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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백만구령운동과 한일합방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38    등록일시 : 2003-04-30    인쇄
백만구령운동과 한일합방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Ⅰ. 1910년대 후반의 한국의 기독교

1910년은 한국의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884년에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는 1910년 한일 합방을 기점으로 한 시기를 마무리짓는다. 초기부터 한국개신교는 신문명의 상징으로, 민족의 새로운 동반자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이후 한국의 개신교는 조선총독부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개신교를 일제의 식민주의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이것은 결국 교회의 성장에 근본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일제시대 한국 개신교는 일본에 의해서 지원받는 단체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서 견제 당하는 대상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하나님께 국가의 운명을 맡기며, 민족복음화에 나섰다. 이 당시의 상황을 장로교 선교사 게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은 선교의 열기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한국인은 하늘로 눈을 돌리고, “오 주님 이 민족의 상처난 심령을 치료하시고, 당신의 팔로 나를 안으소서.”라고 외칩니다. 최근 어려움이 있은 후 놀라운 능력, 무서운 부흥의 영이 그 나라를 사로잡았습니다. 왕실의 일원, 정부의 고관들, 유학의 보수주의 학자들, 상류층의 여인들, 평민의 가정들, 시골의 가난한 농부들 - 이 나라 각계각층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교회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주목했다. 만일 한국이 복음화가 된다면 한국을 통해서 아시아를 복음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실 일본과 중국은 한국보다 먼저 선교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선교는 한국보다 빠르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국제적인 강대국에 의해서 고통 받고 있는 이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려 하신다고 생각했다.
사실 선교사들은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사회의 개혁이라고 보았다. 선교사들은 나라는 망해 가는데 관리들은 여전히 부정과 부패에 물들어 있었고, 이런 것들이 불만이 되어서 곳곳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종교인들로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건전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거짓말과 같은 부도덕이 횡행하는 나라는 결코 튼튼한 국가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망해져 가는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도덕을 회복하여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민족운동은 민족구성원의 도덕적인 수준과 함께 한다고 보았다. 부흥운동을 통하여 죄악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회개하고, 그리고 회개의 열매로서 구체적으로 배상하는 것은 이런 민족의 도덕성 회복운동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Ⅱ. 백만구령운동의 준비:
철야기도회와 새벽기도회

1903년부터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1907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흥의 열기는 계속되었지만 약간 열기가 식은 감이 없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선교사들과 한국신자들은 이 부흥의 열기를 다시 한 번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런 시도는 일차적으로 남감리교 선교사들로부터 이루어졌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원래 남감리교 선교사인 하디에 의해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1909년에 시작한 백만구령운동 역시 남감리교 선교사들로 시작되었다. 일본이 용의주도하게 한일합방을 준비하던 1909년 초 남감리교 개성선교부의 선교사 갬블, 리드, 스톡스 세 사람이 모여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결핍을 깨닫고,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총 15명의 선교사들이 7월 12일부터 일주일 동안 매일 기도를 주제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기도회를 진행하여 나갔다.
이 기도회에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 날 기도회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이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내리기까지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죄를 내어놓고 자백하며 기도했으며, 4시경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특별히 어떤 선교사는 그리스도가 손을 들고 한국을 축복하시는 환상을 보았다.
남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의 이런 기도회 계획은 다른 한국신자들에게도 전달되었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도 이 기도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 역시 선교사들과 같은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이런 성령의 역사에 감동한 스톡스 선교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5만 명의 영혼을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소식은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같은 해 9월 2일에는 남감리교 서울연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모임에서 남감리교는 “금년에 20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를 결정하고, 미국 본부에 이것을 위하여 10명의 새로운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백만구령운동의 또 다른 근원은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였다. 그는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식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1909년 어느 날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약 두 달 동안 기도를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길선주 목사는 정식으로 광고를 하고 매일 새벽 4시 반에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그래서 며칠 후에는 수 백 명이 모였다.
그 후 새벽기도회는 다른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것은 길선주 목사의 부흥집회와 함께 이루어졌다. 길선주 목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자였으며, 그가 인도하는 집회마다 새벽기도회가 열리게 되었다.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회는 선교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는 그 영적인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에 가서도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Ⅲ. 백만구령운동의 전개

남감리교가 강력한 전도운동을 벌이고자 결정한 다음 1909년 10월 초 서울에서 열린 재한 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남감리교의 구령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을 범교단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자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의 모든 장로교와 감리교가 힘을 합쳐서 오는 일 년 동안 백만 명의 불신자들을 주님께 인도하자는 소위 백만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위해서 3월 20일을 특별기도회로 정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의 한국사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위기를 이용하여 복음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면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가 탄생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아시아선교의 센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위기에 있는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백만구령운동이었다.
이 백만구령운동실행위원회의 의장으로는 게일, 서기에는 밀러, 언더우드와 벙커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당시 한국신자들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었는데 일년 안에 5배가 되는 백만구령의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인 계획이라기 보다는 멸망해 가는 나라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게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만 명의 구령이라는 소리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때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 오늘날에 와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 이 나라는 구세주를 찾고 있다. 오늘은 절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고, 예언할 수도 없다. 오늘이 전도하는 날이요, 이곳이 전도할 그곳이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서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라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요한 고비라고 생각한다.

백만구령운동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전도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 백만구령운동은 사경회와 더불어서 발전하였다. 한국교회선교의 뿌리는 네비어스선교정책이며, 그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경회이다. 이 사경회는 백만구령운동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채널의 역할을 하였다. 거의 모든 선교부는 정기적으로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사경회를 통해서 구원의 근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전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런 성서적인 진리 위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백만구령운동은 부흥운동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백만구령운동의 출발점은 성령의 역사였다.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들이 구령사업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만구령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백만구령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의 부흥운동과 더불어서 진행되었다. 아울러서 윌버 챕맨과 같은 세계적인 부흥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부흥운동을 인도하였다. 챕맨 외에도 애즈베리학장인 모리슨과 같은 수많은 부흥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다. 따라서 백만구령운동은 부흥운동이었다.
셋째, 백만구령운동은 조직적인 전도활동으로 이루어졌다. 백만구령운동은 일시적인 전도가 아니라 조직적인 전도를 했다. 그 중의 하나가 권찰조직을 통한 전도이다. 권찰조직은 주로 장로교에서 시행된 제도로서 신자 10명을 한 묶음으로 해서 조직한 제도로서 신자들 간에 서로 격려하며 상부상조하는 조직이다. 백만구령운동은 이것을 전도조직으로 활용하였다. “10명으로 조직된 이 작은 집단들은 이웃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영향력은 다른 전도방법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 이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바로 옆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매일 매일 복음이란 실제적이고 가치있는 것임을 행동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다.”
넷째, 백만구령운동은 날연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냈다. 날연보란 각 개인이 자신의 직업상 가장 편리한 때에 인근의 비기독교지역으로 나아가 일정한 기간 동안 보수를 받지 않고 전도하기로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즉 날연보란 시간을 내서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수많은 한국신자들이 이 날연보에 참여했다. 부산의 한 사경회에서는 35명이 900일을 작정하였고, 선천에서는 2,200일을 작정하였다. 이와 같은 날 연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별히 1910년 3월 10일은 전국교회가 한꺼번에 전도에 나서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날연보가 적정되면 지역교회의 지도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을 방문하여 조직적으로 전도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서 훌륭한 평신도사역자들이 양성되는 것이다.
다섯째, 백만구령운동은 다양한 전도방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의 전도자들은 단지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문서를 전하면서 전도하였다. 이 백만구령운동을 위하여 엄청난 전도지를 만들었고, 동시에 마가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의 주되심을 전하였다. 또한 이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서 보급하기도 하였다. 백만구령운동의 가사에는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 주여, 우리의 심령의 소원을 허락하소서! / 백만인을 예수에게로 / 오 주여, 복음의 불을 널리 펴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Ⅳ. 백만구령운동에 대한 평가

일부 학자들은 백만구령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백만명을 전도한다는 것이 너무 인위적인 목표며, 둘째 나라가 어려운 때에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 운동이며, 셋째 실제적으로 백만명의 신자를 만들지 못했으므로 실패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평가는 공정한 평가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백만구령운동은 원래부터 영적인 각성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영적인 각성은 전도의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조직화하는데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체 신자가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1년에 백만 명의 신자를 만들겠다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전도만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한국교회는 전도운동과 민족운동을 구분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복음으로 거듭나면 올바른 대한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튼튼한 민족의 기초는 건전한 정신이다. 전도는 바로 이 정신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백만구령운동은 반민족적인 운동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자료에 의하면 수많은 전도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교인의 실질적인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이후 일본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위험한 세력으로 보고, 각종규제를 부과했다. 교회의 모든 집회는 신고해야 했고, 교회의 설립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한일합방이전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의 통로를 얻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한일합방이후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박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히려 백만구령운동과 같은 신앙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한일합방이후 다가온 일본의 무자비한 일제의 무단통치를 견뎌 나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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