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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 - 박기호 교수(풀러신학대학교 아시아선교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02    등록일시 : 2013-05-31    인쇄

특별기고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Missionary Movement of the Korean Mission)
글_박기호 교수(풀러신학대학교 아시아선교학)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이다. 선교사를 받던 한국 교회가 1980년대부터는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는 다음과 같은 두 기사가 실렸다.
“한국은 신속히 세상에서 두 번째 많은 기독교 선교사 보유국이 되었다.… 미국 다음이고 영국에 앞서 있다. 한국인들은 중동으로부터 아프리카까지, 중앙아시아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160개국 이상에서 서양 선교사들에 합류하였다. 거듭난 열정에 힘입어 그들은 세상의 복음화 하기에 가장 힘든 지역으로 저돌적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그 곳들로부터 추방당하는 사람들로 알려졌다.”1)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한국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한국은 인구의 30 퍼센트가 기독교인이며 한국인들의 선교 운동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아시아의 얼굴을 가진 기독교를 전하고 있다.”2)
<크리스천 투데이>도 한국 교회가 곧 세계에서 제일가는 선교사 파송국이 될 것을 예견하였다.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어떤 나라보다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으며 머지않아 선교 일등국가가 될 것이다.”3)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A) 또한 최근에 한국 선교현황을 발표하면서 한국 교회는 2012년 1월 현재 169개국에 23,331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하였다.4)
세계 여러 교회들이 한국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임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교회는 21세기 선교 운동에 중요하고 특별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본 글에서는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한국 선교 성장에 기여한 요소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한국 교회 선교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제언을 하려고 한다.

한국 선교 약사
한국 교회의 선교역사를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1)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의 선교 (1907-1957), 2) 독립 이후의 선교 (1955-1991), 그리고 3) 근래의 선교(1980-현재)이다. 각 기간의 선교가 그 성격이 독특하므로 각 시기를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의 선교(1907-1957)
한반도 밖에서의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는 일찌기 1907년 자립, 자치하는 한국 장로교 독노회를 조직하였을 때 시작하였다. 첫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명이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들 중 하나인 이기풍 목사가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박락준 박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7명의 안수 받은 목사들 가운데 한 명이던 이기풍이 본토 남단으로부터 96km 떨어진 제주도에 한국 교회 개신교 첫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였다. 노회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고 그 일을 수행할 선교 위원회를 임명하였으며 믿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전체 교회에 특별 헌금을 할 것을 명하였다.”5)
이눌서(William D. Reynold)선교사는 “한국 노회는 세계에 선교 교회로써의 푸른 깃발을 펄럭였다”고 기록하였다.6)
한국 교회가 세계 다른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하자 교인들은 점차 이 선교 운동을 후원하게 되었다. 1909년 한국 교회는 두 번째 그룹의 목사들을 안수하였다. 그들은 9명이었는데 교회는 그들 중 하나 인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켈리포니아와 멕시코에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였다.7) 1912년 한국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되었을 때 교회는 총회 조직 기념으로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인 중국 산동성에 세 가족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로 가결하였다. 세 명의 선교사들은 1913년 그들의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나갔다. “다시금 그 큰 계기에 교회의 기쁨의 표현으로 한국 전역에 걸쳐 감사헌금을 거두고 목사들과 가족들은 중국 산동성에서 중국어로 참된 해외선교를 개척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8)
한국 교회는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약 80여 명의 선교사들을 한반도 밖에 파송 하였다. 선교사들은 제주도, 시베리아, 일본, 켈리포니아, 멕시코, 만주, 산동, 상해, 남경, 북경, 몽골리아 등지에 파송되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한인 이민자들을 섬기도록 파송되었지만, 그들은 본토인들과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언어와 문화가 크게 다른 한인 2세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사역에도 종사하였다.
한국 교회의 선교사역 중에 가장 의미심장하고 위대한 사역은 중국 산동성 선교이다. 그것은 순수한 외국인들을 위한 첫 번째 선교였다. 중국 산동에서의 선교사역은 주권을 잃고 멸시받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교단들이 선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은 가난하고 힘없는 국가였지만 세계에 어리고, 가난한 비서구 교회도 선교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서구 교회들과 달리 한국 장로교회는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할 때 중국 교회와 이미 거기에서 사역을 시작한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상의하고 그들의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중국 교회와 미국 장로교 선교부가 그들에게 할당해 준 지역에서 사역하였고, 자신들의 본국 교회를 선교지에 이식시키려 하지 않고 이명증서를 가지고 가서 중국 교회의 일원으로 사역하였다.
또한 동료 한국인 선교사들과 팀사역을 하며 현지에 있는 중국 교회 및 외국 선교부와 동반자 사역을 하였다. 일본에게 자기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한국 선교사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선교사역을 수행하였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은 각 교단에 주요 역할을 하였다.

2) 독립 이후의 선교(1955-1991)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은 극동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하여 크게 방해를 받았다. 중국에서의 공산 혁명과 한국전쟁은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비록 한국 독립이 1945년에 이루어졌지만 나라는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짧은 기간내에 선교사역을 재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교회는 중국 본토를 제외한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1955년 한국 교회는 두 선교사 가족을 태국에 파송하였고 세계의 다른 나라에 파송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선교지에 새로운 시대의 선교를 하는 한국 교회의 신호탄이었다.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불타는 선교 열정이 전쟁의 파괴된 거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과 파괴와 가난으로부터 회복되기 전부터 그들은 많은 전임 선교사들을 태국, 대만, 일본, 베트남, 홍콩,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네팔, 에티오피아, 오키나와,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루나이, 미국 등지에 파송하였다. 당시 해외 한국 선교사들의 총수는 234명(M2 and M3)이었다.9)
1945년 주권을 회복하였지만 한국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북전쟁을 치루었다. 그리하여 한국 독립 후 30여 년 동안 한국 선교사들은 강력한 정치적, 교회적, 경제적 후원 없이 선교책임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 약자의 입장에서 선교책임을 수행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 및 현지 교회들 아래서 사역을 하거나 동반자 사역을 하였다.

3) 근래의 선교: 풍요 속에서의 선교(1980-현재)
한국 교회가 선교사 파송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이 기간 동안 선교는 ‘풍요 속에서의 선교’(mission from affluence)로 특징지을 수 있다. 폭발적인 교회성장, 경제성장, 이민성장, 외교성장, 높은 교육, 축적된 선교 경험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가 한국 교회 선교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근래의 한국 교회 선교 운동을 증진시킨 것이다.
한국의 풍성한 자원들은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부의 상승은 또한 성령과 말씀보다 물질을 의지하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수혜자인 현지인들이 선교사들과 그들의 물질 자원을 의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선교 성장에 기여한 요소들
다양한 요소들이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에 기여하였다. 그것은 신적요소, 인적요소, 제도적 요소, 그리고 상황적 요소를 포함한다.

1) 신적 요소
부흥운동을 포함한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 한국 교회의 선교성장을 촉진시켰다. 부흥운동, 특히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선교 성장에 기여하였다. 영적부흥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을 주변국에 파송하는데 역동적 활력을 경험하였다. 한국 교회는 매년 봄과 가을에 두차례 부흥회를 가지는 습관을 가졌다. 이 전통이 한국 교회를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 또한 선교 성장에 기여하였다. 병자들을 고치는 일들이 제주도 선교사역에 나타나기도 했다.

2) 인적요소
감사하는 정신, 유능한 지도자들과 같은 인적요소가 한국 교회 선교의 성장에 주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한국인들은 본래 은혜를 받으면 보답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장로회 독노회가 처음 안수 받은 7명의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을 제주도 선교사로 보낸 것은 1907년 독노회 조직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의 표로 그렇게 한 것이다. 한국 장로회 총회가 총회 조직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 세 가족을 파송한 것도 공자와 맹자의 도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두 경우 한국 교회는 전국에 걸쳐 감사연보를 거두어 선교사들을 후원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인적 요소로는 한국 교회의 한국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한국 장로 교회의 첫 목사 중 한 분이었던 길선주 목사,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 한국 국제선교회를 설립한 조동진 박사, 총신대학교 김의환 박사, 한국 대학생 선교회의 김준곤 박사, 한국해외선교회(GMF)의 이태웅 박사가 한국 교회의 선교에 크게 기여한 분들 중에 속한다.

3) 제도적 요소
한국 선교에 기여한 또 다른 요소는 제도적인 요소이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사역을 관장할 선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교회는 또한 서양선교단체들과 동반자사역을 하였다. 한국 학생단체들도 한국 선교 운동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다. 오늘날의 한국 선교 성장의 성공의 많은 부분이 선교 위원회 조직에 기인한다. 조직을 갖춤으로 선교사역은 교회 구조와 선교회 구조가 동시에 사역하였다. 한 조직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다른 조직이 도왔다.
최근에 와서 수백 개의 한국 선교회들이 출현하였다. 예를 들어 미주의 기독교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 한국의 세계선교협의회(KWMA), 세계한인선교사회(WKMF), 그리고 선교한국(Mission Korea)가 그 예이다. 이런 단체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 선교 운동을 크게 촉진시켰다.
초기 한국 교회 선교 위원회는 한국인들과 서양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인 선교사들을 지도하였고 그들이 새로운 선교지로 나가는 일을 도와주었다. 오늘날의 선교사들과 달리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서양 선교부 및 특히 중국에서는 현지인 교회들과 동반자 사역을 하였다.
또한 한국 선교의 광범위한 성장에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학생들은 선교회들을 조직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거나 후원하였다. 한국이 일본으로 부터 독립한 후에 대학들 가운데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총신대학교, 대전대학교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학생 선교 운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 이래 선교한국(한철호)은 매년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선교대회를 2년에 한 번 씩 개최하였다. 선교한국이 개최한 선교대회에 참석한 약 4만 5천명의 참석자들 가운데 2만 9천명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4) 상황적 요소
한국 선교 운동에 이바지한 상황적 요소로는 한국인들의 이민 증거와 국제 선교 운동의 영향, 정보 확산, 한국의 경제성장, 그리고 외국과의 외교관계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은 세계 각 나라에 이민을 하도록 하였다. 이민을 통하여 한인 이민자들을 커다란 선교 역군들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교회가 동행하거나 뒤를 따라 그들이 사는 나라 사람들을 소개시켰다. 이런 일이 북쪽에서는 만주, 시베리아, 남쪽에서는 제주도, 그리고 서쪽에서는 산둥, 그리고 동쪽으로는 하와이 멕시코, 미국의 서해안, 그리고 동경시의 한인 학생들 가운데 일어났다.”10)
한국 선교 운동의 성공은 주로 국제 대회들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첫 중국 선교는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국제 선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와 관련되었고 태국선교는 세계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사역의 결과이다.
신문들과 잡지들을 통한 정보 확산은 한국인 성도들에게 선교 책임을 깨닫도록 고무시켰고 행동하도록 불렀다. 한국의 복음주의 선교회들이 발행한 월간지 는 한국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을 파송하여 후원하는 본국 단체들에게 보급되었는데 커다란 정보 공급원이 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함께 출간한 주간지 <기독신보> (Christian Messenger) 또한 커다란 정보 공급원이 되었다. 이 신문들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들을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기독신보>는 44판에 걸쳐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에 관한 기사들을 연속 게재하므로 한국인들에게 선교정신을 함양시켰다. 이 신문은 또한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는 한인 선교사들에 관한 소식들을 실었다. 오늘날 여러 기독교 신문들과 선교잡지들이 많은 나라에서 사역하는 한인 선교들의 사역에 대한 정보를 공급해주고 있다.
한국 교회의 역동적 교회성장과 더불어 한국의 경제 또한 지난 10여 년 동안 놀랄만한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의 풍성한 자원은 한국선교에 긍정적인 효과도 나타내고 부정적 효과도 나타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성공적인 1988년 올림픽 개최는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오늘날 문호가 활짝 열려 한국인들이 한국 여권을 가지고 거의 모든 나라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선교의 장점과 약점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한국 선교 운동은 장점과 약점이 있다.
한국 선교의 장점으로는 ① 역동적인 교회성장, ② 풍성한 경제적인 자원, ③ 널리 퍼진 한인 이민자들, ④ 외국과 맺은 강력한 외교관계, ⑤ 높은 수준의 교육, ⑥ 오랜 선교역사, 그리고 ⑦ 대 위임령 성취를 위한 깊은 열정과 용기와 헌신을 들을 수 있다.
약점들로는 ① 균형 잡히지 않은 선교신학, ② 단일문화적 관점, ③ 선교지 정보 부족, ④ 부적절한 선교사 배치, ⑤ 부적절한 선교사 선발과 훈련, ⑥ 경쟁적인 개인주의, ⑦ 취약한 선교행정, ⑧ 파송, 수용, 후원 기관간의 협력 부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데는 충실한 반면 사회적 책임을 등한히 해온 경향이 있다. 지금도 많은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 지향적이기 보다 교회 지향적이다. 지도자들은 말과 행위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신학이 방법론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 교회는 정치, 경제, 미디어, 문화, 교육을 포함한 사회 전 영역을 통합하는 선교신학을 수립해야 한다.
요즈음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오랫동안 한국 문화는 본질적으로 단일문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화를 그들이 섬기는 민족들과 교회에 주입시키려는 경향을 갖게 한다. 우리는 현지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어떤 한인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없이 사역하거나 바람직한 전략 없이 사역을 한다. 많은 선교사들이 부적절하게 선발되고 훈련되고 파송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협력을 못하고 현장에 있는 선교사들 간에 경쟁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바른 지식과 경험이 없는 지역 교회 목회자들이 가끔 그들의 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의 사역을 좌지우지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요약과 결론
한국 교회는 교회 시작부터 선교하는 교회였다. 한국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화 하기 어려운 구석에라도 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가려는 의지가 있다. 2020년까지 1백만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하고 2030년까지 10만 명의 정규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는 한국 교회의 대담한 믿음의 계획은 세계에 있는 한국인 신자들을 계속 도전할 것이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인질 사태로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이 좀 주춤하는 듯 하지만 한국 교회는 21세기 선교 운동에서 중요하고 독특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에 관한 이 관찰을 바탕으로 21세기를 위한 선교를 내가보면 한국 교회의 선교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한국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가 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교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란 선교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웃 사랑의 실천이 없는 전도와 선교활동은 사람들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2) 성서적으로 건전하고 문화적으로 맞는 선교 신학을 수립하고 교단의 교리를 이식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선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교회가 계속 역동적인 선교교회가 되도록 교회의 부흥과 개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4) 물질적 자원과 공급 대신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는 선교를 해야 할 것이다.

5) 국내외의 지역 교회들 및 선교 단체들과 동반자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6) 평신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로 하여금 단기선교, 전문인 선교, 비거주선교, 그리고 사업선교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7) 가부장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토착화와 지역 교회들의 독립정신을 방해할 뿐이다, 대신 선교사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네비우스 방법에 따라 한국에서 행했던 것처럼 자립하게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8) 학생들과 다른 신자들을 위한 선교대회를 개최해야 한다.

9) 지역 연구와 선교사의 은사 분석 후 선교사를 배치해야 한다.

10) 과거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21세기의 변화하는 동향에 맞는 선교를 해야 한다.

11) 한국 교회의 선교 운동을 선도할 선교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각주]

1) Norimitsu Onishe, “Korean Missionaries Carrying Word to Hard-to-Sway Places,” New York Times, November 1, 2004.
2) NORIMITSU ONISHI, China's Youth Look to Seoul for Inspiration, January 2, 20.
3) Rob Moll, “Missions Incredible,” Christianity Today, February 24, 2006.
4) 크리스천투데이 1012년 1월 9일자(Chtoday.co.kr 2013년 3월 1일 접속).
5) George Lak-Geoon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n 1832Seoul, Korea: Yunsei University Press. 1929.
6) W.D. Reynolds, “The Presbytery of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Vol. III, No. 11(Ed. by C. C. Vinton and W. G. Cram), Seoul: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1907.
7) Paik 1929: 390; Northern Presbyterian Report for 1910, p. 281.
8) Korean Mission Field, Vol. XXX, No. 8, August 1934.
9) Samuel I. Kim “Korea.” New Forces in Missions. (ed.) by David J. Cho, Seoul: East-West Center for MR&D. 1976: 124.
10) C. A. Clark, “Korean Student Work in Tokyo,” Korea Mission Field, Vol. XI. No. 7, July 1915.

[참고문헌]

크리스천투데이 1012년 1월 9일자
Clark, C. A., “Korean Student Work in Tokyo,” Korean Mission Field, Vol. XI. No.
7, July 1915.
__________ “The Missionary Work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Korean
Mission Field, (Ed. Ellasue Wagner) Vol. XXX, No 8, August 1934.
Kim, Samuel I., “Korea." New Forces in Missions. ed. by David J. Cho, Seoul: East-West Center for Missions Research and Development. 1976.
Moll, Rob, “Missions Incredible,” Christianity Today, February 24, 2006.
Onishe, Norimitsu, “Korean Missionaries Carrying Word to Hard-to-Sway Places,” New York Times, November 1, 2004.
Paik, George Lak-Geoon,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 Seoul, Korea: Yunsei University Press. 1929.
Reynolds, W. D., “The Presbytery of Korea,”Korea Mission Field, Vol. III, No. 11,
(Ed. by C. C. Vinton and W. G. Cram), Seoul: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1907.)


박기호 교수

총신대학교 그리고 동대학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아시아연합신학연구원에서 선교신학석사 학위와 풀러신학대학교에서 선교문학석사와 선교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육군군목으로 사역을 시작해 GMS 소속 필리핀 선교사로 활약했으며 현재 풀러신학대학교 아시아선교학 교수 겸 한국학부 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또한 동서선교연구개발원장이자 아시아선교협의회수석회장으로서 아시아 선교를 위해 헌신되이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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