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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통치권! 하나님의 나라 활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42    등록일시 : 2008-03-03    인쇄
통치권! 하나님의 나라 활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원고는 미국교회성장학회 저널에 실린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의 「Dominion Theology」 가운데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주>





이론에서 실천으로



신학이 지루하고 따분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전통신학의 상당부분이 실제 현실과 상호작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을 바라보는 태도와 패러다임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신학교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조직신학, 인식론, 교리사와 관련해 철저한 교육을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다. 교회가 이단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얄궂게도 현재 유럽과 북미교회에 가장 악영향을 주는 이단 중에 상당수가 바로 이것을 배운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나는 대부분의 신 사도적 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과 관련된 교회에서 신학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만큼 경외심을 갖는 다른 교회들을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수년전에 시작한 WLI(Wagner Leadership Institute)를 생각해보자. WLI는 이미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준비되었기 때문에, 결정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교과과정 가운데 그 어떤 필수과정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가르치고 있던 성숙한 학생들은 몇 명의 학사운영위원회에서 교과과정을 추측해서 결정하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사역을 개선시키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한 이 새로운 방법의 결과 실제로 드러난 현실 가운데 하나는 만일 우리가 전통적인 신학과목, 예를 들어 조직신학, 인식론 혹은 교리사 같은 것들을 가르쳤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WLI에 등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자들은 제2의 사도 시대(the Second Apostolic Age)가 발전함에 따라 신학이 과거의 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에서 사제의 직무와 개신교 일치라는 과목이 졸업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사도적 교회의 리더들은 과거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엄청난 양의 교리적인 짐을 지고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학자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와 함께 언급되지 않다. 하지만 신학자가 언급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건전한 신학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학이란?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는 여기에 신학에 대해 정의를 시도해본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을 조리 있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의 정의는 아니다. 먼저,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을 신학 자료의 확실한 원천으로 간주한다. 다음으로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로고스)과 하나님께서 현재 계시하시는 말씀(레마) 둘 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확실히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신학의 이러한 방식은 자기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에서 위를 향한 신학, 즉 성령께서 교회에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의 관점에서 본 신학은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교사들은 ‘로고스’(logos)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예언자는 ‘레마’(rhema)를 가져다 준다. 사도들은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미래 방향을 제시한다.



통치 신학(Dominion Theology)



사회 변혁의 기초를 가장 잘 세울 수 있는 실천 신학은 통치 신학(Dominion Theology)이다. 때로 통치 신학을 ‘현재 하나님의 나라’(Kingdom now)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치 신학의 역사는 러시두니(R.J Rushdoony)를 관통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에서 존 칼빈(John Calvin)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신학을 현재에 적용하려는 개척자적인 시도는 밥 바이너(Bob Weiner), 라이스 브룩스(Rice Brooks), 데니스 키칵(Dennis Peacocke) 등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통치 신학’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사실 많은 친구들이 내가 ‘통치’(Dominion)라는 단어를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수차레 설득했었다. 이 단어 때문에 책의 전체 내용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나는 사람들이 통치신학을 거부하는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통치 신학을 반대하는 한 가지 입장은 통치 신학이 문화명령(Cultural Mandate)보다 전도 명령(Evangelistic Mandate)을 우선시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대한 반대이다.

통치 신학을 거부하는 두 번째 견해는 종말(end times)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치 신학은 종말론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손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소위 ‘전수난설(pre-trib), 전천년설’로 교육을 받았다. 나는 스코필드 성경을 어릴 적부터 배웠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마지막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으로 들림받아 올라갈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던 윌버 스미스(Wilbur M. Smith)와 같은 분들 앞에 앉아서 배웠다.

그리고 거기에 남겨진 자들은 7년 환난을 겪게 될 것이고 그 기간에 적그리스도는 세상을 주관하고 예수께서는 백마를 타시고 돌아오셔서 천년동안(천년왕국) 우리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소망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과감한 사회 변혁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신다고 한다면 종말론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 도달하게 될 것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계속 더 악해져갈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회를 변혁시켜서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짐 하지스(Jim Hodges)의 견해,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구를 떠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없애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나는 종종 농담하듯이 내가 전천년설을 믿는지, 후천년설을 믿는지, 혹은 무천년설을 믿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인 마지막에는 그 결과가 잘될 것이라는 범천년설(panmillenial)자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은 최근까지 나는 내가 알지 못하였던 종말론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남겨진 자의 미래적 관점(Left Behind futurist)이다. 그렇지만 내가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헤롤드 어벌(Harold Eberle)과 마틴 트렌치(Martin Trench)의 「승리의 종말론」(Victorious Eschatology)을 읽으며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어벌과 트렌치는 말한다, “예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교회는 영광과 연합 그리고 성숙함 속에서 일어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 땅에 가득 찰 때까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승리의 종말론은 종말 혹은 끝에 관한 성서적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성취되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종말의 때는 구약의 끝맺음과 신약의 출발을 의미한다. 문자적으로 예수님은 장차 지상으로 돌아오실 것이다(마 24:35-25:46). 하지만 마태복음 24장 4-34절에 나오는 징조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보다 선행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징조들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 전문가들에게 종말론의 부분적 과거시제(Partial Preterist view of eschatology)라는 견해로서 알려져 있다.



경계를 넘어서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엄격한 전통적 교리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성회와 같은 교단에서는 전천년설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따라서 통치 신학을 반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 문서에는 통치 신학을 ‘비정상적 가르침으로 교단 총회에서 동의할 수 없는것’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는 존 스토트(John Stott)는 로잔 협약(Lausanne Covenant)의 논평에서 “교회의 기대와 소망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야만 하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적 번영의 조건들, 국제 평화, 사회 정의, 정치적 자유 그리고 개인의 자아성취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어떠한 기대도 주시지 않으셨다… 이렇게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에 따른 기독교인의 소망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통치 신학의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세 번째 의견을 말해야 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 문제는 통치 신학의 일반적 주장에 장애물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통치 신학의 대변자들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심각한 도덕적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문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결론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협회의 불미스러운 문제 때문에 통치 신학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다.



새시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통치 신학의 거친 물줄기는 때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지금 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확신한다. 성장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더 이상 하나님의 가치를 따라 사회를 변혁시키는 도전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앞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치 신학’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확인해주고 되찾아 와야 한다. 통치 신학을 가장 잘 대체 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 신학’(Kingdom Theology)이다. 하나님의 나라 신학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통치 신학이 더 강하고 활동 지향적이고 급진적이며 성경적으로 이해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목회(pastoral)를 함축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통치 신학은 사도적인(apostolic) 부분에 더욱 가깝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 신학이 통치 신학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여전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되어야 한다.



창세기 1장



통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성경의 첫 번째 장에서 시작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들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dominion) 하자”(창 1:26)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통치 신학이 하나님의 나라 신학보다 더 성경적으로 이해할만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의 주제인 반면에 통치권(Dominion)은 구약과 신약 모두의 주제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all the creation)을 다스리라(dominion)”하시니라(창 1:28). 우리는 이 말씀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상에 인간, 즉 아담과 하와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세우신 정부를 설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분의 이름 안에 있는 통치권을 사용할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주셨다. 그들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유로운 대리인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그들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권위를 넘겨줘 버리고 만다.

우리는 창세기의 내용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창세기 2장은 통치권을 언급하지 않고 창조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등장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통치권에 대해서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실수이다. 사탄은 본질적으로 그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탄이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고자 원죄를 가져왔고, 그로 말미암아 유전적으로 원죄는 인간의 모든 후손에게 세대를 걸쳐서 전해 내려오고 결국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 것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믿고 있다. 그것이 사단의 목표 중에 하나였음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사단의 더 큰 목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세상에 대한 통치권을 찬탈하는 것이었다.

권력과 권위



사단 혹은 루시퍼는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에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으로 불렸다. 그의 큰 실수는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사14:13)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권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14:14)고 하였다. 그는 결국 쫓겨났다. 그가 쫓겨날 때 그는 자신의 권력(power)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권위(authority)는 빼앗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통치권(dominion)에 대한 권위(authority)를 자유 의지와 함께 아담에게 위임하셨을 때 사단은 그가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을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권위를 주시지 않으시려 하셨지만 아담은 권위를 넘겨줄 수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권위를 주셔서 그가 그의 권위를 사단에게 넘겨주게 하였다. 이는 우리가 시험과 타락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대해 상당히 다른 시야를 보여주고 있다.

선악과(apple)는 단순히 아담의 선택에 대한 눈으로 보여 지는 상징인 것이다.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사단의 길로 갈 것인가? 사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순종하라고 납득시켰을 때, 역사는 갑자기 바뀌었다. 아담의 권위,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에 대한 통치권(dominion)이 사단에게 넘겨진 것이다. 더군다나 아담은 그 자신과 전체 인류의 미래 또한 사단의 권위 아래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빨 빠진 사자?



인류의 역사에서 사단과 그의 통치에 대한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을 생각해보자.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이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이요, ‘이 세상 임금’(요 14:30)이다. 사단의 이 놀라운 직함들을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사단의 능력을 깔보며 그를 ‘이빨 빠진 사자’라고 부르는 설교자들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적을 이기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그 적이 누구인지 현실적인 평가해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인류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해보자.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불법, 잔악행위, 피흘림, 억압, 부도덕, 우상숭배, 주술, 전쟁 그리고 병들을 생각해보자. 볼리비아의 정글에 살았던 아요레 인디언(Ayore Indian)들의 어머니들은 자신이 낳은 첫 번째 아이를 산채로 땅에 묻어야 했다. 아즈텍의 제단을 생각해보라. 그 제단에서 처녀들은 자신들의 신선한 피로 시내를 이루어야 했다. 물론 욥, 노아, 회개한 니느웨,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던 일정한 기간의 예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외들은 극히 소수였고 인류의 대부분이 사단이 아담에게서 찬탈한 권위 아래 놓여있었다. 거기에는 이빨 빠진 사자는 없었다.

바울의 인간에 대한 견해는 매우 현실적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예수님의 시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사단이 지상에 대한 진정한 통치권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다는 것에 대해 혹시라도 남아있는 의심을 제거해 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세 가지 시험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가정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시험들은 문자적으로 일어난 일이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도 있었다. 물론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 시험 가운데 세 번째의 시험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 4:8). 얼마나 많은 국가를 말하고 있는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다. 그리고 사단은 말하기를,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고 말하고 있다.

만일 이 시험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면, 사단이 위와 같은 제안을 하려면 실제로 모든 국가들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이 시험에 넘어가지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단이 가지고 있던 천하만국에 대한 권위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셨다.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에덴동산의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하여 갑자기 바뀌게 된다. 역사는 이처럼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갑자기 다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는 말하는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크리스천 리더들이 필자가 옹호하는 통치 신학으로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통치 신학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한 말씀을 우리는 상당히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예를 들어, 빌리 그래이엄의 설교와 같은 대부분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목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화목시키셨다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를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 부른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고 거듭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 주신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어떠한 것들이라도 천국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드리기로 회심한 날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사도적 차원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조셉 마타라(Joseph Matter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중요한 목적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여러분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신 주된 목적은 그렇게 하심으로 당신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이 땅위에 사용할 수 있게 하고(눅 17:21) 세상이 주님께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마타라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목회적 차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통치권(Dominion)이다.



사단의 사역(the works of Devil)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보내셔서 아담이 실패한 일을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정결함과 순종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아담이 잃어버린 통치권을 사단에게서 되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춘 인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사단의 주된 일은 사단이 첫째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 전체에 행해 온 악하고 포악한 통치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를 최종적으로 뒤집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 살펴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이것이 어떻게 실제 삶속에서 일어나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이것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라온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헌신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은 사회의 변혁을 위한 명령이다.



잃어버렸던 것



성경에 예수님 고유의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되어있는지 보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For the Son of man is come to seek and to save that which was lost: KJV 눅19:10). 이 말씀에 대한 전통적인 목회적 관점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던 ‘사람들’(those)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지, 잃어버렸던 ‘것’(which was lost)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렇지만 이 특정 구절은 개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피조물에 대해 잃어버린 통치권을 언급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와 관련해 에드 실보소(Ed Silvoso)가 설명하는 방법을 좋아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제한된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 한 가지 죄를 가지고 피조물 모두를 오염시켰다는 것을 믿는 데는 별로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이신-께서 완전한 제물을 통해서 ‘잃어버린 것’ 모두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그분이 시험받으신 직후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공생애 사역에서 하신 첫 번째 일중 하나는 그분의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신 일이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의 의제를 펼쳐놓으셨다. 이사야서를 인용하신 말씀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이는 확실히 복음전파의 명령과 문화명령이 섞여있는 말씀이다.



식민지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마일즈 먼로(Myles Monroe)는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가 식민지화라고 알고 있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식민지화는 정부 혹은 통치자가 그의 왕국, 통치권, 혹은 영향력을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통치하고자 확장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늘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통치권을 확장시키시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 땅을 창조하셨다. 이 땅은 하늘의 식민지였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왕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담에게서 출발한 인간에게 이 식민지의 총독이 되도록 위임하셨다. 보이는 땅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국의 본성과 근원을 반영하도록 만들어졌었다.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언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가 그때부터 완전히 실현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아담은 하늘의 식민지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제자리를 찾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하셨다. 예수님을 그분의 사역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하는 책임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셨다.

스티브 톰슨(Steve Thomson)은 “이 땅의 권위를 되찾아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의 일들을 통치하시고 중재하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제 이 땅의 통치와 다스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그 책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수동적인 모습에서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은 만일 자신들이 사회적 변혁을 위해 충분히 기도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회를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권위와, 자원, 그분의 계시를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 사단으로부터 통치권을 되찾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한 가지는 우리의 마지막 목표를 개인의 구원에서 사회의 구원으로 바꾸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조 우다드(Joe Woodard)는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dson Hunter)와 척 콜슨(Church Colson)사이에 있었던 흥미로운 논쟁에 대해 보도하였다.

콜슨은 개개인에 대한 근본적 접근을 선호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변화된 사람들은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다’는 가정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반면 헌터의 접근 방식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라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조직을 결정하는 엘리트 집단이 변화하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할 때에만 바뀐다고 말한다. 헌터에 의하면 사회를 변혁시키는 가장 좋은 전략은 문화를 형성하는 조직들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전체 사회의 조직들이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마 28:19)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이유는 대위임령을 전공한 선교학자로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개인적인 전도 접근방법을 옹호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족속”(영어로는 나라 즉 nations로 번역되어 있다. 역자 주)을 사회 구성단위로서 해석하기를 거부했었다. 비록 그 문장의 문자적 번역은 panta ta ethne (모든 족속에게: 역자 주)이기는 하다. 나는 과거에 척 콜슨이 가정한 개인적인 접근법에 기울어 있었다. ‘ethne’(이 단어로부터 우리는 종족 그룹(ethnic groups)이라는 용어를 가져왔다)라는 용어가 사회적 단위로서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각의 종족들(ethnos)로부터 충분히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세례를 주고, 그들을 지역교회에 등록시키면, 변화된 그들은 변화에 필요한 빛과 소금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날드 맥가브란은 언제나 대위임령을 사회의 전체 단위를 변화시키는 명령으로 해석했다. 맥가브란은 말하기를 “대위임령에 따르면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소극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다신론, 우상숭배, 물신숭배 혹은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에 대한 전체적인 충성을 버릴 때에 제자화가 된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개개인이 주와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알고 자신들이 그분의 교회의 구성원임을 믿으며 그들의 가족은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의 책은 성경이고, 그들의 예배장소는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제자화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 주변의 사회적 조직(social organism)을 재교육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부족들과 다른 종족의 변화들을 이끌어 오게 될 것이다.”

풀러신학교 도날드 맥가브란 교수직의 최초 수여자로서 나는 당시 고의로 맥가브란 수정주의자가 되었다. 천국에 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는 맥가브란을 찾아 사과하는 것이다! 맥가브란은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통치권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에 동의한다.

사도행전 3장 21절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회복(Restration)은 변혁을 의미한다. 이 회복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역사를 바꾸셨지만,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맡은 부분을 수행하여 회복을 실제 삶 가운데 일으키기를 기다라고 계신다. 그분은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4-25)”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통치하고 계신다.

우리의 임무는 사단의 통치권이 끝날 때까지 영적, 사회적 행동가로 활동하는 것이다.

번역 김대학 실장(교회성장연구소, jokdh@hanmail.net)



참고문헌

1. Notes taken from an address by Jim Hodges at “Starting the Year Off Right”

2. Harold R. Eberle and Martin Trench, Victories Eschatology (Yakima WA: Worldcast Publishing, 2006),p.1

3. General Presbytery of the Assemblies of God, “Endtime Revival-Spirit-Led and Spirit-Controlled: A Response to Resolution 16,” August,2000.

4. John Stott, The Lausanne Covenant: An Expositiojn and Commentary, Lausanne Occasional Papers, No.3 (Wheaton IL: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1975),p.36.

5. Joseph Mattera, Ruling in the Gates (Lake Mary FL:Creation house Press,2003),p.5.

6. Ed Silvoso, “Evangelism,” Charisma, September 2004,p.49.

7. Myles Monroe, Rediscovering the Kingdom (Shippensburg PA: Destiny Image, 2004),p.26.

8. Steve Thompson, “Your Authority in Christ,” The Morning Star Journal, Summer 2006,p.22.

9. Joe Woodard, “Solving the secular paradox: How can Christians influence world culture?” Calgary Herald, June 19, 2005,p .B7.

10. Donald Anderson McGavran, The Bridges of God: A Study in the Strategy of Missions (New York NY: Friendship Press, 1981,p.14.





피터와그너(Peter Wagner)

피터 와그너는 이문화간 연구, 교회성장, 기도와 영적전재의 영역에 있어서 수많은 책을 쓴 학자이다. 피터 와그너는 현재 와그너 리더십 인스티튜트의 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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