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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세미나
[성령운동 21세기]성령의 기름부으심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570    등록일시 : 2005-01-31    인쇄
이번 장에서는 21세기 성령운동을 준비할 때 아주 중요한 개념인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오늘날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21세기 성령운동에 있어서 그 가능성을 발견해 보도록 하자.


그 두 번째 이야기
“성령의 기름부으심”
이승복 연구원 | 교회성장연구소, praising2@hanmail.net


1. ‘기름부으심’의 잘못된 쓰임

오늘날 ‘기름부으심’의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 또는 예배 인도자들이 ‘기름부으심’이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기름부으심’에 대한 올바른 개념 없이 그저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필자는 오늘날 이처럼 잘못 쓰이고 있는 ‘기름부으심’의 개념을 바로잡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바로잡음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는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의 흐름을 끊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 의미를 더욱 정확히 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이다.
2. 성서에서의 기름부으심

구약에서 ‘기름부으심’은 제사장, 왕, 선지자를 임명할 때 쓰였다. 즉 거룩한 직임의 ‘임명’, 또는 ‘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임명장’과 같은 효력이 있는 행위가 바로 기름을 붓는 행위 즉, 기름부으심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기름부음받은 자) 예수에게 기름부으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사 61:1; 눅 4: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부으심’의 개념은 구약과 일치한다.
신약에서 독창적으로 ‘기름부으심’이 쓰인 경우는 요한일서 2장에서만 세 번 나오는데, 20절에서 한 번과 27절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기름부음’은 ‘인격적인 성령’ 그 자체를 의미하며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며 마지막 때에 우리를 인도해줄 분’으로 묘사된다.
구약의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부으심을 받고 주의 신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3. 성령충만과 기름부으심의 차이점

오늘날 이 두 개념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이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기름부으심에 대한 다수의 서적들과 자료들을 참조했지만 명쾌하게 이 두 개념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연구를 통해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성령충만이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기름부으심은 구약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에 있어서도 성령충만보다 기름부으심이 더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기름부으심을 떠나 성령충만을 말하는 것은 매우 편협된 생각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도 성령충만은 그 의미가 매우 좁게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성령충만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성령충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먼저 성령충만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살펴보자.

1) 성령충만
‘성령충만’은 보통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온전히 성령께 이끌림 받는 상태를 말한다. 필자가 고(故) 대천덕 신부를 대면한 적이 있었는데, “나 자신이 성령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면 나는 성령충만한 것입니다.”라는 대천덕 신부의 대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것은 성령충만이 단순히 은사와 권능이 충만한 상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마치 초능력자가 된 것과 같은 상태로 오해한다.
R. A. 토레이 목사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을 구분하여 성령충만을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이것은 성령의 내적인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가 다듬어져가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가는 부분과,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사역에 도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로 구분한 것이다.
이 개념은 오늘날 사역에서의 능력은 강하게 나타나지만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부족함을 드러내는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또한 그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매우 닮았지만 사역에서 성령의 은사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용한 개념틀이라 생각된다.
외적인 충만은 단번에 주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적인 충만은 물론 예외도 있지만 보통은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져 간다. 이것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 성령의 열매와 함께 사역에서의 권능도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성령충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충만의 의미를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성령충만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채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단을 비판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성령충만과 기름부으심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성령충만과 기름부으심은 성서적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성령충만이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으로 나누어지듯이 기름부으심도 ‘내적인 기름부으심’과 ‘외적인 기름부으심’으로 나누어진다. 요한일서 2장에서의 기름부으심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성숙하게 하는 내적인 기름부으심이다. 그러나 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기름부으심은 권능을 행하게 하는 외적인 기름부으심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성령충만과 기름부으심은 서로 일치한다. 이 두 개념의 차이점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없던 성령충만이라는 개념이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에서 더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기름부으심의 개념이 더 포괄적이며 그 연구가치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에 함께 힘쓸 동역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3)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
그런데 한 가지 성령충만이 갖지 못한 의미가 기름부으심에 더해져 있다. 이것은 성서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이다. 즉 예배 시에 임하는 성령의 능력이나 임재를 사모하는 말로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옵소서’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것이 단순히 성서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은 언어사용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이 말은 ‘성령충만을 부어주옵소서’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더 성서적이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다. 아직 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본래의 기름부으심의 의미가 더 발전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번 호에는 이 개념을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이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간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을 특별히 호칭하는 것은 이 개념이 가진 독특성과 그 가능성 때문이다.

4. 신사도개혁운동과 기름부으심의 연관성

지난 호에서 우리는 신사도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오늘날 많은 신사도적인 사역자들이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소위 ‘기름부으심’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케네스 헤긴이나 베니 힌 등도 ‘기름부으심’을 주제로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할 만큼 성령사역에서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개념은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성령사역에서 강조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개념은 무엇인가? 이들이 말하는 기름부으심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내적인 기름부으심과 외적인 기름부으심 외에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신사도적인 교회들은 찬양경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새로운 기름부으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찬양경배로 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회중 교회들은 설교 중심의 찬양을 하지만 신사도적인 교회들은 설교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한 독창적인 통로로서 찬양경배의 시간을 가지며, 전통적인 회중 교회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찬양경배에 투자한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경배를 통하여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에 들어가지 못하면 신사도개혁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 신유, 축사 등의 은사 사역도 행하여지기 힘들다.

5. 소유된 은사의 개념에서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받고 자신이 은사를 소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사는 우리가 은사를 행하기 전까지는 은사가 아니다. 우리가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신유의 능력을 행하기 전까지는 신유의 은사가 아니다. 은사는 절대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은사는 항상 하나님의 것이다.
신사도적인 교회에서 찬양경배를 통로로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은사사역을 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개인적인 은사로 사역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름부으심’에서의 은사사역은 개인적인 은사사용을 능가하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대부분의 은사 사역자들은 자신이 가진 은사를 가지고 사역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개념은 이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임재에 우리가 연결되기만 하면 예배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은사는 내가 가진 은사에 제한되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대형 저수지에 우리가 연결될 때에 우리는 통로의 역할만 잘 하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개념을 알면서도 막상 사역에서는 자신의 우물에서 물을 퍼내려고 노력한다.
꼭 찬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예배에서는 찬양이 가장 효과적이며 세계적인 흐름이다. 찬양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수지에 호스를 연결하라. 그리고 깨끗한 통로가 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예배 속에 부어질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퍼주는 것이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내가 통로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사역이다.

6. 앞으로의 과제와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가능성

아직도 신학적인 부분에서 많은 연구와 질책이 필요하다. ‘기름부으심’에 대한 연구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기름부으심’은 21세기 성령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성령에 대한 오해들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개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21세기 성령운동은 더 이상 개인적 은사사역의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출발이었던 은사의 소유개념을 먼저 없애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은사의 소유개념은 특히 권위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은사를 행하는 자와 사역을 받는 자와의 주종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은사에 대한 왜곡과 상처입은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결국 은사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나거나 또 다른 역기능적 교회들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잘못 사용했던 교회의 죄요, 이 땅의 아픔이며 우리의 아픔이다.
‘새로운 기름부으심(The New Anointing)’의 개념을 통해 교회는 변화를 겪어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함 앞에서 겸손해지자.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부어주시는 은혜를 제한하지 말고 기다리자.
그것이 부흥이든 새로운 그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제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진정한 부흥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기름부으심’을 사모하고 기도하자. ‘기름부으심’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인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능력이다(요일 2:18-27). 예수님께서도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난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기름부음은 필수이다. 당신의 힘으로 사역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내게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라고.

* 기름부음의 의미?

기름부음의 정확한 의미는 ‘사람의 머리나 몸 혹은 어떤 물체 위에 기름이나 연고를 바르거나 붓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나 물체는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하나님께 성별된 사람은 일차적으로 제사장들, 그리고 예언자들이었다. 왕정 시대가 되면 왕들도 즉위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집전하였다. 훗날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명칭은 히브리-아람어의 형태인 ‘메쉬아흐’로 축약되었으며 이 단어는 헬라어 ‘크리스토스’로 번역되었다. 신약에서 예수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참고 S. Szikszai, Interpreter′s Dictionary of Bible, “an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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