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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김익두 목사와 대중적인 신유집회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351    등록일시 : 2003-09-23    인쇄
김익두 목사와
대중적인 신유집회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삼일운동에 일어난 김익두의 집회는 대중집회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을 지나면서 한국인들은 무척 움추려 있었다. 하지만 삼일운동 이후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어느 정도 집회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다. 삼일운동이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적인 의사표현이었다면 김익두의 부흥집회는 종교적인 집단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익두의 집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는 조선 기독교역사상 처음이라는 것이다. 1920년 6월 31일부터 시작된 평양집회는 남녀가 4, 5천명이 모였는데 동아일보는 “평양시내가 거의 빈 것 같았다. 이는 예수교가 평양에 들어온 이후 처음 보는 성황”이라고 쓰고 있다.1)

김익두의 대중집회적인 성격은 같은 해 10월 서울집회에서 더욱 잘 드러났다. 집회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는데, 특별히 저녁집회에는 만 명 이상이 모였다. “이러한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은혜받은 것은 우리 조선교회의 설립 후 처음 있는 일이며, 서양의 유명한 강설회나 부흥회나 전도회에 10만 이상 모인 것 보다 오히려 더욱 성대한 부흥이 되었나니.” 서양은 인구가 많고, 선전이 용이하며, 교통이 편리하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한데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만 명의 신자가 모인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진실로 조선에 크게 별난 일이며, 교회에 처음 보는 부흥이라.”2)

전국적인 대중집회

이런 대형집회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연합집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두 목사의 집회가 대중들의 관심을 끌자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1920년 6월 말에 열린 평양의 집회의 경우에는 평양시내에 있는 7개의 장로교회의 당회가 연합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장대현교회는 저 유명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장소이다. 1920년 10월에 열린 서울집회의 경우에도 서울시내의 7교회가 연합하여 승동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당시의 연합은 장로교의 연합이며, 감리교는 여기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주로 장로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김익두의 집회는 전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임택권의 [이적명증]에 나타난 김익두 목사 집회의 스케줄은 조선 팔도를 다 포함하고 있다. 임택권의 [이적명증]의 목록에 나타난 집회장소는 위의 표와 같다. 이 표를 보면 김익두의 집회는 전국의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익두의 신유운동은 어느 특정한 지역에만 제한된 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김익두의 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병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집회에는 항상 각종 병자들로 붐볐다. 황해도 은율교회에서 열린 황해도지역 연합집회에서는 그 지역의 환자 약 4, 5백 명이 모여들었다. “각처에서 이적이 나타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허다한 병자들이 재령, 안악, 은율, 송화 각 군에서 혹은 우치와 인력거에 몸을 싣고 오는 자, 막대를 의지하야 도보로 간신히 찾아오는 자가 구름같이 모여들매 마치 주님 당시 갈릴리 회당에서 되던 광경을 친히 봄과 같더라.”3) 황해도 집회에서 보는 것처럼 김익두의 집회에는 항상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그러나 김익두의 집회는 단지 신유 때문으로 성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논리적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상류층의 고상한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익두가 평양에서 숭덕학교를 돕기 위한 헌금을 촉구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양강산에 우리 손으로 세운 완전한 중등학교가 없는 것은 산 좋고 물 좋은 금수강산에 똥칠을 함과 다름이 없으니 만일 여러분이 다 쓰러져 가는 숭덕 하나를 다시 일으키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흘러가는 대동강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옳겠다.” 여기에서 그의 언어는 보통사람의 가슴에 직격으로 전달되는 생동감이 있었다.4) 몇 달 후에 열린 서울집회에서의 김익두의 설교도 마찬가지였다. 이 집회에 참석하였던 게일은 김익두의 특징은 기독교의 복음을 일반 대중들에게 전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5)

대중적인 신유집회의 특징

그러면 김익두의 신유집회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김익두의 신유집회는 간절한 기도준비와 안수기도로 이루어진다. 김익두는 원래부터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금식기도, 산기도 등을 즐겨했다. 이렇게 기도로 무장한 다음에 그는 환자에게 안수기도를 했다. 사실 그는 매 집회마다 병자를 위한 안수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의 집회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병자이며, 이들을 일일이 안수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수를 받겠다고 밀려오는 사람들을 거절할 수 없어서 일일이 안수를 해 주었던 것이다.

많은 경우 안수와 함께 질병의 치료가 시작된다. 어떤 경우는 안수 즉시 낫는 경우도 있다. 부산에서는 앉은뱅이가 안수받은 즉시 낫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러 차례 안수를 통하여 점점 회복된다. 대구 대남여관 주인 허찬의 부인인 홍선이는 임신된 지 2개월 뒤에 주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통증이 와서 병원에 가보았더니 개복을 하고 수술을 하여야 살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홍선이는 수술을 거부하고, 김익두 목사에게 수차 안수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 고통받는 것이 끝나고 건강하여져서 아들을 순산하게 되었다.6) 임택권의 [이적명증]에 나오는 치유기사는 거의 여러 차례 안수하여 치유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익두 목사는 안수기도를 하면서 먼저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치유는 단지 김익두 목사만의 사역이 아니라 김목사와 환자의 공동사역인 셈이다. 그리고 아울러서 김익두 목사는 기도를 받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대구의 기생 김경애가 소변불통의 중병으로 일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대구 남성예배당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 여인을 보고 먼저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한들 네가 회개치 아니하고, 네가 간절히 기도하지 아니하면 어찌 낫기를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이 여인은 김목사의 권면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 그 후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병에서 치료받았다.7) 사실 복음주의 운동에서 질병의 치유는 죄의 용서와 깊은 관계가 있다. 마음의 죄에서 용서받을 때 육신의 질병에서도 치유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신유의 체험은 마음의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김해의 박봉련은 콧병과 종기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인생이었는데, 김익두 목사가 집회시에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도중에 “즉시 그때부터 마음이 상쾌하더니 곧 깨끗함을 얻어서 지금은 온 몸이 건강하여 무슨 일이든지 잘하게 되었다.”8) 황해도 신천의 신선학이라는 여인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흉복통으로 고생을 하는데 김익두 목사에게 안수를 받을 때에 “가슴속에 주먹만한 것이 내려가는 것 같더니” 흉복통에서 치료를 받았다.9) 기독교의 신유운동은 단지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의 치유도 겸하게 된다.

김익두의 신유집회의 특징은 병자를 위한 안수이지만 꼭 안수를 받아야만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집회 도중에 자신이 기도하는 도중에도 치유를 경험하고, 집단적으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도중에도 치유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별히 1920년 8월 13일부터 열린 제 9회 사리원집회 때에는 4, 5천명의 청중 가운데 수천 명이 환자이며, 이들은 대부분 김익두 목사의 안수를 기다리므로 김 목사가 이것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은 매시간 기회있을 때마다 안수기도 하던 것을 바꾸어서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병자들을 종류대로 안게 하고(예를 들면 두통, 눈, 귀, 목, 코, 폐 등) 각각 그 그룹에 가서 집단적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기도시에 간밤에 나은 사람은 간증하라고 해서 병 나음을 증거하게 했다. 그 후부터 김익두 목사의 집회는 직접 안수는 많이 하지 못하고, 저녁에 집단으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다음 날 병 나은 사람을 확인하여 간증하게 하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김익두 목사의 안수를 기다리는 중에 치유를 경험한 사람도 있다. 경성의 집회에서는 무교동 복음전도관(현 중앙성결교회) 신자 라영복의 언니 라영신(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이 풍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여 안수기도를 기다리다가 안수를 받지 못하여 실망하던 중 갑자기 다리에 힘이 생겨 부지중에 걷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 후 무교동성결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10)

또 다른 경우는 아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를 받아서 치료받은 경우도 있다. 평북의 함석규 목사는 총회 참석차 서울에 왔다가 김익두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김 목사에게 자기 아들의 아픈 병세를 말하고 아들 대신 기도를 받았다. 그의 아들은 오산중학교 학생인데 여러 달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함 목사가 집에 도착하여 보니 자기가 김익두 목사에게 안수를 받은 그 시간에 아들이 치유된 것을 발견하였다. 대신 기도받은 것에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11)

임택권 목사는 김익두의 신유집회의 발전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병자를 위하여 3일 아니 금식한 다음에 비로소 성취하였고, 그 후부터는 각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안찰하면 믿는 자는 나음을 얻었으며, 이 때부터는 여러 사람의 병을 위하여 함께 기도할지라도 믿는 자는 나음을 얻었으며, 그 다음 경성 부흥회에서는 선생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희의 간절한 믿음으로 나음을 받았고, 심지어는 병자를 위하여 대신 기도를 받아도 곧 그 시로 나음을 얻었느니라.”12)

김익두 집회의 치유현상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에는 수많은 질병들이 치유받았다. 앉은뱅이가 걷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혈루증 여인이 고침을 받고, 간질환자가 치유받았다. 다음은 [이적명증]의 목록에 나오는 치유된 질병들이다. 이 표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병들이 치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미있는 일은 황해도 신천의 김용순은 일곱 가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인데, 그 병은 뇌병, 내복통, 허리아픈병, 각통, 담들려 아픈 병, 배가 부어 바람든 병, 손에 종기난 병이다. 여러 가지로 치료하였으나 낫지 못하였으나 김익두의 기도로 이 모든 병이 한 순간에 다 낫고, 기다리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었다.13)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병이 나았다가 재발하는 경우이다. 상당히 많은 경우 김익두 목사의 기도로 병에서 나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구의 기생은 회개하고 병에서 나았다가 다시 기생의 일을 하니까 병이 재발하였다.14) 황해도 송화군의 전택신은 반신불수병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안수기도로 치유받았다. 하지만 그 은혜를 잊고, 농사일에 매여 여러 주일을 지키지 않자 다시 병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상태가 되었다.15) 김익두의 신유사역은 항상 “네가 나았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고, 큰 증세가 다시 발할까 염려하라.”(요 5:14)는 말씀의 권고가 뒤따랐다.

우리가 김익두의 신유사역을 말하면서 영적 전쟁이라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익두는 입신과정에서부터 악령과의 투쟁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김익두의 기독교입문이 바로 자기가 섬기는 천자대감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가 재령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에 귀신들린 여인 박수은을 고쳐 주었고, 그 다음에 신천에 처음 부임하여서도 귀신들린 여인을 치료하여 주었다.16) 이것은 그의 신유사역이 단지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귀신에게 속박된 인생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17)

1) 임택권,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 (서울: 기독교서회, 1921), 135; [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
2) 임택권, [이적명증], 98-99; ″京城敎會 火洗禮,″ [기독신보] (1920년 11월 3일). 이 집회에서 한국교회의 진보주의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김재준이 은혜를 받고 개종을 결심하였다.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정말로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 송이같고, 기도에 욕심장이가 되었다.″ 김재준, [범용기] (1983), 43. 이덕주, [개종이야기], 425에서 재인용.
3) 임택권, [이적명증], 28.
4) 임택권, [이적명증], 135.
5) J. S. Gale, ″The Revival in Seoul,″ KMF (January 1921), 4-5.
6) 임택권, [이적명증], 1-2.
7) 임택권, [이적증명], 11.
8) 임택권, [이적명증], 20.
9) 임택권, [이적명증], 75.
10) 임택권, [이적명증], 101.
11) 임택권, [이적명증], 100.
12) 임택권, [이적증명], 87-88.
13) 임택권, [이적명증], 76-77.
14) 임택권, [이적명증], 12.
15) 임택권, [이적명증], 30-31.
16) 김인서, ″김익두목사소전,″ 95-106.
17) 우리는 임택권의 [이적명증]에는 초기 김익두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영적 전쟁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임택권의 편집과정에서 신유 자체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신유의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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