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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원의 영성 실활중계]대학연합교회 김형민 목사와 4차원의 영성(3)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65    등록일시 : 2007-09-30    인쇄
대학연합교회 김형민 목사와 4차원의 영성(3)



김형민 목사는 월드비전교회(구 서울중앙침례교회) 오영택 목사의 사모이시며,
대학연합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많은 청년·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자립하여 지금은 중형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형민 목사는 인격적인 성령사역으로,
특별히 4차원 영성의 원리를 목회에 적용하여 교회성장을 일구어냈다.
본 4차원의 영성 실황중계는 4차원의 영성 골드회원 모임에서
김형민 목사가 목회 사례의 경험을 중심으로 4차원 영성의 원리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어떻게 접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례 발표를 보도한다. - 편집자 주


9월호 요약
캠퍼스 사역에의 비전을 품고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건대에 뛰어들은 김형민 목사. 숱한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건대에 교회를 세웠지만, 결국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헌신과 후원자들의 기부로 마침내 다시 건대 앞에 대학연합교회를 개척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4차원의 영성으로 성령의 역사를 실현해 가는데…


4차원의 영성 하나님의 코드에 맞춰라
지금까지 저는 하나님 앞에 능력을 추구하는 은사 사역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 하나가 말씀을 듣다가 나가는 겁니다. 제가 어디 가냐고 하니까, 코드가 안 맞기에 다른 교회에 가려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코드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통성기도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는 자기에게 안 맞는다는 겁니다. 저는 속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코드를 맞춰야하겠냐 네가 하나님 코드에 맞춰야겠냐’ 하고 반문했습니다.
코드가 안 맞는다고 교회를 나서는 그 학생에게 저는 명령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열왕기상 13장에 있는 그대로 그 학생이 땅바닥에 발이 붙어서 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지난주에도 있었습니다.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던 경희대 학생 하나가 그냥 주보를 보고 수요예배에 찾아왔다가 수업도 못가고 10시까지 있었습니다. 총장님도, 교수님들도 참석한 가운데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에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 하셨습니다. 총장님이 그 학생에게 왜 울고 있냐고 하니까 그 학생은 발이 붙어서 수업에 못 갔다고 하는 겁니다. 발이 붙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일이 이 시대에 젊은이들을 교회에 붙들어 두고 하나님께 붙들어 두려는 하나님의 애잔한 뜻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선지자의 영성과 같은 모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서울대학교의 수학과 교수님과 서강대의 이광성 교수님, 국민대 김상철 교수님, 경희대 전영일 교수님들로 시작해서 교수 신우회 회장 정환영 교수님 등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적이 일어나 다리가 붙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예배와 관계되어서 좋아하지 않는 코드가 있습니다. 어떤 코드냐면, 설교할 때 눈감고 있는 사람과 기도할 때 돌아다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예배모습입니다. 라스포사에서 일하시던 임태성 변호사님이 있는데, 그분의 사촌동생이 우리교회에 왔었습니다. 그렇게 전도해도 말을 안 듣던 사촌동생분이 마침 이화여대에서 집회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다 기도할 때 이 분은 돌아다니면서 훼방을 놓는 겁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분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장님이 될지어다”라고 선포했더니 갑자기 그 분의 눈에 까만 눈동자가 없어지고 흰 눈동자만 있는 상태에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분이 제 치마를 붙잡고 “목사님 제가 지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제발 제 눈 좀 뜨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하기에 기도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서초동 어린이집에 잠깐 들렸을 때, 한 부인이 “목사님 저를 기억하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이대에서 집회할 때 장님 되었던 사람 부인이 저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남편분이 잘 계신지 여쭤보았더니, 지금 전도사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행할 때, First Best를 뒤로하고 Second Best를 앞세우면 안 됩니다. 개신교가 자꾸 카톨릭화되어 가는 모습들이 가끔 보입니다. First Best는 무엇이고 Second Best는 무엇입니까? 복음 사역에 있어서 First Best는 성령의 역사,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적 상황이 바뀌었다는 이유를 대며 First Best보다는 삶의 모습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 인격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기초로 깔고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천국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고, 성령의 역사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시로 무차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깨끗한지, 내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한지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자체의 힘을 믿고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며 사역에 나서는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난 번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집회에서 집회 후에 선교학 교수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교수님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중국에 선교 역사를 살펴 볼 때, 쌀을 주면서 사역했던 Rice Mission의 때는 중국의 교회가 완전히 침체된 시기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문화혁명, 공산혁명 일어날 때 쌀 받아먹었던 사람들은 다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 이후 기독교인들이 숙청당하는 위기의 시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은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이 각 마을에 들어가서 “오늘 밤 하루만 나를 재워주시오”라고 요청을 하면, 마음 좋은 분들은 그들을 숨겨주고 재워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이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재워준 마을 분들이 너무나 고마워서 이 마을에 병이 있는 사람을 다 데려오라고 하였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따라 아픈 사람들을 모아주었는데, 이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더니 그 중에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복음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적어도 다섯 명만 되면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돌이켜보면 거기는 제자훈련을 할 시간도 없고 기독교교육을 할 여유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4차원의 영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러분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성령님만 부르면 다 이 역사가 나타납니다”라고 말하고는 옆 마을로 계속 이동했다고 합니다. 당시 서구 신학자들은 실제적으로 중국의 선교의 역사는 끝났다고 선포했는데, 1990년대 뚜껑을 열어보니까 실제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1억이 넘어가 있었습니다.

성령 사역을 평신도 리더들과 함께 하라
구역장들이 뛰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목양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신기하게도 자신에게 맡겨진 목양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뛰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훨씬 더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자 목회는 제자 훈련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 양을 먹이라”고 한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그런데 양을 치려면 양이 있어야 합니다. 양은 전도를 통해서 생기게 됩니다. 전도를 해야 양이 생기고, 양이 생겨야 자기 양이 있고, 양이 있어야 먹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역장들이 있어야 양을 먹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목회자가 모든 사역을 다 해버리면 평신도 리더들이 설 곳이 없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다 하는 목회자는 쉽게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평신도에게 준 것을 제1종교개혁이라고 한다면, 저는 제2종교개혁은 목회자가 평신도 사역자에게 목양을 철저하게 위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수요예배를 평신도 리더들과 함께 진행하는 예배로 드립니다. 누가 주도적으로 이끄든지 변하지 않는 중심은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단 위에 사도행전이라는 무대를 깔아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강단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성령의 권세와 역사를 설교로 풀어가려 하지 말고 예배 자체 안에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어마어마하게 부흥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목회자인 제가 중심이 되어 예배를 인도하고 성령세례를 위한 중보기도사역을 했지만 3주부터는 평신도 리더들을 중보기도사역자로 훈련시켰습니다. 만일 저만 성령 사역을 했다면 이토록 부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신보다 더 큰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사역이 제자들에게 까지 미쳐서 우리들과 똑같이 할 수 있어야 사역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예배를 드릴 때 성령세례를 받도록 중보기도를 하는 시간에 몇몇 사람만 강단에 올라옵니다. 나머지는 평신도 리더들인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성령세례를 위해 중보기도해 줍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앞에서 붙들고 기도해 줄 때 기도 받은 학생들이 다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특정인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구가 된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영적인 사역에서 오늘날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적인 4차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가지 영체가 있습니다. 하나님, 천사, 마귀,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체로서 하나님이 본체이시고 우리는 데생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적 특성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인격적인 면에서, 하나는 능력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면에서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나타나므로 4차원의 역사는 인격적인 면에서나 능력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말씀으로 영글어지는 사역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한번은 대구에서 고신 측 목사님들이 모인 곳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담이 많이 되었지만, 성령이 도와주셔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상치 못하게도 집회가 끝난 후 집회에 참석하신 목사님들이 저에게 대화를 요청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역사가 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런 역사가 나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두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경우의 체면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유혹 받는 것이 ‘안되면 어떻하지? 잘못되면 어떻하지?’라는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선포했다가 역사가 안 일어날까봐 주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만이 진심으로 마음에 부딪혀 와야 합니다. 이것에 목회자가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냥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성령 사역을 해 오면서 한 번도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주의 종을 망신시키는 적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목적이 찬양하기 위해서 만드셨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세워진 목적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높여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요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히브리적 개념입니다. 신약에서 헬레니즘의 영향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법이 오늘날 설교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예배에 지식적인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예배는 구약에서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임재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신약에서 예배 중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체험이 아닙니까?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성령을 통해 체험된 예수입니다.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힐송의 달린첵 내외 분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달린첵과 대화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찬양을 잘 인도하는 사람이 많고, 인물로 봐도 더 좋은 사람이 많은데, 왜 달린첵이 찬양인도 한다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모여들고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저도 집회에 참석해 보았는데,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에 눈물이 났습니다. 청년들 소리 때문에 노래 소리도 안 들리고, 춤추며 뛰는 통에 먼지가 나서 기침도 났지만 아이들이 하나님, 예수님 때문에 뛰고 찬양하는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주님 때문에 뛰는 것이 너무 고맙고, 흥분된 모습을 보니까 대한민국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엿장수가 가위질 몇 번 하는 것은 엿장수 맘이잖아요. 달린첵과 대화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쓰고 싶은 사람을 쓰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더 감격스러운 것은 달린첵의 사역 자세였습니다. 그분들은 그 레이더가 철저히 하나님, 성령님께로 가 있더라구요. 그분은 철저하게 생각 속에 무시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조차도 성령을 신뢰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달린첵의 모습을 봤습니다.
이런 분이 찬양을 할 때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데, 왜 그럴까요? 왜 기름 부으심이 넘칠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에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영적인 원리를 아십니까? 기도를 꼭 많이 하고 금식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자리에는 반드시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예배에서 제일 중요하고 여러분들의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체험입니다. 성령님은 증거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증거하겠다는 애통한 마음,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표적은 나타납니다. 사역의 방법만을 쫓아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3차원입니다.

교회성장의 영성은 현장 영성
지난번에 플러에 가서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때 우리나라 교회성장학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풀러의 유명한 교회성장학자들은 이론에 강할지는 모르지만 현장이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교회성장을 이루는 데는 현장 영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또 제자들의 사역 역시 현장 실습이지 않습니까? 풀러에서 교회성장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연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은 교회성장은 방법이 아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교회성장의 주축은 결국 사람입니다. 어떤 교회는 셀이다, 알파다, 뭐로 한다 그러지만 그건 다 외면상 보이는 것일 뿐이지 핵심요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시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교회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면 여러분이 셀을 하든, 알파를 하든 심지어 설교를 죽을 쑤어도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뒤집은 것이 칼로한 것입니까? 오직 성령이었습니다. 방법은 3차원인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새벽 2시에 일어났는데, 개미가 있기에 불쌍해서 밥통을 열고 밥풀 하나를 주었습니다. 개미는 신나서 그것을 들고 움직이는데 그 개미는 제가 너무 커서 안 보이는 겁니다. 그 개미가 원하면 저는 밥통채로 줄 수도 있는데, 개미는 코앞의 것만을 볼 수 있었지 더 큰 세계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3차원 아니겠습니까?
초기교회의 주축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양육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있어서 갈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자 그들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두나미스! 다이나마이트! 권능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장 영성이 불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친 말씀들이 속에서부터 체험되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4차원의 영성은 당연한 것
얼마 전에 빌립 존슨의 책을 읽었는데, ‘정상적 기독교’, ‘비정상적 기독교’에 대한 통찰을 얻었습니다. 4차원의 영성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 원리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4차원의 영성은 평범한 것입니다. 초기교회에게 4차원의 영성은 지극히 정상적인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피하는 것이 비정상이었습니다.
설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제로 안보여주는 것이 비정상적인 기독교입니다.
정상적인 기독교에게 4차원의 영성은 너무나도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 이상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의 성령의 역사는 부인하고 과거의 성령에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는 지난 일로 말합니다. “2,00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찰스 피니가 설교하면 사람들이 변화되어 뜨거워졌다”, “무디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라고 말합니다.
4차원의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도 전인적인 면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는 선교 사역에서도, 제자 사역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현장입니다. 제자 사역도, 선교 사역도 책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체험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현장이 없는 교회, 현장이 없는 영성 저는 이것이 비정상적이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한손은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의 손을 붙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손으로 화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나타내려는데 있었습니다. 제사장인 여러분도 하나님의 마음과 여러분이 맡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사무쳐 올 때 4차원의 영성은 쉬운 겁니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4차원의 영성이 방법으로 갈까 두렵습니다. 물론, 하박국서 3장에 나오는 역사나 구체적인 방법론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4차원의 영성은 방법이라기보다는 원리에 가깝습니다. 여러분 이 4차원의 영성으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매주 강대상에서 설교만 하고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사도행전을 강단에 올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설교 몇 편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설교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창조성이 있습니다. 역동성이 있습니다. 확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창조적 역사, 역동적 역사, 확장적인 역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형민 목사
미 사우스웨스트대 졸(Southwest Baptist University)
미 골든게이트 침례신학대학원 졸(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CTS 기독교 TV ′김형민 목사의 샤인영성′ 방송
COG(Camp of God) 대표
대학연합교회 담임목사
저서
「사도행전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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