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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초기 한국기독교와 부흥운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72
등록일시 : 200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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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기독교와 부흥운동
- 1904년 서울지역 감리교 연합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 현재 한국교회는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특히 1907년 평양 대부흥집회의 100주년이 다가옴에 따라 그런 열망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교계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교파간, 지역간 연합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 일궈낸 부흥운동은 갈등과 분열의 운동이 아니라 연합과 상생의 운동이었으며, 개인의 공개 회개를 촉진시켜 체험적 신앙과 생활의 변화를 일으킨 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치사회적인 운동이었고, 나아가서 민족구원과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거시적 운동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을 원한다면 한국기독교의 초기 부흥운동이 주는 교훈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오랜 기간 선교와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노종해 목사가 초기 한국기독교의 부흥운동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문헌연구를 통해 그 부흥운동이 주는 귀한 진리들을 전달해주고 있다. 노종해 목사 | 말레이시아 선교사, rochai@hanmail.net 1. 머리말 초기 한국기독교의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대부분 1907년의 평양 부흥회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밝혀져 왔으며 이 운동이 한국교회를 비정치화시켜 탈역사적 교회로 전락시키고 내세지향적인 교회를 이루게 하였다고 평가되어 왔다.1) 그러나 부흥운동의 동인이 되었던 하디 목사의 활동을 역사적 자료로 살펴보면 1907년 이전인 1903년 선교사 모임에서 이루어진 부흥운동이 아닌, 1904년 한국감리교 초기 한인목사들에 의해 한국인들 가운데 일어난 최초의 서울 부흥운동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서울 부흥운동은 당시 정치상황에서 민족구국운동의 원동력이 됨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한국 남·북 감리교 연회록」과 「코리아 메소디스트」(1904년) 등 초기 한국기독교 자료를 통해 밝혀 보려 한다. 2. 부흥운동의 발단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게 한 사건은 1903년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1904년에 서울에서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서 일어났고 이후 계속 한국인 사이에 퍼져나가 1906년과 1907년에는 평양지역의 연합부흥운동으로 한국기독교는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한 정치적 충격으로 더욱 확산되었으며 한국기독교를 민족교회로 심화시키는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다. 한국기독교를 변화시킨 부흥운동이 1903년 원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모인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 주간 동안 성경을 연구하며 기도하는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목사는 자신을 깊이 반성해 보며 정말 자기가 지금까지 이룬 결과가 무엇인가를 비교표까지 만들어 가면서 평가하였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놓고 기도하던 중 무엇보다도 “영력”(spiritual power)의 결핍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탄식할 때 “능으로도 안 되며 힘으로도 안 되나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 왔다.2) 한 주간 모임의 마지막 날 중국에서 선교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M.C.White) 양이 성서강해를 할 때 하디 목사는 해답을 얻었다. 즉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으며 지금 그를 통해 아버지의 보내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다”는 말씀이었다.3)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실패 원인을 깨닫게 된 하디 목사는 이 때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그의 영혼과 심정을 사로잡았다. 하디 목사의 체험은 거기 모인 모든 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그 후 각처에서 더욱 힘있게 전도와 봉사의 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3. 1904년 서울지역 부흥운동 하디 목사는 1903년 신앙체험으로 새 힘을 받아 자신의 파송지인 강원도지역에서 간증하며 전도하는 데 몰두하였다. 1904년에 서울지역에 초청받아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는데 이 때 한국인 지도자와 성도들 가운데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죄의 자백과 회개,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을 체험하는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다.4) 1904년 9월 22일부터 10월 9일까지 일어난 서울부흥회에 대해서 당시 「코리아 메소디스트」(The Korea Methodist) 1904년 11월 10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정동제일교회에서 하디가 주관하던 부흥회는 19일간의 집회를 끝내고 10월 9일에 끝났다. 이 부흥회는 본래 정동에 있는 두 남·여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교인들에게도 번져 마침내 서울에 있는 감리교인들이 모두 모여들게 되었다. 성령의 움직임으로 많은 이들이 공중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 지적인 회심밖에 몰랐던 점잖은 교인들이 죄와 그리스도의 용서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 선생과 함께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었다.5) 「코리아 메소디스트」지는 서울부흥 집회에 이어 즉시 10월 14일에는 평양으로 부흥의 불길이 번져 나갔음을 보도하였다. 즉, “동년 10월 14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여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집회는 하루에 3번씩 개최하였고 집회 이전에 선교사들이 자신들을 위한 기도회를 하였다. 이러한 집회에서 강력한 회개운동과 바른길 가기 원하는 결단이 있었다.” 이 부흥운동은 원산에서 시작되어 서울지역으로 퍼졌고 여기서 한국인들의 부흥운동이 시작되었으며 평양으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6) 또한 1904년 남감리교 제8차 연회에서 서울구역장 무스(J.R.Moose) 목사는 “이 집회는 가장 놀라운 집회(a most wonderful meeting)였다. 사람들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부끄러운 죄까지도 고백하였으며 잃어버린 선함을 회복시킨 집회였고 구원의 체험과 확신을 이룬 집회였다”고 보고하였다.7)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이 집회는 원산에서 모였던 선교사들의 집회와는 달리 한국인의 집회로 모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학생들을 위한 집회가 서울지역 전 교인들에게 확산되었고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심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공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교리적이고 지적인 그리스도인에서, 기독교신앙이 내면화되어 삶의 변화를 이루는 강력한 체험적 신앙인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들이 신앙에 새 힘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평양지역이 아닌 서울지역에서 먼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 부흥운동의 특성은 첫째,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그 말씀을 자신에 적용시키는 성서연구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즉 사경회(査經會)였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기도 운동이었다. 셋째는 증거하는 운동이었다.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전도운동이었다. 넷째는 초월적인 강한 힘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과 하나 됨을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과 한국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남녀노소 교인들 간에도 신분계층의 차별이 없어지고 한 형제 됨을 체험하여 원활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섯째는 이 1904년 서울지역 부흥운동이 다른 지역의 모본이 되어 하디 목사와 한국인 목사들을 초청하는 집회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개최되게 되었다는 점이다.8) 1904년 서울지역의 부흥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충격과 함께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 1906년 케이블 선교사(E.M.Cable, 당시 경기 및 충청지방 감리사)는 “한국 정치계의 커다란 움직임에 따라서 영적 세계(the Spiritual World)의 각성(awakening)과 운동(move-ment)이 일어나게 되었고 교회로 모여들게 되었다”고 보고했다.9) 여기서 우리는 부흥운동이 한국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시키고 탈역사적 교회(脫歷史的 敎會)로 전환시켜 현세보다는 내세지향적인 교회로 전락시켰다는 지금까지의 견해를 수정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역사적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더욱 하나님 앞에 서게 하며 자신들의 부정함과 게으름을 통탄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방식을 변화시켜 형제 우애와 나라 사랑으로 헌신해 나가는 민족구국 신앙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는 당시 서울부흥회의 중심이 된 지도자들이 민족구국 신앙에 확고히 서 있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부흥운동의 주역이 최병헌 목사(정동교회), 김우권 목사(동대문교회), 전덕기 목사(상동교회), 현순 목사(정동교회) 등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4. 부흥운동의 확산 서울지역 부흥운동은 1906년 평양지역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집회를 유발시켰고, 1907년 연초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1천5백여 성도들이 성령충만함을 받아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평양지역의 부흥운동은 어느 한 교파에 편중된 것이 아니었다. 교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이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며 형제임을 체험한 집회였다.10) 신홍식 목사(민족대표 33인 중 1인)가 쓴 「인천내리교회사」(1922)에 보면 1906년 겨울 평양에서 부흥회가 일어나 은혜를 특별히 받았음을 기록하면서 “본 교회에서도 부흥회를 시작하고 부흥회 인도자를 평양에서 청구하니 이은승 목사와 손정도 씨 두 분이 파송되어 인도하였는데 남녀노소가 다 통곡하며 말로 할 수 없는 죄를 다 주 앞에 자복하고 일반 인민이 크게 소동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11)고 하였다. 여기서 이미 한국교회의 부흥회는 선교사들의 인도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인 지도자들이 인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지역을 초월하여 일체감을 이루어 나감도 알 수 있다. 1907년 연초에 모인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집회에 대하여 당시 해리스 감독(Harris)은 볼티모어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부흥운동은 참으로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 교회의 영적 수준이 확실히 높아졌으며 미리 성경 지식을 잘 닦은 후에 일어난 운동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광신적인 경향이 없어서 한 사람이라도 정신이상자가 없었고 모두가 올바른 정신상태로 자기들의 양심이 명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하여 주님의 복음사업에 몸을 바쳐 일하겠다는 사람이 수십 명이 생기었고 성경을 공부하려는 열심이 일어나 어떤 사경반에는 2천여 명이 참석하여 공부하였으며 또한 수천 명이 성경읽기를 시작하고 의심되는 것은 물으며, 술주정꾼, 노름꾼, 도적, 간음하는 자, 살인자,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선비, 아무 자각도 없는 중들, 수많은 무당, 믿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옛 것이 영원히 사라졌던 것이다.12) 1907년에는 서울에도 대대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으로 북감리교회는 서울을 두 구역으로 확장, 편성케 되었다. 즉 서울동부구역(Seoul East Circuit)과 서울서부구역(Seoul West Circuit)이다. 서울서부구역은 정동교회와 상동교회가 연합하여 적극 선교해 나갔는데 특히 서대문 밖으로 뻗어 나갔다. 서부구역은 서강교회, 창내(창천)교회, 공덕리교회, 아현교회, 염창교회, 마포교회와 서대문 밖 기도처들로 형성되었다. 동부구역은 동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왕십리교회, 중곡동교회, 미아리(돈암)교회, 용두리교회, 삼청교회와 동대문 밖 기도처들로 구성되었다.13) 5. 맺음말 한국 감리교회의 서울지역연합 부흥운동은 한국인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일어나 퍼져나갔으며, 1907년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1907년은 장로교 독단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감리교·장로교 연합 집회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 2007년을 “1907년 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하며 특정교파를 중심으로 부각시키고 준비하고 전개하는 것은 초기 한국기독교의 연합정신, 협력정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 대립과 경쟁에서 협력과 일치를 지향하는 전기를 이루어 민족복음화와 통일운동, 세계복음화를 위해 연합운동을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 앞으로는 한국기독교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좀더 포괄적인 연구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며 어느 특정인들이나 교파에 치중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외면적이며 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체험적이며 내면적인 신앙으로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점과 이 부흥운동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려는 민족교회운동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부흥운동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한국기독교회의 부흥회가 신비적인 경향과 기복신앙에 치우쳐 비역사성, 비윤리성에 빠지는 경향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부흥운동은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 주는 한국기독교의 모습으로, 오늘날 교회들이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교회가 되도록 촉구하는 성서적인 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 미주 1) 閔庚培,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2, pp.213f. 閔庚培,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 서울 : 延大出版社, 1980, pp.36f. 2) Minutes of the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M.E.C. 1903, R.A.Hardie′s Report, p. 26. 이하 Minutes로 표기함. cf) Lak-Geoon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52-1910, Seoul Yonsei Univ., 1972. pp. 3-26. 3) Ibid, pp. 3-26. cf) C.D.Stokes,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 1885-1930, p. 188. 4) Minutes, 1904, R.A.Hardie′s Report, pp. 23-29. cf)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an account of revival in the Korea churches in 1907. 5) The Korea Methodist Vol. I. 10. Nov. 1904, p. 78. R.A.Hardie 목사는 1904년 9월 22일부터 10월 9일까지 19일간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서울지역 연합부흥집회를 인도했으며, 남·여학교는 배재와 이화학당이다. 6) The Korea Mothodist Vol I. 10. Dec. 1904, p. 12. 7) Minutes, 1904, 서울구역장 J.R.Moose pp. 39-42. 8) C.D.Stokes,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 1885-1930, pp. 190-191. 9) Official Minutes of the Korea Mission Conference M.E.C. 1906, p. 32. 10) C.D.Stokes, op.cit., p. 189. 1907년 평양부흥운동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집회였다. 11) 申洪植, 「인천내리교회사」(1923年刊). 12) Allen D. Clark, History of the Church, Seoul, CLSK, 1961, pp. 137-138. 13) Official Minutes of K. M.C. 1908, Annual Report, pp. 30-35. 노종해 목사 평남 평원군 출생. 감신대, 동 대학원 졸업 감신대, 목원대, 협성대에서 교회사, 교리사, 한국기독교사 담당 강사(1981-1988) 충주제일교회, 육군군목, 서울돈암교회, 온양온천교회, 정동제일교회, 콸라룸푸르 한인교회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선교사로 파송받음(일본) 현재는 말레이시아로 재파송되어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사역에 매진 저서로는 『한국감리교회의 성격과 민족』(서울: 성광출판사, 1982) 『한국감리교사의 새 시각』(서울: 풍만풀판사, 1988) 『동남아 이슬람과 한국 기독교선교』(서울: 성서연구사, 2002) 외 저서 및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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