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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부흥운동과 김익두 목사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66    등록일시 : 2003-08-01    인쇄
1920년대 부흥운동과 김익두 목사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선교사들의 기도운동

한일합방 이후 소위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 한국교회는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삼일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분위기에 접하게 되었다. 무단통치 기간에는 집회의 자유도, 교회설립의 자유도 없었다. 하지만 삼일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시작되자 지금까지의 종교정책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1910년대 후반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쇠퇴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블레어는 이 기간이 한국교회에는 시련의 시기였다고 말한다.1) 북장로교 선교사인 로드스는 과거 10년 간 한국교회는 천천히 쇠퇴하였다고 말하였다. 선교사의 숫자도 늘고, 현지인 사역자 양성도 열심이었지만 한국교회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보였다고 평가한다.2) 한일합방 이후 한국교회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장로교의 녹스 선교사는 1919년 1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실린 글에서 자신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당시는 대부흥기간이었다) 사람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였었다고 말한다. 그때는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교를 전하면 그 날 밤에 교회당은 꽉 찼고, 저녁집회는 은혜가 넘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전도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도하러 나갔던 사람들은 낙심하고, 그래서 더 이상 전도하러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3) 그는 한국교회가 전도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교회의 부흥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단체의 모임인 재한복음주의 선교사연합회(Fed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전도에 관한 글들을 많이 실었다. 그 중에서도 전도에 관한 글을 가장 많이 실은 선교사는 남장로교 선교사인 벌이다. 그는 개인전도는 가장 급박한 과제이며, 이것은 과거보다 더욱 강력하게 실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위겸이라는 한국명을 가진 벌 선교사는 1902년 한국에 와서 개인전도, 전막전도, 부흥성가단을 통해서 전라도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는 전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위한 뜨거운 사랑과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기도가 절실하다고 보고, 기도서약서(Covenant of Prayer)를 만들어서 이것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할 사람을 모았다. 남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시작한 이 운동은 전 선교사에게 확대되었다.4)

이 운동에 『코리아 미션 필드』도 동참하여 1920년의 표어를 ‘기도와 부흥’(Prayer and Revival)이라고 정하고 부흥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편집인은 사설에서 모든 위대한 부흥은 기도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면서 먼저 기도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 1920년 『코리아 미션 필드』(1월호)는 여기에 대한 특집을 내고 벌 선교사의 “기도요청(Call to Prayer)”에 관한 글을 게재했다.

벌은 이 글에서 우선 현실을 직시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1919년의 통계를 제시하면서 같은 해 장로교회는 16,857명의 신자가 감소했다고 말한다. 어떤 교회는 300명 모이던 교회였는데 이제는 100명밖에 모이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은 이 글에서 이제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우심을 구하면서 위기의식을 갖고 기도하자고 요청하였다.5)

『코리아 미션 필드』의 편집위원회는 벌의 기도서약서를 받는 운동을 자신들이 주도하기로 하고, 이 잡지의 편집장에게 서약서를 받는 일을 위임하였다.6) 선교사들은 삼일운동 이후 공허한 한국교회의 상황을 선교로 극복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인식은 장로교나 감리교와 같은 한국의 주류교단의 선교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양선교회(성결교회를 창립한 선교단체)의 초대 감독인 토마스는 1919년 6월 『동양선교사의 표준』이라는 선교잡지에 실린 글에서 한국은 지금 특별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삼일운동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인들은 마음이 심히 상한 상태이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갈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빨리 사역자를 양성할 성서학원을 확장하여 전도에 활기를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 하지만 이것은 외적인 준비이며, 보다 본질적인 것은 1921년에 있었던 이명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대부흥운동이었다.8)

1920년대 부흥운동의 주역, 김익두 목사

부흥이 일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기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부흥의 도구가 되기로 예비된 인물이다. 한일합방의 직전,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운명 가운데 전국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이 길선주라면, 삼일운동 이후 역시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은 김익두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미 이후에 김익두가 아니었더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염려하기도 하였다.9) 선교사들은 부흥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만 한국교회의 부흥의 주역은 한국인이 될 수밖에 없다.

김익두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00년 안악읍의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나는 천자대감을 섬기는데 작야(昨夜) 몽중에 귀신이 소리지르되 “익두가 방망이로 귀신을 때려죽이는구나.”라고 소리 지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들을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앙이 깊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술친구와 어울려 기생집에 갔다가 갑자기 “예수를 다시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산 속으로 들어가서 깊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갑자기 비몽사몽간에 큰 불덩이가 떨어져 가슴에 콱 안겨졌다. 그래서 꿈속에 “아이구, 벼락이야.”를 외쳤는데 깨어보니 불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때의 경험을 “가슴을 칼로 찢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자각과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한다.10) 이것은 그가 부흥사로 나서기 위한 전형적인 체험이었다.

그 후 김익두는 재령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신천으로 옮겨 일하면서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10년 졸업하고, 곧 이어서 안수를 받았다. 1919년 서울 남대문교회로 옮기기까지 신천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일찍 사역 가운데 기적을 나타냈지만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계기는 역시 1919년 삼일운동 직후부터이다.

김익두 목사는 1919년 12월에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에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집회 참석자 중에 박수진이라는 거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래턱이 빠져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음식을 씹지 못하므로 물과 함께 음식을 부어 넘기고, 침이 흐르므로 턱받이를 하고 다녔고, 막대기를 집고 다니므로 사람들은 그를 막대거지라고 불렀다. 김익두는 이 거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당시에는 별 효과가 없었으나 그 다음 날에 역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건시를 주면서 먹어보라고 하였다. 이 거지는 건시를 맛있게 먹었다.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10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다가 치료받은 것이다. 그 후 박수진은 박애은(朴受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는 권능의 사자로 유명하게 되었다.

전국으로 확대된 부흥운동

위에서 본 것처럼 1920년대의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의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코리아 미션 필드』는 전국에서 부흥운동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를 계속 게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김익두이다. 하지만 1920년의 부흥운동이 김익두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20년대의 부흥운동은 남쪽에서 시작되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기도운동이 일어났고, 경상도 현풍에서 본격적인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다. 특별히 초기 부흥운동은 경상도 지역에서 활발했다. 김익두는 경북 경산, 대구를 거쳐 부산과 김해에서도 집회를 인도하였다. 가는 곳마다 기적이 나타났다. 부산에서는 앉은뱅이가 나았고, 김해에서는 23년 된 혈루증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 김익두 목사는 경상도 지역을 휩쓸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의 이런 역사에는 돕는 손길들이 많이 있었다. 북장로교 선교사 톰스는 경상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기술하면서 과거 1907년의 부흥에는 남쪽이 북쪽에 비해서 많은 수확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제는 과거에 비해서 많은 씨를 뿌려서 많은 추수를 하게 되었다고 보고한다. 먼저 부흥을 원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평양에서 대학생들이 전도대를 조직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와서 조직적으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런 배경 가운데서 김익두의 집회가 열렸다. 김익두의 집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11)

경상도 지역 못지않게 부흥을 갈망했던 지역이 호남지방이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가장 열렬히 부흥을 갈망하던 사람들이다. 광주지역의 교회들은 1919년 가을 김익두 목사를 초청해서 10일간의 부흥회를 갖기로 하였다. 부흥회를 하기 전에 선교사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다. “시작부터 성령의 현존과 능력이 명백했다. 김 목사는 불의 사자였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능력 있게 말씀을 증거했다. 그는 매일 다섯 차례의 집회를 인도했는데 식사는 오직 두 번만 하였고,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 잠잘 동안 그는 깨어 하늘 보좌에 중보기도를 했다.”12)
이런 부흥의 결과는 목포에서도 나타났다. 목포에서 일하는 맥칼리 선교사는 한일합방 이전에 일어났던 부흥 이후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구역에서는 거의 발전이 없어서 심히 낙심하고 있었다. 심지어 포기의 일보직전까지 왔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자기 구역의 교회 내에서 일어났던 분쟁이었다. 이 교회에는 두 지도적인 가정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불신하고 싸웠다. 그런데 한 가정의 가장이 1919년 12월 광주에서 열렸던 사경회에 참석하고 나서 변화되었다. 그리고 두 가정은 화해하였다. 이것을 맥칼리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13)

남감리교의 구역인 송도에서도 이같은 부흥의 소식이 들려왔다. 윔스는 1919년 봄 이후 한국인들이 교회로 향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이 지역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보고한다. 사실 이 부흥운동은 한국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안되었으며, 감리교연회에서 이것을 채택하여 송도지역을 커버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2회 이상의 부흥집회가 계획되었고, 그 결과 이 지역에서 1,500명 이상의 구도자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산읍의 양반 가족이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삼일운동으로 체포되었는데 감옥에서 그의 친구인 기독교의사로부터 전도를 받았다. 출옥 후 그는 전도자를 초청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배우고,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불태우고, 온 가족이 신자가 되었다.14) 이런 것들은 한국에 다시금 부흥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익두의 부흥사경회의 절정은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1920년 6월 말 한 주간 평양의 일곱 교회가 연합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대부흥회는 매우 의미가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였던 평양은 냉랭하여졌고, 김인서의 표현대로 매우 위기였다. 김익두는 연합부흥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역사적인 사명감을 가졌다. 그것은 1907년의 부흥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하였다. 결과는 매우 놀라왔다.

동아일보는 “예수교가 평양성에 들어 온 지 처음 보는 성황”이라고 평가하였다. 특별히 이 집회에서는 평양에 숭덕학교를 세우려는 목적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집회도중에 헌금을 하였는데 6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금되었다. 어떤 이는 1만 원을 헌금하기도 하였으며, 가진 것이 없는 여인들은 비녀와 월자(月子) 등을 바쳤는데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었다.15)

같은 해 10월 11일에서 25일에 걸쳐서 서울에 있는 일곱 교회가 김익두를 초청하여 승동교회에 모여서 대부흥집회를 열었다. 게일 선교사는 이 부흥집회는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 과거의 어떤 집회보다도 일반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참석인원도 많았고, 더 나아가서 결과도 좋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게일은 부흥집회는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김익두의 대중적인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게일에 의하면 김익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의 일반적인 교양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무디나 빌리 선데이가 그런 사람이며, 한국의 김익두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16)

1920년대 부흥운동의 특징

우리가 김익두를 중심으로 한 1920년의 부흥운동을 보면 몇 가지 특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먼저 지역적으로 남쪽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평양과 서울에서도 큰 부흥이 있었지만 출발은 역시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코리아 미션 필드』에 실린 보고서도 이 지역의 것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재미있는 것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교회에서는 이 부흥운동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이 부흥운동에 있어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벌 선교사는 이 부흥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부흥운동을 격려했다. 이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1920년대의 부흥운동은 선교사와 한국교회가 함께 이룩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에 감리교 선교사들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감리교는 자체적으로 100주년 선교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이 운동은 김익두의 사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선교사들의 준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김익두라는 부흥사가 없었다면 이 부흥운동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신유의 기적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중요한 전형이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에서는 1907년의 대부흥운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철저한 회개와 죄에 대한 배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초 김익두의 부흥운동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1910년대의 쇠퇴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맞이했다. 1920년을 마무리하면서 당시 복음주의 선교사 연합공의회 회장이었던 밀러는 “교회의 직접적인 사역을 살펴 볼 때 올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독특했던 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나는 1907년과 1907년의 저 유명한 부흥기간조차도 지난 해보다 더 많은 진지한 구도자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17)

1) W. N. Blair, “Past Revivals and Present Day Evangelism,” The Korea Mission Field (이하는 KMF로 표기함) (March 1920), 60.
2) Harry A. Rhodes, “Mission Methods for This New day in Korea,” KMF (October 1921), 203.
3) Robert Knox, ″The Revival of An Old Method,″ KMF (January 1919), 10.
4) W. F. Bull, “Personal Evangelism: The Most Urgent Need is More of It,” KMF (January 1919), 6.
5) W. F. Bull, “The Call to Prayer,” KMF (January 1920), 3-7.
6) E. T. C., “The Covenant of Prayer,” KMF (March 1920), 54. 이글이 쓰여질 당시 선교사 48명이 여기에 사인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어서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7) Mr. and Mrs. John Thomas, ″Why We Must have the New Building Now,″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July 1919), 3.
8) 여기에 대해서는 박명수, “이명직 목사와 일제시대 한국성결교회의 부흥운동,” [성결교회와 신학] (성결교회역사연구소, 2002), 78-102.
9) 김인서, “김익두 목사 소전,” [김인서 저작전집] 전 6 권 (서울: 신망애사, 1976), 95.
10) 김인서, “김익두 목사 소전,” 98-100.
11) J. U. S. Toms, ″Indications of the Spirit Working in the South,″ KMF (July 1920), 142.
12) Robert Knox, ″The Sound of a Going in the Tops of Mulberry Trees,″ KMF (February 1920), 32.
13) “Tidings,″ KMF (April 1920), 83-84.
14) C. N. Weems, ″The Revival in the Songdo District,″ KMF (June 1920), 111-112.
15) [동아일보] (1920년 7월 3일); 김인서, “김익두 목사 소전,” 116. 여기에서 김인서는 사상의 혼미가운데서 복음전도에 진력을 다하여야 할 교회가 성경학교를 세우는 대신에 일반학교를 세우게 되었냐고 반문하고 있다.
16) J. S. Gale, ″The Revival in Seoul,″ KMF (January 1921), 4-5.
17) Hugh Miller, ″A Review of the Year,″ KMF (December 1920),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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