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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본 한국교회사]대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성장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39    등록일시 : 2003-03-26    인쇄
대부흥운동과 한국교회의 성장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소장
mspark@stu.ac.kr


청일전쟁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노일전쟁을 통하여 이것이 크게 확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 꼭 10년이 지난 1904년 2월 제물포항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전함 사이에서 대포가 불을 뿜었다. 이것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이것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밀어낸 일본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 러시아의 세력을 제거해야 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서구세력이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봉건체제를 가지고 있는 구시대의 국가였다. 여기에 비해서 일본은 서구의 근대산업을 배워서 급속하게 발전하였고, 그 힘을 가지고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국은 불행하게도 일본의 대륙진출의 희생양이 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위기는 한국선교의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1904년 북장로교선교사 케이블(Elmer M. Cable)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기회의 문이 이전보다 더욱 활짝 열렸다. 이교주의에서 대거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놀라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성공과 현재 우리 앞에 열려있는 놀라운 기회, 그리고 이 상황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소수의 사역자들로 인해서 당황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제시된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한국의 복음화에 재난을 초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일전쟁 이후 한국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것은 노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결과이다. 다음의 표가 보여주는 것처럼 1902년부터 1911년 사이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성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장로교는 이 기간동안에 약 1,205%가 성장하였고, 감리교는 약 409%의 성장을 이루었다.
사실 노일전쟁 이후 한국교회는 선교의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기존의 선교사들은 본국에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여기에 새로운 선교단체들이 속속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진남포와 용강에 안식교가 들어왔으며, 1905년에는 정식으로 안식교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1907년 5월에는 성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 한국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오년 전 한국에는 약 15,000명의 기독교신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150,000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신자의 3배에 해당한다... 이런 숫자의 성장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다시 오기 힘든 선교의 시기라고 주장했다.
또한 1907년에 있었던 윌리암 부쓰 대장의 일본방문을 계기로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아울러서 1906년은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선교사 펜윅이 침레교 계통의 엘라딩 기념선교회를 인수하고, 대한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노일전쟁 이후 구한말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새로운 선교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성장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대부흥운동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운동이었다. 대부흥운동의 시작은 남감리교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디는 일찍이 원산에 와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열매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의 실패를 이렇게 교백하고 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지경대 지역에서 열심히 일했으나, 그곳에서의 선교사역의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 주었고, 나는 사역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한계에 부딪힌 하디는 지역의 여선교사의 기도모임에서 성경공부의 인도를 요청받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자신의 사역에 열매가 없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이 결핍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깊이 기도하는 동안에 문제의 근원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가 원산의 대부흥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둘째, 대부흥운동은 진정한 회개운동이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하디가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불신앙을 고백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하디는 교인들에게 그들이 진실한 신앙을 갖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하디는 그들 앞에 서서 자신의 교만, 강퍅한 마음, 그리고 불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이것은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디는 청중 앞에서 자신의 선교는 실패였으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하였고, 이런 불신앙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평화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하디는 한국신자들에게 참된 신앙을 가지려면 진정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신자들은 참된 회개가 무엇인 줄을 몰랐다. 한국인들은 회개에 대해서 들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런 신앙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디의 공개적인 회개는 회개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하디의 이런 회개는 다음에 이어지는 대부흥운동의 주된 특색이었다.
셋째, 대부흥운동은 배상을 강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변상을 하였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대표적인 변상은 길선주 장로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길선주 장로는 자신이 횡령한 것을 고백한 다음에 그것을 변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후에 하늘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평양의 대부흥 소식은 널리 중국까지 퍼졌다. 중국의 신자들은 평양의 중국상인들에게 평양의 대부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평양의 중국상인들은 많은 한국상인들이 중국의 비단을 사간 다음에 외상값을 갚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외상값을 갚겠다고 와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들이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 중에 외상값을 갚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늦게나마 외상값을 갚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즉 대부흥운동은 단지 입으로 잘못을 고백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변상을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넷째, 대부흥운동은 성경공부와 더불어서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정책은 네비어스의 선교방법이다. 네비어스는 철저하게 성경공부를 강조했다. 이 방법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유교경전 공부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성경공부에 매우 열심이었다. 하지만 많은 선교사들은 기독교신앙이 단지 성경공부에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감리교인들에게 이것은 더욱 분명하였다.
대부흥운동은 이런 성경공부에 능력을 더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신앙이 머리의 신앙에서 가슴의 신앙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했다. 감리교선교사 노블부인은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머리의 신앙이 가슴의 신앙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감리교선교사는 대부흥운동을 장로교의 교리와 감리교의 부흥운동이 결합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다섯째, 대부흥운동은 전도운동으로 이어졌다. 사실 대부흥운동은 원래 전도운동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원한 것은 새로운 신자가 아니라 진정한 신자였다. 1905년 9월 당시 한국에 나와있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의에서 “부흥집회의 첫째 목적은 새신자의 증가보다는 교회 안에 영적인 갱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먼저 깊은 신앙을 갖게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활력이 나오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서 이 결의는 “아무것도 부흥의 열기와 능력만큼 더 잘 전파되는 것은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확실하고 생생하게 간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 땅의 모든 지역을 복음화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자 한국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정교한 이론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이제 몇 년 있으면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백년이 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린다. 초대교회가 오순절다락방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었듯이 한국교회도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신앙공동체로서 구체화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글자 그대로 한국교회에서 오순절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지금 한국교회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땅에 다시 한번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1903년부터 시작된 기도회에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고, 이것은 후에 1905년 재한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안한, 대부흥을 위한 전국적인 기도회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올해는 2003년이다. 대부흥의 불씨가 지펴진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힘을 합하여 2007년에 또 다른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신자들처럼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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