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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운동 21세기]21세기 건강한 성령운동을 위한 신비적 은사의 이해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66    등록일시 : 2005-02-24    인쇄
21세기 건강한 성령운동을 위한 신비적 은사의 이해


김민정 박사 | 한세대, minjung3535@hanmail.net


지난 20세기는 성령운동의 본격적인 시작과 다양한 성령사역들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러나 강력한 성령운동은 강한 은혜와 변화만큼이나 혹독한 비판을 받는 빛과 그림자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성령운동이 지역교회 안에서 건강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이후에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제3의 물결은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성령사역을 양성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는 교단적 특성을 뛰어넘어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이 활성화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사역은 지역교회 안에서 온전히 자리매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은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가 가지고 있는 성격과 은사사역을 위한 원칙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귀하고 값진 선물인 은사를 좀더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지역교회에 정착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특별히 신비적 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려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성격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하나가 성령사역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교회’에 대한 이해이고 또 하나가 성령사역의 주체가 되는 ‘은사’에 대한 이해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섬김이 교회 안에서 잘 정착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의 하나는 교회가 가진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자동차라고 한다면, 성령의 사역은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방법일 것이고, 교회는 내가 운전하고 가는 도로의 상황과 운전자가 지켜야 할 규칙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신호등과 차선이 있는 도로와 같이 최소한의 규칙과 원칙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은사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차선들을 무단으로 넘나들며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원칙을 이해하는 것이 건강한 성령사역의 기초가 될 것이다.

(1) 교회는 그 리더십의 구조상 목회자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는 목회자의 인격과 실력, 목회의 방향과 목회 철학에 따라 그 교회의 특성이 특징지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교회가 아닌 단체에서는 그 비전이나 사명을 중심으로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지만,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 목회자의 지도력에 순종하면서 동행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지역교회는 목회자의 다스림의 권위가 손상받지 않고 잘 유지되어야 안정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은사사역자가 또 다른 리더십을 형성하거나 그 방향성을 저해하는 경우, 다스림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경우에 문제가 생기는데, 이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단편적 사안에 대한 중요성만을 부각시켜 위기를 몰고 오는 오류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의 구조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은사를 올바로 사용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2) 교회는 성격상 공동체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는 개인적인 과도한 헌신보다는 공동체적인 연합의 헌신이 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될 수 있다. 한두 사람의 탁월함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전체적인 공동체가 건강한가 하는 부분이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은사사역의 활용에 있어 개인의 유익보다 항상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확신조차도 없는 사람에서 목회자의 길을 소원하는 헌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특수성을 너무 강조하지 않으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은사는 매우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중심성과 상충될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적 유익이라는 목적성을 온전하게 이해해서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교회는 지역사회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 공동체는 지역적인 특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기도원이나 선교단체는 일정한 목적과 지향하는 비전에 따라, 필요로 하는 기능에 따라 그 지역성을 넘나들 수 있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한시적으로 함께하거나, 혹은 같은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특별히 헌신되고 동의된 사람들만이 지속적으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일치성 하나만으로 여러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예배 공동체로 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결국 지역이 갖는 포괄적 유사성을 제외한다면 지역사회 중심적이라고 하는 교회의 성격은 구성원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령사역이라고 하는 독특성만을 추구해서는 다양한 구성원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령사역 또한 다양성의 특질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4) 교회는 보편화의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은 다양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 교회는 오히려 보편적 특성을 일반적으로 가지게 된다. 너무 특성화되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없다면 그것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역교회는 일반화된 보편성을 반드시 가져야 하며 성령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서 은사사역으로만 부각되어서는 교회적 특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늘 주지하여야 한다. 은사사역은 교회의 여러 사역 중에 하나의 사역이고 교회가 끼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여러 가지 방편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은사사역조차도 여러 가지 다양한 성도들의 은혜를 추구하는 성향의 한 일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하나에 대한 획일화된 반응을 요구하게 되고, 어느 하나만이 올바른 것이라는 편향성을 띠게 되어 오히려 중요한 교회의 공동체성을 손상시키는 어리석음을 낳게 되는 것이다.

(5) 교회는 전도 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성장시키겠다고 하는 다소간의 집단이기적인 성향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교회는 성장해야 하며 그 성장은 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이뤄져야 한다.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은사사역을 할 경우에 많은 경우 기적을 위한 사역이 되고 복음과 무관한 사역으로 변질되는 것은 이러한 교회적 특성을 그 원칙으로 견고하게 세우고 있지 못해서이다.
성령사역의 결과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 병행되어 영적인 구원과 실제적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교회 공동체는 사람을 얻기 위한 곳이지 잃어서는 안되는 곳이므로 은사를 통해 사람을 잃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 은사는 교회 내에서 스스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은사에 대한 이해

대부분의 교회들은 적극적인 성령운동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안정적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은사를 통한 부작용을 너무 많이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교통사고가 무서워서 운전을 아예 하지 않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칼이 손에 베인다고 해서 모든 칼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대안은 운전하는 방법을 배우고, 칼을 다루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은사사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이해한다면 그것을 교회 안에서 다스릴 수 있고, 그 왜곡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1) 은사는 분리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은사는 말씀과 달리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경험, 체험을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받은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경험 자체가 분리주의적 결과를 가져오는 시발점이 된다. 즉, 본 사람과 못본 사람, 한 사람과 못한 사람,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 사이의 분리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경험의 경계선은 자연스럽게 신앙 수준의 상하개념으로 잘못 발전되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분리주의가 지향하는 악한 성향은 영적 우월감의 조성이라는 결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은사적 개념을 포괄적 개념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즉 신비적 은사만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풍토를 전환시켜 섬기는 은사가 값진 것이라는 것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영적 우월성은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함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은사는 교회와 성도 즉,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 성숙의 표증이 아니라는 분명한 의식을 심어준다면 신비적 경험으로부터 시작되는 분리주의적 우월의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2) 은사는 주관적이며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의 많은 은사사역을 했던 사역자들이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은사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별적 경험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었다. 은사를 객관화 시키고, 보편화시키려고 할 때 늘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은사는 주관적 깨달음과 더불어서 사역을 하게 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모두에게 적용시키려 하거나 모두가 동일한 것을 경험케 하려 할 때 무리가 온다.
결국 개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항상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일어난다는 사실과 그 성격 자체가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역으로 개별적 체험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체험은 공동체적 결론으로 강요될 수 없음을 늘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체험한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지만, 또한 그 체험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음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성격을 가진 은사가 공동체적인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나 과정, 결과가 성경적 원칙에 잘 부합하고 있는가를 통해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감정적 기복이 극단적으로 이뤄지는 주관적 경험은 공동체적 유익을 위해 신뢰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3) 은사는 신적 동일시 현상이 빈번히 일어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은사가 가지고 있는 특성 가운데 그 왜곡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특성이 미성숙한 자에게도 부여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통로적 역할을 하는 사역자가 견고하고 성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은 빈번히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비인격적 태도, 혹은 교만한 태도이다. 이러한 경우는 초자연적 깨달음이나 초자연적 현상에 몰입하여 자신 또한 연약한 자이고, 죄인임을 망각하게 됨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의 궁극적 오류는 능력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사역자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도구적 역할이라는 근본적 성령 사역의 구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일시하게 되는 감정적 전이를 막기 위해서는 성령 사역자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를 확고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사역자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는 수돗물을 흘려보내는 수도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하는 극히 예외적 현상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윤리를 초월하는 현상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시면서 긍휼함을 인해 기적을 베푸시지만, 그 기적을 근거로 윤리를 초월하지는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은사의 수여와 보존의 책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은사의 수여, 즉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나 받은 은사를 보존하고 잘 사용하는 책임은 사역자 자신에게 있다. 절대로 성령사역에서의 원동력은 하나님 이외에서 출발 할 수 없다. 우리가 종종 혼돈하는 것은 은사도 훈련이 가능하냐에 대한 논란인데, 이는 은사의 수여와 그 이후 사역의 방법에 대한 부분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논란이다. 은사의 원천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로 사역하기 위해 경험을 쌓고 지식을 쌓고 훈련을 쌓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령사역에는 교육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성령사역이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는 것,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신비한 은사와 같은 성령사역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일은 사역을 올바로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령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데는 매우 능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고 선하게 활용하는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은 미흡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이론적 토대와 경험적 토대를 겸한 균형잡힌 지도자를 교육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겠다.

나가며

21세기는 한국교회가 다양한 영역에서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 기대되는 시대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두워지기만 하는 것 같은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더욱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성령운동은 시대적 아픔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종교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성령운동의 그늘을 건강한 사역으로 전환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리라 본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역이 음성화되고 부정적으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역으로 건전하게 양성화된다면 새로운 성령사역의 장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민정 박사
한세대학교 실천신학 Th.M
한세대학교 선교신학 Ph.D
한세대학교 강사
분당우리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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