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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무단 통치 시기와 한국교회의 성장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29    등록일시 : 2003-05-29    인쇄
무단 통치 시기와 한국교회의 성장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1884년 한국 개신교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약 10년 동안의 탐색기를 거쳐서 1894년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반 대중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으로부터 1907년 평양대부흥, 그리고 이어지는 백만구령운동 덕분이다. 비록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는 신문화의 전달자로서 한국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고, 이것이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아마도 한국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첫 번째 시련은 1910년 한일합방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한일합방은 많은 한국신자들에게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 구한말 나라가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신앙에 귀의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라가 구원받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한국을 강점, 합방하고 만 것이다. 한국교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태도는 약간 모호했다. 선교사들은 구한말 관료들의 부패를 목격하여 왔다. 이들은 한국이 빨리 근대화되어야 이런 미개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는 서구문화가 한국사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이런 개화가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에 대한 총독부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기독교와 마찰을 피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배후에는 선교사들이 있고, 선교사들은 서방세계에 한국을 소개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만일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통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여론을 조성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식민통치에 장애가 됨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총독부는 개신교를 매우 위험한 세력으로 보았다. 개신교는 총독부의 직접적인 통치에서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었다. 총독부는 개신교를 통해서 반일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개신교를 압박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이런 총독부의 정책을 한국인들은 매우 빠르게 알아차렸다. 한국인들에게 이제 기독교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눈밖에 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전에 기독교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주체로서 이해되었지만 이제 기독교는 반일단체로 지목받게 되었고, 기독교인은 일본헌병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런 압박정책은 1919년 삼일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단통치 시기의 한국교회 성장

왓슨(Alfred W. Wasson)은 “한국교회의 성장”이라는 시카고 대학교의 박사논문에서 한일합방이후 1919년까지의 무단통치기간을 “9년의 허약한 시기”(Nine Lean Years)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 시기의 한국교회는 이전의 급속한 성장에 비교할 때 너무나 성장이 느렸다. 20세기 초 10년이 한국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시기라면 1910년대는 겨우 현상유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대부흥운동 이후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집중적인 선교지역으로 선정하고,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자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남감리교의 경우를 보면, 1911년에서 1919년까지의 한국선교사들의 숫자는 24명이었다. 이중에 남자선교사가 14명이고, 여자선교사는 10명이었다. 이것은 대부흥운동 기간의 선교사들의 숫자보다 배가 많은 것이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사역자들의 숫자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 기간동안 한국인 사역자의 숫자는 126명이었는데, 대부흥운동 기간 동안에는 74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교인들의 숫자는 그렇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어느 면에서는 쇠퇴라고 말할 수 있다. 남감리회의 교인은 1910년에 9,809명이었는데 1919년에는 5,877명으로 축소되었고,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의 연평균 세례교인이 1,137명이었는데 1906년에서 1919년의 년 평균 세레교인은 49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통계는 왓슨이 왜 이 시기를 허약한 9년이라고 불렀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1)

이런 현상은 남감리교만의 일은 아니다. 장로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의 표가 보여 주듯이 1910년에 140,470명이던 장로교신자가 1919년에 겨우 144,062명으로 매우 미미한 증가를 보여 주고 있다.

무단통치의 탄압정책과 교회성장

사실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의 열기를 계승하려고 하였다. 대부흥운동을 경험한 많은 한국교인들은 이제 한국은 얼마가지 않아서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존 모트같은 사람도 한국에 강력한 선교지원을 하게 되면 멀지 않아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기독교국가가 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이어간 것이 바로 백만구령운동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소망이었을 뿐 실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1900년대와 1910년대의 선교정책이 바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지지하여 왔다. 이것은 191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1910년대에는 토착사역자 양성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여 장로교나 감리교가 각각 정규적인 사역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아울러 장로교나 감리교의 경우에 토착교회도 조직화되어 민족교회가 이제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1907년의 대부흥의 열기를 이어가려는 간절함도 여전했다.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외국의 선교부도 전보다 많은 지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의 한국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보다 외적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외적인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강점과 더불어 한국사람들은 일제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는 결코 기독교선교에 호의적이 아니었다. 아울러 일본의 조직적인 박해 때문에 선교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1. 105인 사건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이후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의 탄압사건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최대의 박해사건이기도 하다. 일본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찌 모살미수사건이라는 이름아래 대다수의 개신교 지도급인사를 구속하였다. 당시 일본은 가장 강력한 반일세력으로서 기독교를 주시하고 있었고,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사선을 조작하여 대다수의 기독교지도자들을 구속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증거가 불충분하여 대부분 방면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발생한 이 사건은 기독교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독교의 집회는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경찰은 교회의 집회를 감시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집회는 경찰서에 신고해야 했고, 허락을 받아야 진행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동양선교회(성결교단의 창립자)의 선교보고서에 잘 드러난다. 1911년 여름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여름전도여행을 다니는데 이런 전도집회도 다 경찰서에 신고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전도가 가능할 수 없다. 1912년 개성에서도 성결교회의 노방전도는 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며, 1913년의 신년부흥회도 경찰의 제지 때문에 2회만 열고 중지해야만 했다. 이 당시 동양선교회 선교사 토마스는 일본이 불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며, 기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2)

2. 개정사립학교 규칙
일본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견제는 점점 조직화되어 갔다. 이런 것이 구체화된 것이 1915년 3월에 발표된 ‘개정사립학교 규칙’(改正私立學校 規則)이다. 원래 한국의 신교육은 개신교를 통해 들어왔다. 특히 선교사들의 학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면서 개신교의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모든 교육은 총독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의 교육목표란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사립학교가 장애가 되는 것이다. 일본은 정치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며 기독교가 교육에 손을 떼도록 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이것을 하기는 어려웠다.

일본이 내세운 것이 바로 학교교육에서 종교교육을 배제할 것과 일정한 기준을 내세워서 인가를 받게 하고, 이것을 통하여 사립학교교육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현대식의 공립학교를 세우고, 상대적으로 재정이 열등한 사립학교를 이류학교로 전락하게 하였다. 이제 일본은 자신이 서구문명의 전달자임을 자임한 것이다. 이제 학생들은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보다는 일본인이 세운 공립학교를 들어가려고 하였다. 일본은 교육에 있어서 기독교를 압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3. 포교규칙
‘개정사립학교규칙’이 공포된 지 5개월 후인 1915년 8월에 일본은 ‘포교규칙’(布敎規則)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종교정책은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일본의 천황제의 범위 안에서 일정한 종교를 인가하는 공인제도이다. 이 공인종교에 기독교가 들어가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종교정책의 범주 안에 기독교를 제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포교규칙에 의하면 만일 교회를 개척하려면 그 목적, 책임자, 재정현황, 인원 등을 기재하여 해당 경찰서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경찰서는 이것을 검토하여 인가를 해 주는 것이다. 만일 총독부의 방침에 어긋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인가가 나오지 않는다. 일본은 서구적인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포교규칙이 발표되자 이것은 교회의 설립에 많은 장애를 주었다. 공문서 작성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교역자들이 여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또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구실로 작용했다. 또한 일본 경찰은 포교규칙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무시로 교회에 출입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보통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매우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교회의 성장과 국가의 정책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교회는 박해 가운데서 성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교회에 적대적인 권력아래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10년대 한국교회가 그 이전의 대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적대적인 국가권력 때문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는 사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에서 교회의 성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권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함께 종교의 자유의 증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저자 박명수
보스톤대학교 Ph. D.
서울신학대학교 부교수(교회사)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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