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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본 한국교회사]성결교회의 대부흥운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48    등록일시 : 2003-06-19    인쇄
1921년성결교회의 대부흥운동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한국교회는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한국기독교의 원형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사에서 계속되었고, 이것이 한국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오순절이었다면, 1921년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의 전신)의 부흥운동은 성결교회의 오순절이었다.
성결교회는 1907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곧이어 시작된 일제의 무단통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침체를 겪게 만들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을 지난 다음 한국교회는 다시금 부흥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다시금 부흥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일제가 종교에 대하여 다소간 완화된 입장을 갖고, 소위 문화정책을 편 것에 기인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종교적인 각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이 종교활동을 용이하게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신앙적인 각성운동이 없이는 진정한 부흥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부흥은 종교적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결교회는 삼일독립운동 이후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새롭게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성결교회는 이전의 복음전도관이라는 선교단체에서 이제 성결교회라는 보다 조직적인 교회를 형성했다. 또한 성결교회를 설립한 동양선교회 본부가 일본에서 철수하여 한국을 주무대로 삼았다. 이런 것이 성결교회의 부흥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1921년에 경성성서학원에서 이명직 목사의 간증이 도화선이 된 대부흥운동이다. 이명직 목사는 한국성결교회의 사부라고 불리우는 분이다. 그는 이 부흥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1)
“과거 5, 6년 동안 흑암을 지내여 나온 학원은 이때에 비로소 면목이 새롭게 되었나니, 이번의 부흥은 실로 일부에만 부흥이 아니라, 우리 성결교회를 영적이나 역사적으로 개조하는 부흥이더라. 이 부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회개하고, 거듭나고, 성결의 은혜를 실제로 받는 수양생 뿐만이 아니라 교역자도 다수 있었다. 그래서 이 불길은 지방 각 교회에 파급이 되고, 다른 단체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참된 부흥의 운동은 이때부터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이 사건을 성결교회를 “영적이나 역사적으로 개조하는 부흥”이며, 또한 “성결교회의 참된 부흥의 운동은 이때부터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21년 부흥운동의 배경

1921년 부흥운동의 배경은 무엇인가?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기관지인 「활천」에 “은혜기”란 제목으로 1921년의 부흥운동의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대부흥운동의 배경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신학문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명직은 일찌기 일본에 유학을 하여 출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경제적인 곤란 때문에 계획하였던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겸 동경성서학원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생의 은혜도 체험하고, 졸업하고 나와서 전도사로, 목사로, 성서학원교사로 일하였으나 그의 학문에 대한 욕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명직 목사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
“첫째는 무엇인가? 곧 학식의 욕심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교역을 하려면 문학이 없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법률을 모르면 안 된다. 역사와 철학을 모르면 안 된다. 웅변이 아니면 안 된다. 상식이 없으면 안 된다.’ 하는 나는 이 점에만 착안하고 다른 점에는 주의치 않았다.”
이런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부터는 기도도 성경읽는 것도 게을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빚을 내어서까지 신학문과 신소설을 사서 열심히 읽어 안질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신학문과 신소설에 빠지면서 그는 점점 복음에 대한 확신이 줄어 들고, 주일에 설교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토요일이 되면 주일설교가 극난이다. 가슴이 탄다. 역사소설, 성경, 사림(辭林), 시가서(詩歌書)를 낱낱이 한간방에 펴놓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어떻게 유식하게 할까? 어떻게 비극으로하여 청중의 심정을 흔들까? ... 아 아 나는 참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이명직 목사는 신학문과 전통적인 신앙 사이의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둘째,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갈등을 느꼈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대한민국의 모든 남녀들은 다같이 참여하였다. 이명직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직접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때 설교하고 있던 아현교회(당시는 죽첨정전도관)의 강단을 통하여 독립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이명직 목사의 간증은 이렇다.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운동이 생기었다. 각 교회는 물론이요 전민족적으로 분기하던 때라 나도 가장 애국심이 있는 듯이 풍성학려로 심리가 동변하여 이때부터 사상가인 체, 애국자인 체, 지사인 체 가장하고 강단에 올라서면 그나마도 아주 타락되어 복음에 대한 설명보다도 사상발표나 피가 끓는 듯한 열변으로 애국사상을 고무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3·1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정신적인 갈등을 느꼈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고, 그로 인한 교회의 피해도 엄청났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사회참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묻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가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은 바로 한국교회가 사회참여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때이다.
셋째, 부흥운동의 보다 직접적인 배경은 남녀윤리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선교는 신문화의 전파와 동일시되어 왔다. 그리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인 남녀 유별을 반대하고, 보다 자유로운 이성교제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한국성결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1919년 경성성서학원에는 하나의 스캔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장하와 최홍은의 사건이다. 교수 이장하와 여자 사감 최홍은은 “과도히 친밀하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말았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결국 1920년에 길보른 총리에게 면직되고 말았다.3)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명직 목사에게도 일어났다. 당시에 전도여행은 남자와 여자가 동행하였다. 왜냐하면 부부유별이 엄격한 시대에 여자들에게 남자가 설교한다는 것이 온당치 못하고, 따라서 여자들에게는 오히려 여자강사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집회가 열리면 남녀 강사가 같이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오 년 전 겨울에 충남지방교회에 청함을 입어 갈 때에 어느 여전도사로 동반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교수를 받던 자매라. 고로 그의 사정을 잘 아는 고로 동정을 하여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제의 분의를 지키기에 예의에 어굿난 일은 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번에는 근 일개월이나 동반여행을 하는 중 동정은 육정으로 변하여 자유자유 하면서 아주 파탈하여 버리고, 남여의 분의(分義)를 떠나 남자 동지끼리 교제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다른 사람의 이목도 꺼리지 않고, 부덕됨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중 보는 사람의 의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명직 목사는 결정적인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으나,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이것을 후회하고, 길보른 감독에게 최석모의 통역으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자기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물론 외적인 법으로는 잘못이 없지만 마음의 법으로는 수없이 범죄하였던 것이다.

1921년 부흥운동의 전개

이명직 목사의 이 사건은 1920년 겨울에 일어났다. 그는 이 사건을 후회하였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 그는 여전히 성서학원의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1년 가을학기가 시작되었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학생들 앞에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이 진정 성결한 사람인지,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문자답하게 되었다. 그의 간증은 이렇게 계속된다.
“주께서 나에게 기도할 처소도 가르쳐 주시고, 기도의 문제도 가르쳐 주셨다. 기도할 처소는 멀지 않고, 기도의 문제는 복잡하기도 않고 많지도 않고, 필경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전에는 기도할 때에 학원, 선교회, 교사, 학생, 모든 교회 등 문제가 매우 많고, 복잡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하게 자기에게로만 돌아오게 되었다. 오직 성결을 실험하기로 하였다....나에게 성결을 주시던지, 사명을 거두어 가던지 하소서. 나는 주의 뜻을 이루는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명직 목사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다. 이런 그의 생각은 전형적으로 성결교회적인 것이다.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의 뿌리가 되는 부패성에 있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죄의 뿌리가 되는 부패성의 제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죄악의 뿌리가 제거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명직 목사는 자기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밤을 세워가며 기도했다. 3일째 되던 날 그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아 그때 그 순간 성신의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때에 성신에 충만하게 되었다. 성신의 능력에 포위되었다. 이곳은 락지후(落地後) 처음의 영험(靈驗)이다. 한참 동안 울고, 한참 동안 웃고, 혼자서 춤추고, 취한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었다.” 이렇게 은혜를 체험한 그가 강의실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자기의 체험을 간증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원하는 자는 새벽기도에 참여할 것을 광고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는 이때 시작된 새벽기도회가 성서학원과 한국성결교회 새벽기도회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4) 그 이전에는 성서학원에서는 식사하기 30분 전에 기도회를 갖고, 바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성서학원의 부흥운동에서 시작된 새벽기도회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성서학원의 새벽기도회는 성서학원 옆에 있던 아현교회의 새벽기도회로 이어졌다. 1922년 겨울 아현교회에서는 40일동안 새벽에 모여서 출애굽기를 돌려가면서 읽고, 기도하였는데 이 때에도 전과 같은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 이 40일 새벽기도회가 마칠 즈음에 연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때 전국에서 몰려온 교역자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자기들의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다른 교파들에도 새벽기도회를 갖게 되어 전국적으로 전 교파적으로 확산되었다고 이명직 목사는 설명하고 있다.
1921년 부흥운동의 핵심은 회개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로 개인의 내면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학원은 죄악을 회개하는 몸부림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런 회개는 단지 말로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회개의 열매로서 훔친 물건은 다시 돌려주고, 미워했던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사과하였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런 회개의 열매가 그 당시 어떠했는지는 어떤 날에는 회개하는 편지가 학원에서 200통이나 발송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21년의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이상에서 1921년 이명직 목사의 간증이 도화선이 된 경성성서학원의 부흥운동을 살펴보고, 그것을 분석하여 보았다. 이것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시킨 운동이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이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면 1921년 경성성서학원의 부흥운동도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이명직 목사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각성운동의 전통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대한 철저한 회개요, 그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령의 위대한 역사이다. 우리는 이 전통을 계속 전수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모든 사회의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 내면의 죄성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운동이 아닌가? 우리는 사회개혁도, 프로그램 개발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의 변화이다. 한국교회의 각성운동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좋은 신앙적인 전통을 역사를 변혁시키는 차원으로 승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거기에 적합한 처방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흥운동은 단지 신앙운동으로 끝나지 말고, 새로운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제시해 주는 각성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이명직,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약사] (경성:동양선교회이사회, 1929), 40.
2) 이명직, ″은혜기(하),″ [활천], 1924년 10월, 36-37. 이 간증은 10월과 11월 두 번에 걸쳐서 게재되었다. 다음은 [활천]에 실린 이명직목사의 간증에서 인용한 것이다.
3) 이명직, [성결교회약사], 36-37.
4) 이명직, ″청신(淸晨)기도의 기원,″ [활천] 1956년 6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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