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성장연구원의 월간지로 목회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있습니다
<스페셜리포트> 앵그리 소사이어티와 목회자의 분노_오태균 교수(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77
등록일시 : 2015-04-08
인쇄
스페셜리포트 앵그리 소사이어티와 목회자의 분노 글 오태균 교수(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들어가는 말 최근 들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 분노 표현 방식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살인을 부르는 층간소음”, “어린이집 교사, 네 살배기 어린아이 내동댕이 쳐…”, “화성 공기총 난사 사건, 파출소장 포함 4명 사망” 등등. 최근 발생한 위의 신문 기사 제목들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분노의 사회(Angry Society)로 변질되어 가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겨우 네 살 난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선생님에게 사정없이 얻어맞고 내팽겨쳐지는 장면은 우리 사회의 공분을 샀고, 그로 인해 괜히 죄 없는 다수의 모범적인 어린이집 교사들까지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분노의 질주를 일삼는 난폭 운전자를 만날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괴한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위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는 안전지대인가?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에서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이 분노로 가득 차 강단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성도들의 존경과 귀감이 되어야 하는 목회자 자신조차도 순간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원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분노상담사례 사례 1 : A집사는 3대째 예수님과 교회를 잘 섬기는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고 성장했다. 몇 번의 상담을 통해 필자가 느낀 것은 내담자는 분노와 전혀 상관없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절제되지 않는 분노의 문제로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현재 그녀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최근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반주자로, 때로는 교사로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담자의 문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본인이 조금이라도 무시당하거나 피해를 입는다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면서 바로 분노가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은 동료 교수, 직원, 학생들이고, 교회에서는 자신이 속해 있는 부서의 담당 교역자, 부장장로, 동료 집사들, 일상에서는 백화점 점원, 주차 안내원, 구청 직원 등 누구라도 자신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터뜨린다는 것이다. 결국 반복되는 자신의 분노 폭발로 인해 10년 이상을 봉사했던 정든 교회를 떠나야 했고, 학교에서도 분노 문제와 맞물려 승진 및 재임용에서 탈락되어 다른 학교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이 내담자는 현재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몹시 걱정하고 있는 상태이다. 사례 2 : B목사는 최근 자신의 잘못된 분노 표출 문제로 교회를 사임했다. 그 교회를 떠난 표면적 이유는 부목사와의 갈등 문제이다. B목사는 사역현장에서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의 긴장관계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갈등이 증폭된 이유는 부사역자의 업무 능력이나 사역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B목사는 부교역자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참아오다가 어느 날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말았다. 과거 군대에서 경험했던 대로 자신의 구두 발로 부목사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 사건은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B목사는 오랫동안 열정과 헌신을 쏟아 부었던 사역지를 떠나게 된 것이다. 분노의 정체 분노를 다루는 방식 -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위의 목록에 하나라도 해당되는가?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문제가 있는 죄인(롬 3:23)이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이 위의 목록들 중 3개 이상에 해당된다면, 당신은 정서적 시한폭탄(Emotional time bomb)을 안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근처의 정신건강의학자나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분노 경험의 원인 첫째, 성장 배경에서 오는 내적인 요인으로는 정신 건강 분야에서 오랫동안 핵심 요소로 간주하고 있는 자아 존중감을 들 수 있다.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가족, 학교, 이웃 등으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은 경험이 자주 있었다면, 당신은 무의식 가운데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낮은 자아 존중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낮은 자아 존중감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장점을 잘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을 보인다. 결국 이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낮게 보고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혼란으로 귀결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내면의 세계는 외부의 스트레스에도 취약하여 쉽게 분노로 이어진다. 또한 낮은 자존감과 수치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항상 같이 따라다닌다. 수치심은 분노와 같은 정서에 속하는 감정이면서 어린 시절부터 전 생애에 걸쳐 형성되기 때문에 개인의 내면화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내면화된 수치심’이 높은 목회자일수록 방어 전략으로 대인관계에서 분노를 경험할 확률이 높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특징적인 스타일로 고착되기도 한다. 둘째, 목회자가 분노를 경험하는 외적요인으로는 자신이 처한 독특한 한국적 목회환경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부담은 세계 다른 교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중하다. 주일설교, 수요설교, 금요철야, 새벽기도회 설교, 심방 설교 등으로 목사의 설교 준비에 대한 부담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설령 부교역자가 있다하더라도 담임목사는 일주일 평균 주일 낮 설교를 포함하여 2-3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성찰, 본문 주해를 위한 연구 시간을 따로 구별하기란 한국에서 목회를 해본 사람이라면 결단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마치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설교 준비가 반복적으로 산 정상을 향해 굴리고 올라가야 하는 큰 바위 덩어리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탁월한 설교에 대한 강박과 부담으로 인해 목회자는 설교 준비를 위한 일에 방해를 받게 되면 상대방이 가족이든 혹은 교인이든 간에 분노 표출을 이어질 가능성이 항상 있다. 과중한 설교부담에 이어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비현실적인 기대는 목회자의 분노 표출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보편적으로 교인들은 자신의 목회자에 대해 위대한 설교자, 교사, 행정가, 치유자, 지도자이며 경제적으로는 청렴한 선비 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현실적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만능 은사를 가진 목회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경제 문제로 인해 자녀교육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며, 이런 정신적 압박감은 분노를 촉발시킬 수 있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은 교인들의 비현실적 기대 등으로 인해 목회자는 대인관계에서 늘 긴장감을 가질 수 있으며, 건강치 못한 자존감을 가진 목회자에게는 이것이 분노를 통제하기 힘든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교인들은 목회자의 가정은 ‘위대한 성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목회자는 자녀들이 사춘기에 탈선하거나, 사모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못한다는 판단이 들 때, 이는 또 다른 분노 촉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압박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일부 목회자들은 분노 표출 대신 일중독이라는 또 다른 역기능적 대체물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건강하지 못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일중독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신체적, 정서적 기반을 위협하고, 정서에 인화 물질과도 같은 일중독 상태는 한 순간 작은 스트레스라는 뇌관에 의해 분노폭발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분노 표현 양식 또한 교회에서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부교역자의 실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회의석상에서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모습도 바로 이 감정폭발형에 속한다. 이런 유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감정을 마구 쏟아 내거나 분노의 노예가 되어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이를 참거나 자제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후회와 합리화에 사로잡힌다. 반면에 통제하는 폭발형이 있는데, 이는 고의적으로 분노를 터뜨려 상대방을 조정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목회자는 분노 표현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의 분노 표현은 계획적일 때가 많고 철저하게 계산적이며 통제되는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감정억압형(Anger In)이다. 감정폭발형과 마찬가지로 억압형에도 두 가지의 양식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분노를 억압 내지 부정하는 자기징벌형(Self-punisher)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분노가 없는 척 하는 위장분노형(Underhanders)형이다. 자기징벌형은 외부로 자신의 분노를 잘 내지 않는, 적어도 외부인들이 볼 때는 대단히 성실한 목회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 하찮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강박증에 시달릴 수 있으며, 보통 일 중독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는 사역 현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기 때문에, 보통 표정이 어두우며 만성적이고 미세한 우울감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런 유형은 분노라는 정서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도록 방치하기 때문에 신체표현형(Somatizer)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장분노형은 직접적인 분노 표출 대신 뒤에서 자신에게 스트레스나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험담 혹은 모함 등으로 분노 감정을 방출시킨다. 그 사람 앞에서 그의 생각이나 견해를 은근히 비꼰다든지, 공개적인 망신을 주어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를 만드는 행위도 위장분노형에 속한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목회자들에게 적용이 가능한 분노 통제형(Anger Control)이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분노 통제에 대한 건강한 방어기제로 유머, 이타주의, 예상, 억제, 승화 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목회자의 유머 감각은 자신의 분노를 건강하게 통제하면서, 동시에 건강하게 표출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유머는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을 보고도 속으로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이다. 목회자가 설교 후 그날 자신이 그 설교에 대해 만족이 안 되고 부족함을 느꼈다면 수치심과 죄책감의 포로가 되기보다 ‘그럴 수도 있지’ 혹은 ‘내가 항상 설교를 잘할 수는 없는 법이지’하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노를 건강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성경은 분노 통제에 대해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전 7:9) 위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일반적으로 분노는 중립적인 감정이라 할지라도 선보다는 악의 문제를 일으키고, 의보다는 다툼이나 잔인함과 같은 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은 복잡한 감정이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고찰했듯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분노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감정이기에, 분노 표출의 상황에서 목회자는 성경적 분노 통제 원리 (Biblical Anger Control Principle)를 따라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
좋아요 0
스크랩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