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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초기 한국교회의 신유운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89    등록일시 : 2003-08-30    인쇄
초기 한국교회의
신유운동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우리가 한국교회사를 말할 때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는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을 통한 신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사실 현재 한국의 의료수준은 매우 발달해 있다. 그리고 이런 의료행위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국가나 개인이 많이 감당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병원에서 치유할 수 없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치유하는 신유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신유사역을 통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신유의 역사는 초기에서부터 나타났다.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를 했다. 하지만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기에 동시적으로 치유의 기사가 나타났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외쳐질 때 종종 신유의 역사가 나타났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종교와 의술은 분리되지 않았다. 무속도, 불교도 치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별히 무속에서는 질병은 악귀의 소행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악귀를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동시에 치유로 이어졌다. 초기 한국선교는 의학을 통한 치유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통한 치유도 나타냈다.
우리는 이런 신유운동의 전형적인 케이스의 하나를 언더우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1) 1907년 5월호 <코리아 미션 필드>에 언더우드는 자신의 신유기사를 싣고 있다. 언더우드는 안산읍 발월(?)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불치의 병으로 칩거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로 부어있었고, 사람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더우드가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이 사람의 집에는 무당이 방문하여서 굿을 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궁금한 나머지 이 집을 방문하였다.

전후 사정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신이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언더우드는 이 사람의 아버지에게 이 영혼이 오늘 죽는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아버지는 병만 낫게 해주면 예수를 믿겠다고 대답하였다. 언더우드는 오히려 “당신의 아들이 살지 죽을지 나는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 그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달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환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남자 무당, 여자 무당을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환자에게 예수를 믿겠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순간부터 우리 세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금식하며 3일 밤낮 동안 그 곳에 남아 중단하지 않고 기도드렸다. 3일째 되던 날 붓기가 가라앉기 시작해 해가 지기 전까지 붓기가 다 사라지고 그 생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가 계속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런 후 우리는 그 집에서 악령을 숭배하던 모든 것을 다 부숴 버리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경험의 결과로 그의 전 가족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2)

이런 신유의 역사는 언더우드에게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1907년 4월 제물포 송림동에 사는 이경필의 처가 사귀가 들려 고생하고 있었으나 예수교인 홍승하가 “그 머리에 손을 안찰하고, 기도한 후 일어나라 하니 하씨가 곧 깨끗해지는” 역사가 나타났고, 67일 동안이나 먹지 못한 그녀가 음식을 먹게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 기도하니 온전히 깨끗하게 되었다.”3)

또한 1908년 전북 무주 무풍돌목교회에서도 귀신들려 자기 “육신을 죽여놓고 집안권속을 소동케 하며 사람의 구경거리”로 만든 어떤 사람이 있었으나 교인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귀의 종을 불쌍히 여겨 마귀를 물리치니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한 경우가 있었다.4)

성결교회의 신유운동

1907년 대부흥운동 가운데 한국에 새로운 선교단체가 등장하였다. 이 단체는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성결교회의 전신)이다. 이 단체는 신유를 네 가지 중심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하나로 강조하였다. 특별히 이 단체의 초기전도자인 정빈은 “소위 신자로서 조그마한 병에 걸리게 되면 한갓 약이나 의사에게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기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고 설교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기자 중 이 전도관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 설교를 듣고, 전도관은 조선사회를 미신으로 몰고 가는 단체라고 대서특필하여 사회 이슈를 삼은 적도 있다.5) 아마도 이것이 신유를 중심으로 한 최초의 사회적인 논란이 아닐까 한다.

성결교회는 원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줄 뿐 만이 아니라 질병에서 해방시켜준다고 가르쳤다. 사실 성경에는 죄에서의 구원만이 아니라 질병에서의 치유를 말하고 있다. 예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치유사역이다. 이런 점에서 영혼구원과 더불어서 육체적인 치유를 전하는 것이 성서의 복음에 충실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이것을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이라고 불렀다. 또한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이 성서의 복음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에서 순복음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동시에 이렇게 외쳐진 복음은 영혼만의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육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구원이라는 의미에서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성결교회는 초기부터 직접전도를 강조하였다. 직접전도란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육이나, 의료나, 봉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성결교회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해줄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질병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믿었다. 우리가 초기 성결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결교회의 사역은 일종의 영적 전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인 전도자들은 가는 곳곳마다 악령의 세력과의 싸움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냈다.

초기전도자 김상준은 충청도 부여군 규암에서 병들어 거의 소망이 없는 여인을 심방하여 복음을 전했다. 이 여인은 귀신들려서 고생하고 있는데 침으로 치료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침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믿었다. 김상준은 이 여인을 찾아가서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10절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 여인은 질병에서 해방되었다.6)

규암 옆의 은산이라는 마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터로서 장날이면 5천 명에서 8천 명 가량이 모였다. 또한 이곳은 은산별신굿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신당들이 있고, 신당에서는 일년에 3-4회씩 제사를 지내는데 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다. 이 지역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바로 이 제물이었다. 하지만 초기 성결교인들은 제사드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제사드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귀신과 접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 때문에 생활에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기 신자들은 개고기도 먹지 않았다. 개고기는 불결하다고 생각하였다.7)

은산에는 ‘박순의’라는 전직 경찰관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아파서 무당굿을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의사에게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 의사는 예수를 믿으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순의는 복음전도관의 사역자들을 불러서 여러 차례 예배를 드렸다. 첫날에는 박순의의 아내가 회개했다. 사실 이 여인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반대로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문 밖에서 듣고 믿기로 작정했다. 셋째 날에는 환자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여섯째 날은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우상을 태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12명의 새신자가 생겼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전도는 곧 영적 전쟁이었고, 육적인 치유의 과정이었다.8)

전도부인 곽진근과 신유사역

우리가 한국교회사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바로 전도부인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일했다. 이들이야말로 신유사역의 최일선에 있었고, 영적전쟁의 전사들이었다. 대부분의 전도부인들은 남편이 없는 과부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남편으로부터 소박맞은 여인들도 있었다. 소박맞은 여인들은 남편이 있지만 과부나 다를 바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지 구주가 아니라 자신들을 사랑해주고, 용납해 준 영적인 신랑이었다. 이들은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서 악령과 싸우며, 병든 자를 고쳤다.

우리는 이런 전도부인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곽진근을 들 수 있다. 그는 과부였는데 자식이 없어서 조카를 양자로 삼았다. 그 후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복음을 보다 더 잘 전하기 위해서 성서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성서학원에서 곽진근은 사죄의 체험과 성령세례를 받았다.

곽진근 전도부인은 1914년 강원도 철원의 복음전도관에 파송되었다. 그는 어느 날 오랫동안 불교를 믿는 할머니를 방문하여 불신자가 받을 영원한 심판을 전했다. 그 후 이 할머니는 꿈을 꾸었는데 왕관을 쓴 왕이 자기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부처인줄 알고 절하려 하였으나 절을 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부처가 아니라 예수였다. 하지만 자신의 목이 너무 뻣뻣하여 절을 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자기의 집에 있는 모든 우상을 태워버리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였다.9) 초기 한국교인들에게 있어서 악령은 실재하는 존재였고, 복음은 악령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였다.

곽진근은 단지 병든 자를 치료해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것 역시 철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철원에는 어린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한 과부가 있었다. 수없이 방문했지만 이 여인은 신앙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 과부의 아들이 발진티부스에 감염이 되어 고생을 하게 되었다. 곽 부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집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이 과부는 여전히 거부했다. 결국 이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자 아무도 이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곽 부인은 철원교회의 남자 전도사였던 김병선과 함께 한밤중에 찾아가서 삼베로 시체를 염하고, 품팔이꾼을 불러서 장사지내 주었다. 그러자 이 과부는 “당신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집에 올 수 없소.”라고 말했다. 곽 부인은 “우리는 약하지만 다니엘을 불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전염병에서 건져주실 것이요. 우리의 더 큰 관심은 당신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요.”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이 여인은 곽 부인의 전도를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 신유사역의 특징

인류 역사상 종교와 질병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실존적인 문제가 질병이며, 이 문제를 씨름하는 과정 가운데서 종교가 등장한다. 많은 종교인들은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 가운데서 신앙을 갖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사역도 치유사역과 병행했다. 초기 한국의 복음전파도 치유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특별히 일반 신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 볼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유사역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찾아보게 된다. 첫째는 복음전도는 신유사역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병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과정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더우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혼구원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신유사역은 악령추방과 같은 영적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인들은 질병은 악령의 역사 때문에 나타난다고 믿었고, 복음으로 악령을 물리치면 그 다음에는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영적 전쟁의 장소임을 알게 된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세계관 아래서 사역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서구 문화만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미신에 매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영적인 해방을 선포하고, 동시에 신유의 능력을 나타냈다. 초기 한국교회에 있어서 기독교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능력의 복음이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바란다.



1) 초기 한국교회의 신유에 대한 연구는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352-359와 마서 헌트리, [초기한국교회성장사] (서울: 목양사, 1985), 244-246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2) H. G. Underwood, ″Prayer Cure,″ Korea Mission Field (May 1907), 68-69; 초기 한국교회에서 신유에 대한 기사가 종종 나오고 있다. [신학월보]의 1903년 10월, ″병 고침을 얻음″; 1904년 1월 8일, ″소경을 고침.″
3) [예수교신보] (1908년 1월 29일), 42;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356.
4) [예수교신보] (1908년 12월 15일]. 218;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356.
5) 이명직, [성결교회약사] (서울: 성결교회이사회, 1929), 52-53.
6) “Report of the Work in Korea,” Electric Messages (January 1914), 8-9.
7) “Korea Division,”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January 1915), 12.
8) “Report of Work in Korea,”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May 1915), 11; 15.
9) “O.M.S. Notes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April 19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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