 안 되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라는 말을 그리한 것이다. 니체를 전공하는 대학원생과 한참을 이야기한 다음, 나는 그에게 마르크스를 읽으라고 했었다. 똑같은 이유에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마르크스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그의 종교 비판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인 적은 없다.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르크스의 주변을 맴돌 뿐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마르크스가 본 종교가 종교의 전체가 아니라는 것, 종교는 사회적 차원이 있지만, 사회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인간적 차원을 넘어선 신비와 계시를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인간도, 종교도 사회적인 것으로 일괄 치환할 수 없는 신비가 살아있다. “마르크스의 비판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신앙이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고, 고통의 근원을 변혁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종교의 비판이 모든 비판의 전제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뒤집으면, 종교의 개혁은 모든 개혁의 전제이고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종교 곧 기독교를 버릴 수 없고, 사랑한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읽기 -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 교회) 1. 인문학이 위기라고요?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특히 대학교수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입생도 갈수록 줄고, 국가 지원도 대폭 삭감되는 상황이다 보니 이러다가 인문학이 고사하는 게 아니냐며 탄식한다. 반면, 대학 바깥에서는 인문학이 열풍이다. 스타급 대중 강연자들이 생겨날 정도니까 말이다. 최근 기사를 보니, 철학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래도 인문학이 위기인가? 이러한 연유로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라고도 한다. 인문학의 본령이 시대와 사람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이 위기는 우리 시대에 성찰할 것이 없거나, 성찰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현실과 상관없는 고담준론을 읊어대고 그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고 서구 이론에 맞게 우리 현실을 끼워 맞추기를 계속하는 한, 인문학은 소망이 없으리라. 기독교 내부에서는 인문학은 위험하다는 말이 나돈다. 아무 근거 없는 불안은 아니다. 신학과 견주어 보자. 신학이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인문학은 신학과 관련해서 가능한 두 가지 대답이 있다.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 없이도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충분하다’는 부류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신의 존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인문학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인문학의 라틴어(Humanitas)와 영어(Humanity)를 폼 나게 번역하면 인문주의이고,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인간다움이다. “즉, 인문학이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캐묻는 학문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인문(人文)이라는 단어는 천문(天文)의 상대어이다. 하늘의 별이 움직이는 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 천문이라면, 인문은 인간의 궤적과 흔적을 탐구한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을 문, 사, 철(文, 史, 哲)이라고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의 삶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사하는 학문이다. 하여간에, 인간이 인간을 묻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문학은 기독교의 적이라기보다는 동지에 가깝다. 칼뱅의 『기독교 강의』의 첫 문장처럼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신을 아는 것은 기독교 지식의 양축이다. “인간을 알지 못하면, 다시 말해 인문학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절반을 잃어버린 것과 진배없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에라스뮈스, 루터, 칼뱅, 츠빙글리,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들까지. 그들이 인문주의와 인문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인문학은 위기도 아니며, 우리에게 위험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이 인문학의 기회요 희망임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사회, 경제적으로 여유 있거나 최소한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망의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 링컨의 말을 살짝 바꾸어 말하면, ‘빈자의, 빈자에 의한, 빈자를 위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위기라면, 빈자가 배제된 채 부자와 강자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체제에 복무하는 인문학이 되었기 때문이고, 위험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을 위기나 위험이 아닌 ‘희망’이라는 키워드로 읽는다. 그렇다, 인문학은 희망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희망일까? 2. 노숙자가 인문학을 한다고요?“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168쪽) 이 책의 부제처럼 기적을 일군 희망의 인문학을 시작한 얼 쇼리스의 책, 『희망의 인문학』의 한 구절이다. 저것이 전 세계 수십 개국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인문학 운동을 촉발하고, 그들의 삶과 운명을 바꾼 한 문장이다. 그런데 저 말은 얼 쇼리스의 것이 아니다. 중범죄자를 수감하는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여성, 비니스 워커의 말이다. 19세부터 수감생활을 한 그녀는 가난으로 인해 사회 체제로부터 밀려났지만, 그 끝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기존과 다른 안목이 생겼다. 그녀는 가난한 자들에게 외부의 지원과 복지가 절실하지만,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얻기 전까지 가난으로부터 근본적인 독립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덧붙여, 그들 스스로 자립적이고 자율적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충격을 받은 얼 쇼리스는 노숙인을 모아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읽힌 책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책,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와 일리아드와 같은 고대의 대서사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 T. S. 엘리엇의 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등의 고전들을 주로 읽었다. 그리고 강사들은 그 분야의 최고로 인정받는 이들이고, 수준은 대학교 수업 정도이다. 놀라운, 그러나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읽어내더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고전을 읽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또한 그들의 삶까지 바뀌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니까 생각하게 되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생각 없이 살던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다.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나는 힘이 생긴다.” 인문학이 인간에게 스스로 성찰하는 능력을 키운다는 말이 거짓 없는 진실임을 강력하게 웅변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인문학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지 않다. 의외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인문학과 정치라? 이 둘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걸까? 인문학이 성찰하는 삶이라면, 그 성찰의 대상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관한 물음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정치랑 맞닿는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것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기인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대물림하며 가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얼 쇼리스는 가난한 자를 계속 가난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쇼리스는 ‘무력’(Forc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5장). 저 용어들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까다롭다. 무력의 본래 의미는 ‘강제력’이다. 무력은 강제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과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폭력이란 자신의 의지와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물리적 힘을 동원해서 타인에게 강제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제적인 무력이 반드시 물리적 힘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과 달리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들의 정신과 행동을 결정하고 규정한다는 점, 폭력은 일시적이지만 무력은 지속적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무섭고 파괴적이다. 가난한 자들은 무력에 포위되어 있다(94-96쪽). 신체적 굶주림에서부터 가난한 자를 근본적으로 멸시하는 타인의 시선, 가정폭력과 학대, 질병, 비열함과 성급함 등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난을 당연시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 불행한 것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무력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가난한 자는 또 다른 무력, 곧 폭력으로 자신의 삶을 더 옭아맨다. 대안은 인간다운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인간이 신체를 지니고 있는 한, 동물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최종적으로 동물과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87쪽). 동물과 같이 무조건 반사가 아닌 조건 반응을 할 수 있다. 누군가 내게 폭력을 가했을 때, 나도 폭력으로 맞대응할 수도 있고,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 행동으로 받아칠 수 있다. 인간은 “너, 왜 걔를 때렸니?”라고 물으면, “그놈이 날 때렸어요”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 대답 사이에 한 가지 빠진 말이 있다. 나는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를 폭력적으로 대응하기로 선택하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물론, 희망의 인문학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중도 실패율도 꽤 높고, 선동될 수도 있고, 머리와 입으로만 지식을 습득하기도 한다(365쪽). 기존 사회가 변화된, 변화는 그들을 여전히 편견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빈자들은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중심적 삶’을 직접 경험하고 실행해 볼 때, 가난과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 공감과 연민, 연대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3. 나의 희망의 인문학교 이야기미국의 권위 있는 유명 잡지 의 편집자인 얼 쇼리스에게 영감을 준 그녀는 인문학을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67쪽) 아이들이 정신적 삶의 가치를 깨닫고 학습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방식을 몸에 밴 하나의 습관으로 형성하게 되면,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얼 쇼리스가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운동을 하게 되었다면, 필자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 청소년들과 인문학을 시작했다. 대상은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 가족과 가정을 경험하게 하는 청소년회복센터(정식 명칭은 청소년회복지원시설) 아이들이다. 비행 청소년들의 아버지, 언제나 그 아이들만을 생각한다고 해서 ‘만사 소년’이라는 별명을 가진 천종호 판사와 협력하고, 후원자들의 지원을 힘입어 인문학 공부를 몇 년째 진행하고 있다. 그 이름은 ‘희망의 인문학.’ 나 역시 비행 청소년에 대한 선입견이 없지 않았다. 비행을 저지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고, 법질서를 위반한 아이들이지 않은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고,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상처를 들쑤시진 않을까, 그러면 나에게 괜한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모두 기우였다. 대부분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된 불쌍하고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이야, 진짜 재밌다.” 희망의 인문학 모임을 마치고 책과 필기도구를 들고 일어서는 한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처음이었던 거다. 해본 적이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다. 같은 책을 읽고, 각자 글을 쓰고, 당당하게 발표하고, 우레와 같은 뜨거운 박수를 받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인문학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통념은 그저 통념일 뿐이다. “내 고통이 100이라면, 30%는 씻겨 나갔어요.” 한 소녀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의붓오빠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고, 나중에는 새아빠에게도 성폭행과 폭력에 시달렸던 자신의 과거를 글로 썼다. 아이는 글을 쓰면서도 많이 울었고, 온몸을 맞은 듯이 아프고, 마음을 지탱할 수조차 없을 만큼 흔들렸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글을 써낸 다음, 그 아이가 내게 한 말이다. 인문학이, 글쓰기가 이 아이를 고통에서 구했다. “나도요, 나도요!” 영화 를 본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삶을 글로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주, 아이들이 써온 글을 읽고 나는 차마 울 수 없었다. 아니, 절대 울어서는 안 됐다. 방치와 폭력을 반복한 아빠, 결국 떠나버린 엄마로 인해 조부모와 살게 된 아이. 떠나간 엄마가 그립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각목으로 기절할 만큼 맞고 또 맞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글을 읽고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는데, ‘나도 저랬어요’, ‘나도요’, ‘나랑 비슷하네요’라는 말이 연신 터져 나온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라는 이중 신분이 된 아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몸살을 앓았다. “놀라운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꼭꼭 숨겨둔 부끄럽고 가슴 아린 이야기를 희망의 인문학 시간에는 글과 말로 솔직하게 발설한다는 것이다.” 바라고 바라기는, 이 아이들의 삶이 읽을 만한 글이 되고, 책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차곡차곡 글을 모아두고 있다. 언젠가 책으로 꼭 만들어 줄 테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살아지는 대로 막 사는 것이 아니라, 글 쓴 대로 살아내기를 소망한다. 본 것이 없는 아이들, 보고 싶지 않은 것만 본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다른 것, 새로운 것, 참된 것을 보여주고 싶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작가를 만나는 인문학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하고, 이전과 다른 세상을 살도록 하는 일이 희망의 인문학 운동이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고, 들어줄 이야기가 있는 아이들이 될 것이다. 4. 교회가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고요?교회가 인문학을 불온 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면, 인문학자들 중에는 교회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맹목적 순종을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양자 모두 기독교의 인문학적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얼 쇼리스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교회가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고, 인문학적 성찰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표적 기관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181쪽) 우리는 가난한 자를 그저 수혜와 구제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은 그들 스스로 도움을 받던 자리에서 도움을 주는 자리로 이동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물고기를 주면서 잡는 법도 함께 가르쳐줘야 하듯 말이다. 복음서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며, 그들이 그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경제적 필요만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세계에서 독립된 주체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복음적 사역이자 선교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경을 어디 인간이 쓴 인문학으로 폄하하느냐고 나무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답게 회복하는 최고의 대안이고 해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교는 대체로 사람들을 성찰하는 삶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 왔다.” (182쪽) 그런 점에서 나는 교회가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믿는다. 비록 현재의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벗어나 있고, 우리의 기대와 소망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여전히 교회는 희망이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어느 인문학 고전 못지않다. 실제로 성경을 읽고 변화된 무수한 증인 중 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교회라는 공동체적 배경 안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도록 하는 방식의 성경 공부를 진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인문학적 정신과 방법과 일치한다. 일반 고전만이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영성 고전을 읽게 하고, 모든 책의 기준이 되는 경전, 곧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 성경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습득하게 하는 것, 그 일을 교회가 할 때, 교회는 희망이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 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경건하다는 것 - 플라톤의 『에우튀프론』, 강성훈 옮김(이제이북스) -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1. 그는 경건한가?살인죄로 고발했다, 아버지를. 그것도 아들이 말이다. 실은 살인자가 죽는 것을 방치한 죄다. 그 살인자는 술에 취해 아버지의 노예를 그만 죽여 버렸다. 분노한 아버지는 살인자를 꽁꽁 묶어 포박하고 세찬 바람 부는 곳에 뒀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가 사제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답을 받기도 전에 살인자는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발당한 사건의 전말이다. 이야기는 갈수록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흘러간다. 아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롭다 못해 경건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신은 정의롭기에 불의한 일을 묵과하지 않는다. 그것을 방관하는 것 또한 신에 대한 불경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누구든 간에 사람이 죽도록 방치한 것은 정의로운 신에게 벌 받을 짓이다. 무릇 경건한 신자라면, 신에 대한 오만불손한 행동에 대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에 합당한 경배의 일환으로, 신에게 불경을 저지른 자는 설령 그가 제 몸을 낳아준 아버지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가족들도, 주변 친구와 친척들까지 나서서 나무라고 달래도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이 경건한 사람은 아버지를 친히 고소하기 위해 수도인 아테네로 올라왔다. 이게 웬일인가. 언제나 사람답게 살자면 생각해야 하고, 생각해야 자신을 알고, 참된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도 성찰의 대상에 올려놓고, 흔들어보고, 뒤집어보고, 다시 보는 일련의 사유를 통해 참으로 훌륭한 삶, 덕스러운 삶을 산다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 선생을 법정 뜰에서 만났다. 그러니 놀랄 수 밖에. 아버지를 불경죄로 고발하러 온 에우티퓌론, 새로운 신을 만들고 신을 믿지 않고,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는 고발을 받고 법정에 출두한 소크라테스. 그의 죄명 역시 불경죄이니 한 사람은 불경죄로 고발한 자, 다른 한 사람은 불경죄로 고발당한 자. 이들의 운명적 조우를 통해 과연 경건이 무엇인지를, 경건의 이름으로 아들이 아비를, 시민이 시민을 고발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따져본다. 과연 경건이 무엇일까? 에우튀프론은 경건한 사람인가? 2. 경건이란 무엇인가?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일일이 복기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말 번역본으로 고작 서른 쪽이다. 차라리 그걸 읽는 게 훨씬 낫다. 두 개의 번역본을 돌려가며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고 있다. ‘아니, 생사를 가르는 시점에 경건의 개념 정의를 놓고 한가하게 토론이나 벌이다니 한심하군. 역시 소크라테스답군.’ 경건의 실천을 중시하는 기독교 맥락에서는 대화가 난해하기보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나 피상적이고 추상적 토론으로 읽힌다. 경건에 대한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에우튀프론, 아버지를 살인자로 고발하는 것이 신에 대한 경건이라는 신앙적 열정의 소유자 에우튀프론은 어쩌면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 무리와 무엇이 다를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적대자와 마주한 것과 진배없고, 고소인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도 확보해야 한다. 경건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죽음이 멀지 않은 이 늙은 70대에게 독배를 먹이려 드는 건가?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고 싶고,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따져 묻는 것이다. 경건이란 본시 어거스틴이 시간에 대해 말한 것처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가도 그게 뭐냐고 정색하고 물으면 오리무중에 빠져든다. 그러니 경건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이 불경건하다고 비방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눅 23:34) 영적 무지와 오해가 예수를 죽이고도 어떤 죄책감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뻐기게 하지 않았던가.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 죽이는 일이 경건이다. 그들에게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에우튀프론의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경건이라고. 그것이 살인과 같은 크고 중한 죄에서부터 신성한 것들을 훔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저지른 자, 그가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상관없다. 그들을 고소하는 것이 경건이고, 고소하지 않는 것이 불경건이다. 이것이 에우튀프론의 논리이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평상시 지론을 따라 에우튀프론으로 대표되는 종교인들에게 신앙을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실제 그는 자신을 예언자로 소개한다. 자신의 예언으로 인해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견디지 못한다. 대중에 대해 인색과 시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일반 대중을 은근히 무시하고 경멸하는 전문종교인이며, 자기 신앙을 철두철미하게 밀어붙이는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전형인 모습이다. 그 점은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에우튀프론은 이 작품에 딱 맞는 이름이다. ‘에우튀’(euthys)는 ‘곧다’, ‘직설적이다’라는 의미이고, ‘프로네인’(phronein)은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직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고, 앞과 뒤를 재보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며,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좀 더 나아가면 인정머리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종교적 신념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려는 과격한 예언자이다. 이런 극단주의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기성찰일 것이다. 자기가 하는 행위가 과연 신앙하는 바, 그 신의 본성과 성품에 부합하는가를 근원으로 몰아붙여서 다시 시작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리라. 그 지점을 소크라테스는 끈덕지게 파고든다. 아버지와 싸워 최고의 신이 된 제우스에게는 경건하다고 칭찬받겠지만, 아들에 의해 퇴위된 크로노스 신에게는 미움 받을 짓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에 에우튀프론은 말문이 막힌다. 아, 이 지점에서 다신론적 세계관의 소크라테스와 유일신앙의 우리 기독교가 다를 수밖에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의 신은 서로 싸운다. 그렇다면 어느 신의 편을 들어야할까? 신의 분노를 사지 않고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신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느냐가 관건이다. 허나, 한 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그걸 살고 싶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문제이다. 아무튼, 경건에 관한한 전문가라고 으스대는 에우튀프론은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붙잡는 소크라테스를 내동댕이치고 허겁지겁 달아나버린다. 3. 욥은 경건한가?경건에 관해 따지기 좋아했던 성경의 대표적 인물은 욥이리라. 하나님께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던 그는 신앙을 테스트 받는다. 혹독한 시련 중에 욥은 온갖 말로 신앙을 부정하는 듯 한다. 태어난 것 자체부터 저주하질 않나, 하나님이 아무 잘못 없는 자신에게 왜 이리 가혹한 고난을 주시는지 거친 말로 대들기 일쑤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친구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증한다. 변증의 핵심은 ‘죄인 만들기’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무 까닭 없이 너에게 고난을 주실 리 없다, 그러므로 너에게는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회개하라며 다그치고 닦달한다.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과 고난의 어긋남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신명기 역사관에 입각해서 복 받으면 순종한 것이고, 벌 받으면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 공식이 자명하게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차라리 부정해 버린다. 그 결과,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마저 부정한다. 친구들은 하나님을 옹호하다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욥은 자신이 죄인인 것은 맞지만, 이토록 고난 받아야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자신이 그간 사랑했던 하나님에 대해 깊은 회의와 성찰과 논쟁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 결과,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 고착되고 고정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말씀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친구들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기어이 보고 말았다. 욥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욥의 말은 그르고, 친구들의 말은 죄다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이었다. 왜 그랬을까?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한다면, 경건에 대한 성찰 여부가 그들을 갈랐다. 에우튀프론은 욥의 친구들과 닮아 있다.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하등의 성찰을 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물으면 물을수록 확고부동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미궁에 빠지고, 미로를 헤맨다. 믿는 바에 관해 대답할 것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벧전 3:15). 최고의 기독교 작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인간 이해가 생각난다. 그는 인간을 속 시원하게 이분법으로 구분한다. 선인과 악인이다. 도덕적 선인과 비도덕적 악인이라 지레 짐작하면 오산이다. 그가 말하는 선인은 참회하는 인간이고, 악인은 참회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무릇 인간이란 죄를 짓기 마련이다. 날 때부터 뼛속 깊이 죄인이다. 그런 죄인 스스로 죄인인 줄 알고 회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들어간다. 욥은 기존에 알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신앙을, 아니 하나님마저 회의하고 핏대를 세워가며 따진다. 그래서 그가 옳은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자신들에게 대드는 인간을 벌주는 신들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당신에게 대드는 욥을 의롭다 칭찬하시고, 싸움질하는 야곱에게 넌지시 져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참 좋다. 4. 경건을 이용하지 않기우리 주님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인간들이 켜켜이 축적해 온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그 하나님 신앙에도 맞지 않는 행위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심지어 부모를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도 ‘고르반’이라는 한마디 말만 던지면, 그것으로 부모 봉양을 면제 받았다. 그것이 오롯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었을까? 십계명의 중추인 ‘부모를 섬기라’는 다섯 번째 계명을 버젓이 어기면서도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던 터. 그 이면의 위선을 까발리는 예수가 당연히 눈엣가시였으리라. 무엇이 중한가? 덜 중요한 전통으로 더 중요한 십계명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행동이 결코 경건일 수 없건만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신앙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이 점에 의구심을 드러낸다. 경건이 무엇인지를 거듭 따지는 통에 에우튀프론은 몇 번이고 경건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등 진땀 흘리며 설명하기 바쁘다. 그 와중에 그가 제시한 네 번째 경건의 정의는 신들을 보살피고 섬기는 기술이라고 해명한다. 보살피고 섬긴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그는 신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제사와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여기에 만족하면 소크라테스가 아닐 터. 그는 재차 묻는다. “제사와 기도란 뭔가?” 제사란 신들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것이고, 기도는 무언가를 달라는 것이 아닌가? 에우튀프론은 넙죽 동의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모든 화력을 동원한 반격을 가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상거래군요.”(87쪽, 14e) 경건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신들을 달래고 으르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만 것이다. 5. 경건으로 사랑하기에우튀프론의 신앙의 위험성은 반성하지 않음에 있다고 했다. 그것이 낳은 큰 위험성은 폭력이다. 폭력을 거칠게 정의하면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물리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그것이 폭력이다. 에우튀프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경건의 기준에 맞추어 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동을 재단한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니 아버지도 곧 바로 살인죄로 기소한 것이다. 나는 신앙과 폭력의 관계를 생각할라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떠오른다. 메시아를 참칭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마땅하고 그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 그것은 신성모독이고, 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은 죽음으로 되갚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다, 그리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유대인의 세계관에서 하늘의 음성은 곧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입술이 부정한 바울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 9:5) 예수는 바울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이고, 바울이 못 죽여 안달인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이 말에 바울은 짧은 순간이나마 미쳐서 돌아버렸을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For) 행한 것이 하나님에 반하는(Against) 일이었고, 그것도 무참하게 죽이고 짓밟았으니, 터가 무너진 것과 다를 바 없다. 경건이란 뭘까? 나는 경건을 히브리어나 헬라어보다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Godlike’이다. 저 단어는 하나님이라는 ‘God’, 좋아하다 또는 ‘~처럼’을 뜻하는 ‘like’가 결합한 것이다. 뜻으로 보자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닮으면 하나님이 좋아진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경건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이 신앙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도 된다고 그것은 경건한 신자의 마땅한 의무라고 여겼다면,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신앙이란 모름지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바울은 율법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5:14)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그 이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살았다, 경건한 바울은 말이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 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크리스천 인문학생각한다는 것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1. 생각하지만, 생각 없는 사람“너는 머리를 왜 달고 다녀? 머리는 그냥 달고 다니는 게 아니야. 생각을 해라, 생각을 좀.” 부모가 공부하지 않는 자녀의 심장을 헤집을 때 비수처럼 꽂는 말이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생각 좀 하면서, 네가 바라고 꿈꾸며 생각하는 미래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요구이다.“너희들은 왜 그렇게 맹목적이야?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믿는 것 같아.” 비신자들이 기독교인을 향해 툭툭 던지는 비판의 말이다. 또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마크 놀(Mark Noll)은 언제부턴가 기독교 내에 지성적 면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사실, 나는 저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고 답답하다.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일별해 보건대, 위대한 지성이 얼마나 많았는가. 구름같이 허다한 지성들이 있거늘, 왜 우리가 생각 없는 종교로 보인단 말인가.우리나라는 어떨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가 인용했던 말은 우리가 바라는 기독교의 모습이지 싶다.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170쪽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지 않고서 기독교적 지성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터. 생각한다는 것의 정체를 따져 보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고 확신한다. 2.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아렌트아렌트(1906-1975)는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2차 세계 대전과 나치 독일을 위시한 전체주의 국가의 발호에 대한 해명이고, 『인간의 조건』은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조건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역작이다. 아렌트는 공동체 안에서 말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대화가 아니라면 인간의 소통은 폭력이거나 재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십상이다.아렌트는 대중적인 철학자이기도 하다. 상당히 학문적인 저술가인데도 대중에게 회자되는 까닭은 그녀의 통찰이 현대 사회에 필요한 사고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에는 라는 이름의 영화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독일어 억양이 남아 있는 그녀의 영어는 독일 전통의 엄격함, 진지함과 동시에 미국의 현실 적합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시대를 거스르는 저항과 용기 있는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칸트의 고향 쾨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었기에 나치 체제에서 핍박을 받았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로 무려 18년 동안 무국적자로 살았다. 유대인이자, 여성이며, 난민이라는 삶의 조건.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아니, 소속될 수 없었던 그녀는 남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사유를 펼쳤다. 그녀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3. 성실하지만 악한 사람, 아이히만유대인만 6백만 명, 집시와 장애인 등을 포함하면 거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집단수용소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그 일을 담당했던 최고위 관료가 바로 칼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다. 그는 패전한 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가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렌트는 자신과 동년배이자 희대의 악마인 아이히만을 탐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카고 뉴요커(The New Yoker)에 먼저 요청하여 이 세기의 재판을 참관했다. 그렇게 취재해서 쓴 책이 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그녀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해명의 단서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아이히만은 상당히 유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지시를 따르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는 것은 양심에 걸리는 일이지만, 저 숱한 인명을 가스실로 보내는 업무에는 일말의 회의도 없었다. 이는 필시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닐까? “허나,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하다. 가정에서는 착한 아들, 좋은 남편, 멋진 아빠였으며, 이웃에게는 친절하고, 직장에서는 성실했다. 국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충성스러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지극히 일반적인 성인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간수가 그에게 유명한 소설, 『롤리타』를 빌려주었다. 어린 소녀를 향한 중년 남성의 성적 욕망에 관한 이 작품을 읽은 아이히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불건전한 책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를 조사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정상인이라고 판단했다. 의사 중 한 명은 자신보다 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왜 악마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걸까? 왜 죄책감이 없었던 걸까?4. 무사려는 무배려다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은 상식을 초월한다. 아이히만이 악인이 아니라 정상인이었으며 평범한 사람이었다. 가히 충격적이다. 수백, 수천만의 양민을 가혹한 죽음의 땅으로 내몬 살인 기술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니. 다만 ‘생각의 무능력’이라는 잘못을 저질렀을 뿐이다. 그의 악행을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찾다니.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내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친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 아이히만이라니. 아렌트의 진단과 해명을 들어보자.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106쪽)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어휘력이 빈약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용한 말은 나치의 선전 문구나 관공서 공문의 상투적 언어를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의 언어 세계가 궁색하기에 그는 타인의 세계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대한 공감 능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다.한 사람의 사고력은 그의 어휘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가 나의 세계이다. 가용 가능한 단어가 빈약할수록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며, 생각과 감정도 초라할 수밖에 없다. 문장이 아닌 단어로 말하는 것, 문장을 이어서 논리적으로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사유의 가난함을 웅변한다.그런데 언어와 사고가 저리도 중요한 것일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인간 됨은 행위와 말에 있다고 주장한다. 삶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나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작업이라는 인간은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말과 행위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한다.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말과 행위를 떠난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그렇지만 저 인용구에서의 생각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과는 좀 다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의심을 해도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가 있다. 바로 ‘의심하는 행위’이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기초를 통해 확실한 인식 체계도 구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세계의 평화를 모색했던 이 사람, 데카르트에게 이성적 인간이 희망의 단서이었다.그러나 아렌트에게 생각하는 능력이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 내가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고통에 대해 연민을 품는 것이다. 나는 나이고, 너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와 달리 나는 너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너의 것을 나의 아픔인 양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다. 무엇으로? 바로 사고하는 능력으로!“상상력이란 기술적이고 방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사고이다.”아렌트가 정의한 ‘생각’이란, ‘타인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아이히만은 잔혹한 살상 행위를 국가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서류를 꾸미고, 보고하고, 실행되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하면서도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목소리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무심히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을 ‘상상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짚어냈던 것이다.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소환한다. 그녀가 보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은 ‘상상력의 결여’(391쪽)라는 원천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가상칠언의 하나인,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작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한다(눅 23:34)’는 말을 역추적해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인류 최악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가 받는 고통을 미루어 짐작하려는 연민도 없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성찰도 하지 않는다. 상상력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역지사지의 자세이다. 아이히만은 그런 상상력이 결핍된 상태이었기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후회도 없이 유대인을 죽이는 임무를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수행했던 것이다.“그러고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저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을 무사려(無思慮)라고 고쳐 읽는다. 무사려=무배려(無配慮)인 것이다. 사려 깊지 못함은 배려하지 못함과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내 처지만 생각하고, 나를 우선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될 공산이 크다.”그 극단적 사례가 아이히만이다. 예일대 신경과학 석좌교수인 이대열은 ‘지능’을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지능이다. 그러나 점수로 매긴 지능지수는 그저 인지적인 능력을 수치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능을 지능지수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가려면, 타인의 마음과 선택을 예측해야 하고, 그러자면 자기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이대열은 그것을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 능력이라고 했다.아이히만에게 생각이란 지능 지수적 차원의 것이었다. “생각하는 능력은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플 것이고, 남도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느끼는 것, 그런 공감과 연민이 다름 아닌 사유하는 능력인 것이다.” 종종 우리는 그 예측을 빗나가는 상황과 맞닥뜨리고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런 지성과 지능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가 되는 것이다. 5.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 요셉생각한다는 것이 타인을 배려하는 일이란 것은 한나 아렌트 이전, 무려 2,500년 전의 동아시아 사람, 공자를 통해 이미 알려진 바 있다. 흔히들 공자의 핵심을 어짊 곧, 인(仁)으로 꿰뚫지만, 정작 당사자는 ‘충’(忠)과 ‘서’(恕)라고 한다. 『논어』의 ‘이인편’에서 공자는 애제자인 증삼을 통해 말한다. 복잡해 보이는 자신의 사상을 하나로 꿸 수 있는 키워드는 ‘충서’라고.충(忠)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반면, 서(恕)는 헤아리다, 용서하다 등의 뜻을 지녔는데,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헤아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바를 남에게 행하는 그것이 ‘서’이다. 산상수훈의 황금률과 닮았다. 공자에게도 생각은 합리성이 아닌,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하는 마음이었다.내게,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은 요셉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닌, 예수의 육친 요셉 말이다. 그는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율법을 따르면, 그것은 간음이었다. 파혼은 물론이고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는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으로 자신의 무죄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마을 어른들에게 끌고 가야 했다.그런데 그는 생각한다(마 1:20). 요셉의 생각은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규칙을 잘 따르는 사고도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느라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돌을 던지는 방법을 고안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원래 의미에 맞게 사랑하는 방법을 골몰한다. 사랑하는 아내의 잘못을 무작정 덮지도 않았지만, 그녀를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요셉의 생각함은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고 했을 때의 생각함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말씀의 영의 마음을 헤아린다. 나는 우리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지성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은 대개 무신론자 아니면 불교 계통이다.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없지 않지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췄으면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 지수가 높고, 공부도 잘해서 문제도 척척 잘 푸는 것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의 사유 방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바란다. 김기현 목사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 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SERMON&LEADER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 공자의 『논어』 읽기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 1. 산다는 것은?산다는 건, 그냥 숨만 쉬고, 밥만 먹는 걸까? 짐승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동물과 다름 없는 삶이다. 인간이 육체를 입고 사는 한, 먹고 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은 그 다음, 그 너머의 의미를 추구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내와 목회란 무엇일까를 두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참는 것이라고, 아내는 기다림이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힘들어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위의 두 단어는 사랑에 관한 바울의 편지를 닮았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사랑에 관한 정의는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로 마친다(고전 13:4-7). 그날 이후로 목사로서 만이 아닌 한 사람의 신자로, 한 인간으로서 ‘사랑’이라는 내 나름의 정의를 얻게 되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기 힘든 이들, 아니 사랑하기 싫은 이들, 사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내 모습에 지치고 곤할 때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고,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다짐하곤 한다. 그런 내게 『논어』는 사랑하며 사는 것에 관한 공부가 되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진부하기 짝이 없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공자를 만나면서 넓어지고, 기독교의 사랑 이해가 깊어졌다고 할까. 그러면 공자는 누구이고, 그에게서 배운 사랑은 무엇이고, 기독교와 어떤 점이 다를까? 2.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공자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다양하다. 유학의 완성자이자 4대 성인의 한 사람이고, 동아시아 정신세계의 지배자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무관의 제왕으로 존숭(尊崇)했다. 나는 공자를 생각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라는 유행가가 자동으로 연결된다. 살구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리는 순간 입에서 침이 솟듯이 말이다.배병삼 교수는 『논어』에 울음이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나로서는 『논어』를 읽으면서 군데군데에서 공자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그것에 감염되어 목메었다. 목멤.” - 『한글세대를 위한 논어1』(문학동네), 7쪽 개판이 되어버린 세상에 살면서도 짐승이 되기보다는 인간이고자 했던 사람, 더 나아가 신성한 삶을 꿈꾸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 공자이다. 『논어』의 이면에 흐르는 눈물을 읽지 않으면 공자의 표면만 읽은 것일 터. 『논어』에서 흐르는 숨죽인 울음의 진원지를 정확하게 지목하면 헌문 36장이다. 그곳에서 자로는 성문지기를 만난다. 자로가 공자 문하임을 알고 그는 무심하게 툭 한 마디를 던진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하려는 사람 말이군요.” 공자에 대해 비판적인 은자의 말이지만, 공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되는 줄. 그래도 안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게 뭘까? ‘상갓집 개’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왜 끝까지 고수했을까? 그 이유를 6장에서 알 수 있다. 세속을 등진 은자는 바꿀 수 없는 세상 바꾸려고 헛된 수고하지 말고 세상을 피해 사는 게 낫지 않느냐며 공자에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그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짐승과 다르고, 사람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으며 사람답게 살고,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고 존재의 방식이라고 항변한다. 공자의 대답을 조용히 읊조리면 어느새 눈가가 붉어진다.그도 그럴 것이 공자의 시대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500여 년의 춘추전국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시기였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날마다 죽어 나갔다. 그의 관심은 폭력과 전쟁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와 안정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 홀로 안전과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극도의 개인주의로서의 존재 방식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보편적 삶의 지향일 수는 없다.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했듯이, ‘나와 그것이라는 물리적 세상에서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이 인간다움이지 않겠는가.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천상천하에 나 홀로 있다면, 이미 사람이 아니다. 사람 속에 섞여 사는 것이 인간이고, 삶이 폭력과 전쟁으로 망가져 있다면, 변혁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일일 게다. 3.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공자의 핵심 사상을 ‘인’(仁)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인’의 문자적 의미는 ‘어질다’ 이다. 그러나 어질다는 뜻을 지닌 한자말은 어질 현(賢)도 있다. 공자는 ‘현’ 보다는 ‘인’으로 자기 사상을 말해왔다. 때문에, 논어 학자들은 ‘인’을 ‘사람다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 무엇이다.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인’이라는 한자를 풀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해석했다(『논어고금주1』(사암), 79쪽). 인(仁)은 둘(二)과 인(人)의 결합이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부모, 자녀, 친구, 대통령과 국민, 목사, 교인 등 어떤 것도 홀로 있지 않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둘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방식이 ‘인’이다. 그러면 공자는 사람다움을 어떻게 말했을까?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22장이다. 번지는 인이 무엇이냐고 대놓고 묻는다. 공자가 ‘인’에 대해 직접 말하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인’의 개념은 친숙하지 않았으며, 그리 쉽게 간단하게 표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질 급한 제자가 똑 부러지게 말해 달라고 곧장 치고 들어간다. 그런 제자의 성미를 알아차린 공자도 돌아가지 않는다. 잘라 말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배병삼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세 가지로 해설하였다. 사람의 몸과 생명을 아끼고, 더 나아가 타인을 아끼는 일이다(『한글세대를 위한 논어2』, 530-531쪽). 나와 남의 몸, 생명,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을 사랑함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유학자들의 공통된 대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1장의 구절인데, ‘극기’란 자신을 극복한다, 이긴다는 것이고, ‘복례’란 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을 그냥 신체적 자기로 해석하면 안 된다. 내적 자아이고, 내적 욕망이다. 자기를 사랑한다, 또는 자아 중심주의라고 했을 때의 그 자기이다. 좀 더 나아가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와 생명을 함부로 침범하는 ‘나’이다. ‘예’(禮)란 무엇일까? 예의 혹은 예의범절이다. 타인에게 깍듯이 예의를 다한다는 말이렷다. 공자가 『논어』에서 사용한 ‘예’의 사용 용례를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늘의 도 혹은 이치를 말한다. 예의는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 자신의 사익을 좇는 욕망과 싸워 이겨내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귀중한 인격체로 인정한다. 4.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면?이쯤 되면 공자의 ‘인’은 ‘신’(神)이라는 절대자 혹은 초월자를 상정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기독교의 사랑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표현만 다르다고 할까? 그런데 애인(愛人)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이지’라고 나는 당연하게 읽었다. 허나, 학문은 자명한 것을 다시 따져 묻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이니,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으면 맥락 없는 그렇고 그런 맹탕이 되고 만다. 공자가 말한 사람은 누굴까? 신정근에 따르면, ‘사람’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이 고대 그리스처럼 자유민이라면, 노예는 공자의 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글항아리), 112쪽 그리스에서 자유민이 사람이었다면, 왕조 국가인 중국에서 사람은 왕과 귀족과 같은 통치자 그룹뿐이다. 평민과 백성을 가리키는 단어는 뭘까? 바로 ‘민’(民)이다. 지배자는 인(人)이고 피지배자는 민(民)이다. 그러니까 인민(人民)이라고 했을 때, 사람은 다스리는 자이고, 다스림을 받는 백성은 사람이 아니다.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장이 있다.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대목이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중히 하여 믿음을 얻어야 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이 두 가지인데, ‘물자를 아껴서 사람을 사랑하고, 때에 맞춰 백성에게 부역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5장) 여기서 사람은 누구이고, 물자를 아끼면 왕조 국가에서 누구에게 사랑받을까? 그 다음 문장에 등장하는 백성과 대조시키면, 그것은 그냥 보편 명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군주를 가리킨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나의 이 해석은 기실, 『논어』에 관해 가장 강렬한 토론을 불러일으킨 조기빈의 책, 『반논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논어』에서 사용된 인(人)의 용례를 꼼꼼히 검토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전문 용어를 간추려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애인(愛人)의 실질적인 내용은 완전히 인(人) 계급 내부에 한정되어 있고, 민(民)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인’이 자신의 수중에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민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윗사람에게 공경하고 복종하며 직분에 성실하도록’ 도모하는 것이다.” 공자의 인 사상이 차별적 사랑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공자의 최대 계승자인 맹자의 글과 공자 당대 사상가들의 비판에서 볼 수 있다.(『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3장과 4장) 먼저 후대의 맹자다. 인에 대한 맹자의 정의를 보자. “인의 실질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다.” - 『맹자』, 상 27장“가까운 친척과 친애로 대하고, 백성은 인으로 대하고, 사물은 돌본다.” - 상 45장 이 두 개의 인용구에서 ‘인’은 가족이나 혈연관계를 사랑함이고, 그것이 사랑의 시작점이다.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찌 멀리 있는 이웃,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사회와 사해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 간다. 바로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고, 자신을 있게 한 최소 공동체인 가족이 사랑의 일차 대상이고 범주이다.그러나 그것이 사람에 대한 차등이고 차별이라고 본 공자 당대의 사상가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묵자이다. 그는 공자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겸애, 兼愛)이 아닌 반쪽 사랑(별애, 別愛)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120-125쪽)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우선 사랑한다면, 그 사회는 각자의 이기주의와 가족주의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한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남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나와 남을 구분하는 차등 사랑이 아니라 구분 없는 평등 사랑이 대안이고 해결이다. 정리하고 넘어가자. 『논어』의 ‘인’은 한쪽 극단으로 밀고 가면 중국학자 조기빈의 말처럼 봉건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거나 아니면, 반대편 극단으로 나아가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랑이다. 신정근의 주장대로 애당초 가족주의를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안에는 보편 사랑으로 확대될 맹아가 자리했다고 온건하게 정리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공자의 사랑은 차별적, 차등적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5.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그렇다면, 예수가 사랑하라고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랑을 살펴보자.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외부를 향해 뻗어나감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것이다. 세상은 서로를 미워하지만, 교회는 서로를 사랑한다. 세상은 서로가 높아지려고 안달복달하지만, 교회는 서로의 발을 씻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주역은 주변부 사람들이다. 노인과 여성, 이방인, 가난한 자들이다. 마태복음은 더욱 급진적이다. 요한이 ‘형제 사랑’을, 누가가 ‘약자 사랑’을 말했다면, 마태는 ‘원수 사랑’을 요구한다. 예수의 사상과 윤리를 가장 온전히 담고 있는 산상수훈의 핵심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에 있다. 자신을 아끼고, 가족을 우선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요구는 결코 아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마 5:44)하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말했다. 공자에게도 원수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원한은 원한에 합당한 것으로 되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 - 36장 불의에 대한 정당한 미움과 징벌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거니와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복수의 정당성도 마련해 준다. 화목과 화해라는 이름으로 정의의 실천을 약화하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정국을 파국으로 몰고 갈 공산이 크다.거칠게 구분하자면, ‘원수 사랑’ vs. ‘가족 사랑’의 구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끝없이 죽고 죽이는 전란의 시대, 야만의 세계를 어린 양과 사자가 함께 뒹굴며 뛰어노는 세상으로 일구기 위한 사랑의 전략은 무엇일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가족 사랑’에서 시작하여 ‘원수 사랑’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면 간단하다. 공자가 말한 대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군자의 길이고, 신자의 길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양자의 사상적 기반과 사유가 작동하는 시스템과 패러다임이 다르기에 양자의 공통분모가 마땅치 않다. 나는 이 이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예수와 공자의 정체성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수에게서 모든 사람은 자녀이고 가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호칭한다. 창조주에게서 인간은 어떤 특정한 그룹이 배제되거나 차별될 수 없고, 모두가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이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그분의 몸과 맘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무엇보다도 사람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신 분이다.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란 자신의 온몸을 우리 모두에게 주신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에 좁디좁은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원수이고, 누군가에게는 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은 원수이고 사랑받는 죄인이다. 용서받은 자로 용서하고, 사랑받은 자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세상을 비추는 빛이 사람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고루 자신의 은총을 내리듯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완성이다.내 눈에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할 수 없는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내 얼굴을 볼 때, 전쟁은 종식되고 평화가 도래한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공자의 사랑에 대한 사상을 대중가요로 푼다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라고 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라서”일 것이다. 그 어려운 사랑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해내지 말입니다.’ 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 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BOOK REVIEW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맹목적인가?- 『권위에 대한 복종』,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에코리브르 -글 김기현 목사(로고스교회)1. 어떤 실험 이야기예일대학교의 한 실험실에서 참가자를 모집한다. ‘체벌이 학습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시간당 비용도 쏠쏠하다. 연구에 기여하는 일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신청자들은 명문 대학답게 아름답고 거대한 건물의 실험실 내부에서 풍겨 나오는 과학의 권위에 약간 위축된다. 연구원이 실험에 관해 브리핑을 한다. 실험 참가자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학생에게 퀴즈 문제를 내고, 틀리면 체벌에 준하는 모종의 행위를 한다. 버튼만 누르면 된다. 버튼을 누르면 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할 미미한 수준의 충격이 가해진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을 위한 실험이고, 믿을 만한 연구실인 데다가 나 스스로 참여한 것이고, 얼마간의 비용도 받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답이 나오고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의자 위 학생의 반응이 격해졌다. 조금씩 아픈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비명을 지른다. 옆에 서 있던 연구원은 실험 참가자에게 괜찮으니 안심하고 버튼을 누르라고 타이른다. 다시 문제를 낸 후 답이 틀리자 참가자는 버튼을 누른다. 학생은 몸을 비틀고 고함을 지르며 그만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곁에 서 있는 연구원이 계속 버튼을 누르라고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학생이 앉아 있던 의자는 전기의자였다. 참가자가 눌렀던 가로로 정렬된 버튼은 총 30개였다. 그 버튼은 15볼트로 시작해서 15볼트씩 강도가 세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지막 버튼은 450볼트의 충격을 가하는데, 이 정도의 파워면 신체에 심각한 충격을 미친다. 하지만 학생은 연기자였고 전기 충격은 애초에 없었다. 여기서 반전이 있다. 실험 대상은 학생이 아니라 버튼을 누르는 참가자였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라는 명령에 과연 복종할 것인가?’, ‘복종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복종할 것인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총 40명이 이 실험에 참여했다. 과연 몇 명이 마지막 버튼을 눌렀을까? 멈추었다면 어디서 멈추었을까? 사람들은 서너 번째의 버튼에서 중지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실험을 설계한 연구팀도 그럴 것이라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했다” - p.5140명 중 26명, 그러니까 3분의 2가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고, 임무를 잘 수행했다. 연구 결론은 이러하다.“괴물이나 악마도 아닌,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적대감이 없어도 어마어마한 파괴적 과정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만이 그 권위에 저항했다.”이것이 그 유명한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이다.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최악의 악행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저 고분고분하게 권위에 순종했고, 어떤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다. 자, 여기서 질문은 이것이다. 순종은 기독교의 핵심 덕목이며 제자도의 요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복종도 저 실험처럼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복종의 제자도는 무엇이 다를까? 대답을 모색하기 전에 용어 정리부터 하자. 번역본에서 ‘복종’은 영어로 ‘Obedience’, 즉 ‘순종’으로 표현했다. 이 글도 복종과 순종을 구분하지 않고 상호 교체하면서 사용하겠다.2. 복종은 맹목적일 가능성이 크다밀그램 실험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파괴적인 맹목성이 잠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던진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명목으로 숱한 범죄를 정당화한 사례가 많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를 지지했던 독일 기독교가 그랬다. 일제 신사참배에 동참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불의한 일을 하나님과 성경을 이용해서 정당화했고 순종을 강요했다.이는 비단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각 교회와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목사는 목사대로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니 따르라고 요구하고, 교인은 교인대로 자기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우긴다. 신앙적 의문에 대해 질문하면 “무조건 믿어. 순종하면 되지 말이 많다!”라는 질책이 떨어진다.맹목적 믿음이요, 맹목적 순종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은 맹신이 아니고 순종은 맹목이 아닐진대, 이것은 변질이다. 복종은 때로 파괴적이다. 왜 독일인들은 타자를 그토록 잔인한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추태화 교수는 『권력과 신앙』에서 “독일인이 독일인들에 의해 탄압당했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핍박당했다”고 썼다. 이상한 독일인도, 이단적 신자도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독일인이었고, 지극히 기독교적인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런데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 없이 방관하거나 가담했다. 평범한 신자의 맹목적인 신앙이 초래한 비극이다.3. 복종이 먼저다밀그램 실험이 기독교 신앙에 가하는 도전적 문제에 정면으로 대답해보자. 우리 안에 왜곡된 복종이 없었는지 돌아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결코 맹목이 아님을 보여줄 때다. 내 대답은 이것이다. 복종이 먼저다. 복종하는 법을 배운 다음에서라야 거부할 수 있다.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는 잠언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우들이 잠언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잠언이 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으며, 욥기의 세계관과 잠언이 갈등 관계로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언을 잠언으로 읽고, 욥기로 잠언을 부정하지 말 것. 만약 말씀을 그렇게 읽는다면, 욥기는 잠언으로 비판받지 않겠는가?“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욥을 봐라!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오히려 더 고생한다.’ 이렇게 말할 건가요?”학생들은 교사와 교과서가 말하는 것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며 동시에 의문을 품는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와 잠언이 말하는 순종을 우선 학습하지 않으면 비판이나 의심도 할 수 없다.밀그램도 이에 동의했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건, 문명화가 되었건 여전히 원시적인 곳이라도 권위는 필수적이고 따라서 복종은 자연스럽다”(P.201). 가족, 학교, 교회에서 잘 적응하고 성장하려면 기존의 권위와 규칙을 잘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비슷하게 말했다. 그녀의 유명한 명제 ‘악의 평범성’은 사실 이 책, 권위에 대한 복종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녀 또한 일반적인 사람들이 대량 학살에 동조한 현상을 밀그램과 비슷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그녀도 ‘복종이 먼저’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어린아이 시절에 순종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하지만 열네 살, 늦어도 열다섯 살이 되면 고분고분 순종하는 태도는 버려야죠.” - 『한나 아렌트의 말』, p.86그녀의 말처럼 순종을 먼저 배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복종을 훈련하는 길’이라는 시(詩)를 남겼다. 자유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복종할 때에 다다른다. 복종을 연습하지 않고서는 자유를 맛볼 수 없다. 잘못된 권위에 저항하기 전에, 정당한 권위에 순종하는 훈련이 먼저다.4. 정당한 권위에 복종을그렇다면 불합리한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한 멋진 서평에서 박찬운 교수는 그 답이 없다고 말한다. “그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P.178) 그의 지적이 일리 있는 것은 밀그램이 복종하는 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끝내 저항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뿐 부각시키지 않는다.하지만 나는 이 책 안에서 찾아냈다. 바로 실험에 참여했던 한 신학자인데, 그는 실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생에게서 항의를 받자 이내 실험을 중단했다. 실험을 계속하라는 지시가 연달아 떨어졌음에도 더 이상 강행하지 않았다. 왜? 그리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게 했을까?구약을 가르치는 이 목사는 ‘무자비한 권위에 맞서는 힘을 강화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 신과 같은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권위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P.86).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은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내적 힘이 생겨난다’는 말의 살아 있는 증거이다.그런데 밀그램은 저 말에 악한 권위를 신성한 권위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드렁하게 토를 달았다. 이 연구자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나 데이터에 대해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비단 밀그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과학자들과 모든 실험실에서 항상 있는 일이니 그를 심하게 나무랄 바는 아니다.그럼에도 밀그램의 해석은 과녁을 너무 비껴간다. 산상수훈에서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이유는 악을 묵상하면서 자신도 악해지기 때문이다. 선을 사랑하고 정의를 생각하는 이가 선을 행하고 정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법이다.“하나님의 권위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악하고 불의한 명령에 몸과 정신을 팔지 않는다. 자유에 이르는 길이 복종이라는 본회퍼의 말을 바꾸면,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길은 복종이다.”이 점을 탁월하게 밝혀내고 아름답고도 깊은 시로 쓴 이가 있으니, 만해 한용운이다. 시, ‘복종’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임에게만 복종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의 시다. 시의 마지막 연은 모순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모순이 아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는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다. 정당한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은 부당한 권위에 무릎 꿇지 않는다. 5. 고통의 감수성그러나 그것을 현실적으로 적용하고자 할 때 막막하다. 훈련으로 부당한 권위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강한 항체를 형성한 다음,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정의와 불의, 혹은 합법과 불의라는 잣대는 구체적 자리에서 무용지물이기 십상이다. 정의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다르고 맞부딪치기 때문이다.나는 ‘고통’이라고 본다. 좀 더 풀어 말하면, ‘나의 결정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가’를 물으면 된다. 여기서 말한 타인은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데, 특별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더욱 생각해야 한다. 체계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그리하여 목소리가 없거나 들을 수 없는 사람들, 저항은 곧 죽음일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고통을 준다면, 성도는 따르기를 거부한다.실험 참가자 중에서 단호히 거부했던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레첸 브란트인데, 밀그램이 “내가 처음에 거의 모든 피험자에게 나타나리라 생각했던 그런 행동을 구현한”(P.136)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여성이다. 왜 불복종했을까? 청소년기에 나치 체제를 겪었던 그녀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마주했던 것 같아요”라고 회고했다. 고통을 당했고, 고통받는 이웃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의 고통을 치유하는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려준다. 그는 치유의 방법을 ‘환대’에서 찾는다. 낯설고 알지 못하는 나그네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밥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법이다. 이방인을 배제하고,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권위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일 리 없다. 상처를 주는 가해자의 길이 아닌 상처를 치유하는 길 위에 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6. 어떤 하나님?권위자에 대한 복종이 악행이 되기도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케케묵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잔소리로 치부된다. 하지만 저 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당한 권위에 불복종하다가 결국 정당한 권위에도 순종하지 않는 우를 범할 수 있다.권위자는 누구인가? 기독교에서 최고이자 최종적 권위자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복종을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성경에서 복종에 관해 가장 많이 말하는 텍스트는 신명기이고, 특히 28장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공동체 전체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경고한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복종을 말하는 신명기와 출애굽의 하나님은 하나다. 열 가지 재앙을 보여주시고, 홍해를 건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 없다! 애굽에서 천대받던 천민 계층을 위해 몸소 역사 한복판에 나타난 신은 없다. 하나님 빼고 모든 신이 강자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우상이고 헛것이다.우리에게 헌신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최고의 헌신을 드리고, 하나님이 아닌 일체의 것에는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이웃 사랑이 아닌 것에는 내 존재와 신앙을 걸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적 의미의 ‘순종’이다. 우리에게 복종을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종하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복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에게 복종하고, 그분이 아닌 어떤 것에도 하나님에게 하듯, 하나님에 반하는 어떤 복종도 하지 않는다.김기현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 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2004년 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신학 및 학술 분과), 이 선정한 명강사 237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이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한동대학교와 경성대 대학원 외래교수이며,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외 다수가 있다.
크리스천 인문학 BOOK REVIEW 뱀 같이 지혜롭고- 『전쟁의 기술』, 로버트 그린, 웅진 지식하우스 - 글 이광희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전임목사)들어가며 : 평화주의자인가 싸움꾼인가베드로가 물었다.“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 정도면 그래도 벌은 안 받겠죠?”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장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한다. 맞다.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좋은 일이다. 그런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가 넘치셨는가?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하셨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평화주의자보다 싸움꾼에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한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대노(大怒)하셨던 적이 있다(요 2:13-17; 마 21:12-13). 이들은 성전 관리자의 승인을 받고 정당하게 장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름한 차림의 낯선 사람이 일행들을 몰고 오더니 테이블을 뒤엎은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꼬았고, 말싸움은 이겨야만 했으며, 그들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했다.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그가 타인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모순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고 한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그러던 그들에게 난감한 일이 생겼으니, 바로 십자가 처형을 받는 동안 예수님께서 누구도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 제일 위험한 그때 예수님은 용서를 실천했다. 이렇게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예수님이 왜 사역에서는 도전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단순히 매순간 참아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다. 사랑하긴 하지만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용서하긴 하겠지만 부딪혀야 할 때가 있다. 예수님에게는 싸움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주의 은혜의 복음과 맞지 않는 상황에서는 싸움꾼을 자처하셨다(눅 4:19). 싸움의 방법에 대한 원칙도 있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제자를 꾸짖으신다(마 26:52). 예수님께서는 실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셨다(마 10:16).우리에게는 전쟁에 뛰어들 기준, 싸울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 싸움의 룰이 필요하다.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의 『전쟁의 기술』이라는 책은 바로 피할 수 있을 때 피하고, 막을 수 있을 때 막고, 일단 싸웠을 땐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모든 인간이 ‘투쟁 상태 혹은 분쟁상태’의 혼란 속에 던져진 존재라고 본다.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다. 지금은 단지 전쟁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을 전략적 전사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총을 쏘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말을 하고 일을 하는 곳에서도 전쟁은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준비해야 한다. 싸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그의 논지다. 본서는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자기 준비의 기술)와 2부(조직의 기술)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임하기 전에 점검해야 할 부분을 말한다. 3부(방어의 기술)와 4부(공격의 기술)는 때로는 피해자가 되고 때로는 가해자가 되는 삶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수하고 쟁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말한다. 5부(모략의 기술)는 전쟁에 임하는 자로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준다.1. 자기 준비의 기술자신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자격증을 따는 것이 아니다. 1)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 2) 어제의 방법으로 살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며, 3) 분노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평정심을 키우고, 4) 진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환경에 자신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1-1. 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라: 동지와 적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외향적 공격은 환영받지 못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모두가 지하로 숨어들어 예측 불가능하고 교묘하게 공격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공격적 욕망을 숨긴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더 많은 해를 끼치려 한다(친구는 당신을 다치게 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존재다).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도움과 협조를 제공하는 이들도 있다. 당장은 같은 편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당신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이득을 챙길 자들이다. - p.34 1-2. 과거의 방식으로 싸우지 마라 : 혁신자들의 전쟁법당신을 종종 우울하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는 불필요한 집착, 진부한 공식의 반복, 과거의 승리나 패배에 대한 기억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옥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과거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해야 하며, 스스로 현재에 반응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라. 과거에 썼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가끔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도록 애써야 한다. - p.431-3. 평정심을 잃지 마라 : 리더의 정신력- 갈등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켜라- 스스로를 의지하라- 기꺼이 바보들을 견뎌내라- 단순한 일에 집중함으로써 심리적 공황에서 벗어나라- 스스로 위협감을 떨쳐내라- 직관력을 발달시켜라1-4.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라 : 배수진(背水陣)당신의 가장 큰 적은 당신 자신이다. 현재에 전념하는 대신 미래를 꿈꾸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아무것도 긴박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 하는 일에 반쯤만 열중하는 것이다. 변화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행동을 통해서 압박감을 표면화하는 것이다. 시간이나 자원을 허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큰 상황에 자신을 놓아보라. 도저히 패배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실제로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와의 끈을 끊고, 스스로의 재간과 에너지에 의존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미지의 영토로 들어서라. 살아서 돌아가려면 당신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 p.792. 조직의 기술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은 결코 혼자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 혼자 잘하려고 애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인사가 만사다. 조직 구조가 스피드와 기동성을 갖고 있도록 1) 사람을 키우고, 2) 재량권을 주며, 3) 조직의 사기를 끌어 올려야 한다.2-1. 자신만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라 : 자기 사람 만들기당신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가진 부하들을 고용하라.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당신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와 일일이 협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동료의식과 효율성을 전파하여 그것이 자기 감시 기능을 하게 하라. 조직의 능률을 높이면 의사결정을 더디게 하는 참모조직, 불필요한 보고서, 의미 없는 회의와 관련된 낭비를 근절할 수 있다. 사소한 사항에 주의를 덜 기울일수록 상황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권력을 광범위하고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사람들은 당신의 휘하에 있으면서도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통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 p.109 2-2. 스스로 작전을 수행하게 하라 : 재량권 부여 방법패튼은 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절대 사람들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마라. 해야 할 일만 알려주면 그들은 독창성을 발휘해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 카를로 데스테(Carlo D\'Este), 『패튼: 전쟁의 천재』(Patton: A Genius for War), 1995년, p.1222-3. 대의명분을 항상 심어주어라 : 동기 부여와 사기 진작1단계 : 특정 대의명분을 중심으로 군대를 통합시켜라.2단계 : 병사들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어라.3단계 : 선두에서 이끌어라.4단계 : 병사들의 ‘기’(氣)를 집중시켜라.5단계 : 감정을 이용하라.6단계 : 질책과 호의를 함께 활용하라.7단계 : 전설을 만들어라.8단계 : 불평꾼들을 내버려 두지 마라.3. 방어의 기술누군가로부터 공격당했을 때, 우리는 흔들리기 쉽다. 하지만 반응하기 전에, 한 번 숨을 돌리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패배여도 좋다. 후퇴여도 좋다. 지금이 싸워야 할 때인지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고 결정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길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방어의 위치는 공격의 위치보다 유리하다.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3-1. 참여할 전투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 경제성의 원칙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당신 사용할 도구들과 물자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라. 꿈이나 계획이 아닌 현실에 기반을 세워라. 당신만의 기술적 재능,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치적 우위, 군대의 사기, 수중에 가지고 있는 수단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당신의 계획과 목적이 꽃을 피우게 만들어라. 그러면 당신의 전략은 더 현실성을 갖추게 될 뿐 아니라 창의성과 효과성까지 갖추게 될 것이다. 먼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꿈꾸고 난 후에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을 찾으면 고갈, 낭비, 실패를 재촉할 뿐이다. (중략) 완벽한 경제성을 인색함과 혼동하지 말라. - p.1683-2.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어라 : 반격의 기술적이 강해 보이는 것은 그가 특별한 힘이나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금이나 자원이 될 수도 있고, 군대나 영토의 크기, 혹은 그의 윤리나 명성일 수 있다. 그가 어떤 장점을 가졌든 실제로 그것은 잠재적 약점이 된다. 그가 바로 그 강점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점을 무력화시켜라. 그러면 그의 취약점이 드러난다. 그가 자신의 이점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적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 p.189 3-3. 위협적인 존재임을 과시하라 : 전쟁 억지와 경고공격자를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은 애초에 공격할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패배할 경우 곱게 물러서지 않는다는 평판을 구축하라. 그런 다음 거친 행동으로 강력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그러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게 하라. 때로는 불확실성이 명백한 위협보다 나을 수도 있다. 상대는 당신을 건드리는 데 어떤 대가가 따를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결코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인간의 타고난 두려움과 걱정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이 다시 한번 생각하게 유도하라. - p.1933-4.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파악하라 : 작전상 후퇴의 방법공간은 회복할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절대 회복 불가능하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p.2114. 공격의 기술항상 전쟁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먼저 공격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1) 적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고, 2) 핵심적으로 공격해야 할 부분을 찾아, 3) 철저하게 각개 격파해야 한다. 4) 정면충돌보다는 우회하여 공격하는 것이 좋고, 5) 공격에도 경제성이 필요함을 기억하며, 6)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만 한다.4-1. 적장의 심리를 파악하라 : 정보전과 심리전나는 두 종류의 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물을 바라보는 눈과 내면의 특성을 인지하기 위해 바라보는 눈이다. 전자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관찰하기 위해]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한편 후자는 [적의 심중을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강력해야 한다. 타인의 심중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있다. 자신의 방어를 위해서는, 눈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눈을 통해 마음이 드러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중하게 고려하고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p.2634-2. 아프고 약한 부위를 집중 공격하라 : 핵심 공략법인간은 부드러운 호흡과 생명 유지를 위해 목구멍에 의존한다. 목을 조르면 그의 오감 기관들은 그 감각을 잃고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감각해지고 마비되어 사지를 쭉 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의 깃발이 시야에 들어오고 전투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우선 그 등과 목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적을 등 뒤에서 공격하고 목을 조를 수 있다. 이는 적을 괴멸시킬 수 있는 뛰어난 전략이다. - 『전쟁의 비결: 고대 중국의 군사전략 36계』, 순 하이첸 번역, p.2984-3. 철저하게 각개 격파하라 : 분할 공격술적을 살필 때는 그들의 겉모습에 겁먹지 말라. 그 대신 적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주목하라. 그러한 부분들을 분리하여 불화와 분열의 씨앗을 뿌리면, 가공할 정도로 무서운 적도 무너뜨릴 수 있다. (중략) 거대한 문제나 적을 만났을 때는 공략 가능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다. - p.3094-4. 우회하여 공격하라 : 측면 공격 전략측면공격의 열쇠는 단계적인 진행이다. 당신의 초수(初手)가 당신의 의도나 진짜 공격 대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 p.341 4-5. 책략으로 상대의 힘을 약화시킨 후 공격하라 : 공격의 경제성삶은 길고 분쟁은 늘 끊이지 않기에 당신이 지속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성공을 유지하고 싶다면 책략전 쪽이 현명한 선택이다. 다음은 책략전의 네 가지 원칙이다.- 몇 가지 대안을 가진 계획을 준비하라- 항상 책략을 쓸 여지를 남겨라- 적에게 단순히 문제가 아니라 딜레마를 제공하라- 무질서를 창조하라4-6. 전쟁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계획하라 : 마무리의 노하우명심하라. 어떤 모험에서든 당신이 승리나 패배 혹은 성공과 실패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당신의 지성은 앞을 내다보기보다 어느 시점에 멈추게 된다. 감정이 그 순간을 지배한다. 승리하면 잘났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고, 패배하면 낙담과 비통이 온몸을 휘감는다.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유연하고 전략적인 시각이다. (중략) 어떤 승리나 패배도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삶에서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수천 번의 투쟁 속에서도 우리는 훨씬 수월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진실한 종말은 죽음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두 과도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 p.414 5. 모략의 기술싸움은 힘으로 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머리를 써야만 한다. 모략은 곧 전략이다. 저자는 일상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제공한다. 1) 내가 힘을 쓰기 전에 상대가 자멸할 방법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하고, 2) 서두르지 말고 야금야금 갉아먹어야 하며, 3)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히 여기고, 4) 내부에 들어가야 한다.5-1. 상대를 자멸로 이끌 심리적 계책을 이용하라 : 한발 앞선 수읽기당신은 매일 계속되는, 이 불확실하면서도 위험한 전쟁에 적합한 전투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이러한 전쟁에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비정규전 전략이 바로 한발 앞서는 수 구사 전략이다. 역사상 가장 현명한 부하들이 발전시킨 이 전략은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당신의 라이벌은 자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방어적이고 열등감을 느끼는 라이벌은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면서도 방어적이고 열등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5185-2. 야금야금 갉아먹어라 : 기정사실의 힘한 입 갉아 먹었을 때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방어에서 나온 행동을 보여라. 이는 당신을 패배자처럼 보이게 해줄 것이다. 갉아먹는 사이에 충분한 휴식기를 두어(사람들의 짧은 집중 기간을 이용) 당신의 목표에 한계가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당신이 평화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실제로 더 큰 것을 수시로 갉아먹은 후, 당신이 먹은 것 중 일부를 토해내는 것이 이 전략의 극치다. 이 경우 사람들은 당신이 쌓아가고 있는 제국이 아니라, 당신의 관대함과 절제된 행동만을 주시할 것이다. - p.5465-3. 적의 마인드에 침투하라 : 커뮤니케이션 기술우회적이면서도 참신한 방법으로 상대를 주물러서 그들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을 공략하고 경험을 변화시키며, 이미지와 강력한 상징, 그리고 직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신호로 현혹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를 훨씬 취약하고 유동적이었던 유년기 상태로 되돌려놓으면 전달된 아이디어가 그들의 방어선을 깊숙이 뚫을 수 있다. - p.5545-4. 내부에 들어가 파괴하라 : 후방 교란가장 현명한 전략은 당신의 장기적인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집단이나, 당신이 가장 선호하는 집단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 집단을 외부에서부터 정복하려 들지 말고, 그곳에 이르는 땅굴을 파야 한다. 인사이더가 되면 그 집단의 운용 방식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 구성원들의 위선과 약점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정보를 활용하여 음험한 내부 전쟁을 벌일 수 있다. 해당 조직을 내부로부터 분열시켜 정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 p.579 맺으며 : 기준선을 그어보자목회란 전쟁과도 같다. 한 영혼을 변화시킬 때 엄청난 에너지 소모와 갈등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오늘도 우리는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서 이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어디까지 싸워야 하는 것인가?장로의 뒷이야기를 하는 목사가 많다. 저 장로만 없으면 교회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예수님은 특정인과 싸우시지 않았다. 죄라고 부르는, 모호하지만 실제적인 영향력과 싸우셨다. 그것이 우리의 장군이신 예수님이 선언하셨던 싸움의 대상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필자를 편안하게 한 부분은 바로 1) 우리는 항상 싸움 중에 있다는 것이다. 다툼이 일어나면 목사로서 내 책임인 것만 같아서 자책하던 때가 많았다. 싸움을 멈출 수 있는 초월적인 방법이나 카리스마를 구하며 열등감에 짓눌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항상 투쟁 중이며, 매 순간은 방어 아니면 공격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래서 싸움의 원인을 찾으려 생각과 감정을 소진하는 일에서 벗어나, 이제는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2) 지켜야 할 신념과 사람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3) 평정심의 중요성에 대해 확인했고, 4) 과거의 방식으로 싸우면 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5) 공격당하는 것이 공격하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6) 패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7) 확실한 명분 없이는 싸우지 않으며, 싸움의 대상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설정한다. 8) 죄의 영향력과 영역을 연구하고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그 취약점과 우회로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9) 공격하기 위해서는 야금야금 갉아먹듯 침투해야 함을 숙지하고, 10) 소통에 신중을 기한다. 목회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보다 큰 모순은 없을 것이다. 목사는 복음 전투의 선봉에 서야 하는 때가 많다. 그래서 본서를 통해 예수님의 싸움법을 생각해보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가진 목사이고 싶다. 이광희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의 20대 젊은 이들과 더불어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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