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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교회성장 - 교회성장세미나]청일 전쟁과 평양의 기독교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510
등록일시 : 200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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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을 통해서 본 한국교회사(2)
청일전쟁과 평양의 기독교 박명수교수(서울신대 교회사) I 우리가 역사를 나눌 때 종종 전쟁을 기준으로 한다. 전쟁은 대부분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만든다. 역사에 있어서 전쟁은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이다. 개신교의 선교가 시작된 지 약 10년 후에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청일전쟁은 1894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나라는 아시아의 천자국으로서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했고,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여기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한국에서 동학란이 발발했고, 스스로 동학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조선은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을 보고 일본은 청나라에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하여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청나라를 등에 업은 구질서와 일본을 배경으로하는 신질서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게 되었고 이것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던 한국사람들에게는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만들었다. 청일전쟁은 한국교회가 일반대중 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한국 대중들은 이제야 세상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청일전쟁이전에 한국기독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몇몇 지식 계층에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을 전후해서 한국기독교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음의 표를 보면 청일 전쟁이후 한국기독교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표: 초기 한국장로교와 감리교의 교인증가 표 출처: [한국기독교의 역사] 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254 위의 표에 의하면 1894년 청일전쟁이후 한국 교인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장로교의 경우 1895년 200명 미만이던 세례교인이 1896년에 2000명이상으로 무려 10배 이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II 청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한국교회는 평양에 선교를 하기 시작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다음 평양은 한국개신교의 요람이 되었다. 청일 전쟁과 평양의 기독교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평양선교, 특별히 장로교의 평양선교는 마펫(Samuel A. Moffet)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마펫은 1890년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았다. 마침 당시의 장로교선교부는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기를 원했다. 그 후보지 가운데 하나가 평양이었다. 평양은 당시 부산 다음으로 큰 도시였으며, 북부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하지만 평양은 부산이나 인천과는 달리 개항장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아직 전면적으로 개방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마펫은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북부지방을 다니면서 기회를 엿 보고 있었다. 마펫은 북부지방 순회전도여행에서 한석진을 만났고, 이 한석진을 훈련시켜서 자신의 조사로 삼았다. 그리고 한석진과 함께 평양선교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당시 평양에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석진의 이름으로 가옥을 매입하고, 그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한석진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리하여 한석진의 집에서 수십 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 모임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평양 장대현교회가 된 것이다. 평양은 매우 보수적인 도시였다.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만 호를 격침시키고, 토마스(R. Thomas)목사를 순교하게 했던 평양은 외국인들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당시 한국사회에는 관리들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렀는데 평양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의 관리들은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이름으로 산 집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잡아 박해하면 돈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 1894년 5월 10일 그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을 하였다. 관리들은 수십 년 전 천주교를 박해하던 방법대로 배교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런 박해를 거치면서 평양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분명해 져 갔다. 평양교인들의 박해소식을 들은 마펫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일부 외교관들은 선교가 금지된 평양에서 선교를 하려고 한 행위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고도 주장하였지만 마펫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평양에서는 일본인도 집을 샀으므로 선교사들도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선교사들이 집을 산 것이 잘못이라면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펫은 어느 누구에게도 여기에 대한 공식적인 통보를 듣지 못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선교사들의 협력자인 한국인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한 것은 분명한 외교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마펫은 미국공사 실에게 외교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공사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마펫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갔다. 그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다. 그는 전보로 공사와 연락하면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일부 외교관은 선교사들에게 평양을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마펫은 자신이 물러서면 자신의 사역자들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펫은 이 사건을 통해서 기독교선교의 자유를 분명하게 획득하기를 원했다. 1894년 봄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중국군에 이어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에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미국정부는 먼저 평양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결과 평양감사는 문책을 당하고, 여기에 대한 손해 배상으로 은화 500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북부지방의 선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가 미국인들에게 선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만일 마펫이 평양관리의 압박에 굴복했다면 그 후로도 계속 압박은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마펫은 외교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은 한국관리들도 기독교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당시 한국의 관료들은 매우 부패했다. 그 결과가 동학혁명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평양의 관료가 기독교인들에게서 빼앗을 것을 돌려주고 변상하는 모습은 교회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마펫은 이 사건이야말로 평양의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출발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III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는 매우 불안하였다. 1884년 여름 평양에는 북쪽에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남쪽에서는 일본군대가 올라온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평양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한 장소는 교회였다. 이미 한차례의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굳게 지킨 기독교인들은 다가오는 불안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를 유지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교회로 몰려들었다. 어떤 여자 신도는 ″여기에 오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평양에서 오직 안정된 장소는 오직 여기뿐입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평화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이미 평양에는 청나라 군대가 진주해 있었고, 서울은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이제 일본군이 평양을 향하여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펫에게 평양을 떠나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마펫은 만일 자신이 평양을 떠나게 되면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평양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위협이 계속 되자 마펫은 하는 수 없이 평양을 떠나게 되었다. 마펫이 평양을 떠날 때 많은 일본군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펫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주었다. 마펫이 최후의 순간까지 평양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사람들에게 마펫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들어 주었다.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청나라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일본의 신식무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중국의 힘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청나라 군대의 잔인함에 비해서 일본군대의 신사다움이었다. 서양식으로 교육을 받은 일본군대는 청나라 군대가 행하는 것과 같은 약탈을 하지 않았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구 문명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한국정부의 개혁을 요구했고, 그 결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상투를 자르고, 한복대신 양복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인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 개혁은 개신교선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개신교에 미쳤던 많은 제약이 사라지게 되었고, 일요일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되었다. 모든 관공서는 일요일에 문을 닫았고, 왕도 휴무를 선언하였다. 이런 변화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의 한국을 위해서 유익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런 변화된 상황은 다른 선교단체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새롭게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들어온 대표적인 새로운 선교단체가 침례교와 남감리교회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마펫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펫을 신뢰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전쟁 후에 평양감사는 마펫을 초청하여 여러 정보를 주었고, 평양주둔 일본사령관도 마펫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사람들은 마펫과 기독교공동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펫은 평양에서 가장 적절한 장소에 새로운 선교부를 세울 수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평양의 선교를 확장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동안에 평양의 신자들은 다 평양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은 평양을 떠나서 자기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전에는 복음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평양에 외쳐졌던 복음은 평양주변의 서북지방으로 확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은 동학과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떻게 평양의 백성들에게 다가왔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동학은 기독교도 가난한 한국인들의 친구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평양 주변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청일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는 1898년에 전국의 장로교신자가 약 7,500명인데 그 중에 평양을 중심으로한 서북지역의 신자가 5,950명이었다. 이것은 서북지역의 장로교회의 전체교인의 79.3%에 해당한다. 이것은 청일전쟁이후 서북지역이 한국기독교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인식했고, 이런 혼란기에 기독교인들이 흔들림이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찍이 평양지역에서 전도자로서 활동했던 김창식은 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예수믿는 사람도 많아지고 교회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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