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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교회성장 - 교회성장세미나]젊은 농촌 목회자가 일구는 희망의 이야기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506    등록일시 : 2004-09-01    인쇄
젊은 농촌 목회자가 일구는 희망의 이야기


갈계서부교회
소속교단: 예장 통합
주 소: 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 704-1
전 화: 063) 626-5057
담임목사: 형정열 전도사
교회창립일: 1953년 11월 7일


“수많은 사역자들이 있지만, 저와 같은 농어촌 목회자들은 빛도 이름도 없습니다.” 이 말은 경남에서 17년 동안 작은 시골 교회를 섬기던 한 목회자가 들려준 나지막한 고백이었다. 그 이후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대해 도움을 주고픈 소망이 남게 되었다. 이런 차에,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한 농촌교회 목회자에게서 그 실마리를 푸는 계기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남원으로 향하였다.

농촌 목회는 젊은 목회자 지망생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목회 현장이다. 이러한 농촌 목회의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기쁨과 도전을 주고 있는 교회가 있다.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한 갈계서부교회이다.
남원역에 도착한 필자를 위해 갈계서부교회의 담임 교역자인 형정열 전도사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차량을 이용하여 남원에서 지리산 I.C.로 빠져 나와 아영면 갈계리에 도착하였다. 마을 어귀에는 무더운 여름 햇빛을 피하기 위해 노인들이 커다랗게 자란 나무 밑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띤다. 모두가 교회 차량을 보더니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다. 젊은 목회자에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서부교회에 일어난 변화들

반세기의 역사를 가진 갈계서부교회는 2003년 2월16일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되었다. 바로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형정열 전도사의 부임에서 비롯된 열풍이었다. 형 전도사는 이제 마흔을 갓 넘긴 젊은 목회자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갈계리가 자신의 고향이며, 갈계서부교회가 모교회인 배경을 가졌다. 목회자들의 영원한 표상이신 예수님도 자신의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으셨다. 그런데 이 용기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고향을 첫 목회지로 삼았다. 그는 고교 전까지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이 교회에서 보냈던 것이다.

그는 이전에 섬기던 목회자의 추천으로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하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에 형 전도사는 부임 부탁을 듣고서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대부분의 성도들의 눈을 떠올리며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기도 가운데 ‘목회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란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을 택하게 되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아는 성도들에게 형정열 전도사가 담임 목회자로서 택한 방법은 새벽기도였다. 부임한 첫 3개월 동안 형 전도사는 주일 설교에 버금가는 수고를 들여 새벽기도회를 준비하였다. 놀랍게도 새벽마다 성도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성도들은 담임 목회자의 리더십을 전심으로 따르게 되었다.

성도 수가 19명인 교회 구성원, 이들은 모두 동시에 교회의 제직들이었다. 한 명의 새신자도 없던 상태에서 형정열 전도사가 부임한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그의 부임 후 매달 등록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새로운 목회자의 부임 후부터 최근까지 23명이 교회에 새로 등록하였다.

이는 교회 전체에 신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도 믿음의 본으로 바뀌어 갔다. 형 전도사는 제직들인 기존 성도들과 새로운 성도들의 목회적 조화를 이루어가기 위해 새신자 교육과 제직 교육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그래서 영성, 지성, 야성의 삼박자를 이루어 나가기위해 노력하였다. 갈계서부교회는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가고 있음을 성도들의 변화에서 발견하고 있다.

등을 미는 목회자, 열리는 주민들의 마음

형정열 전도사가 목회자로 갈계리에 처음 부임할 당시, 교회는 지역 사회에서 외면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지역에 맞는 목회의 방법을 찾고자 모색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지역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노인들은 자주 씻지 못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고심 끝에 형 전도사는 2003년 5월부터 목욕 봉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교역자 생활비의 일부분을 봉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교회 주변의 마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노인들을 모시고 가까운 목욕탕으로 향하였다. 80세 이상인 노인들로 제한을 두었던 것에서, 9월부터는 전체 마을 사람들로 대상을 확대하였다. 8명에서 시작된 숫자는 50명이 넘게 되었다. 요즈음은 교회에서 봉사 비용의 50%을 후원하게 되어서 형 전도사의 주머니 사정을 덜어 주고 있다.

이제는 매월 15일을 목욕하는 날로 정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목욕을 마치고, 성도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말만이 아닌 몸으로 행해지는 점심식사 대접과 목욕 봉사를 통해 교회는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다가갔다.

“저는 부모님과 같은 노인들의 몸의 때를 밀어 드립니다. 그분들을 저의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서 등을 밀어 드립니다. 자신의 등을 밀어주는 목회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갈계서부교회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작년 성탄절, 모든 마을 사람들과 예수 탄생의 기쁨을 누리고자 성탄 트리를 마을 회관에 장식했다. 성탄예배 후에는 전 성도들이 마을 회관에 가서 떡국을 끓여 주민들과 함께 나누었다. 노인 중에 한 사람은 “내가 갈계 마을에 와서 60년 동안 살았는데, 교회에서 성탄의 기쁨을 나눠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라고 말할 정도로 감격해 하였다.

목욕 봉사와 함께 마을을 향한 봉사는 점차 커져 홀로 계신 노인들에게 밑반찬을 나누는 사역도 시행하고 있다. 4-5가지의 기본적인 밑반찬을 가지고 독거 노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신학공부 중에도 형정열 전도사는 사회복지를 복수 전공하였다. 그는 자신이 배운 사회복지의 이론들을 주님의 사랑과 함께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지역 어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였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인식이 180도로 바뀌어졌다. 마을 주민 모두가 교회 차량만 보아도 싱글벙글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주며 반가워한다. 또한 지역 내에 마을의 행사가 있으면, 목회자인 형 전도사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창고가 필요한 경우에도 마을 회관에서 기꺼이 대여해 주고 있다.

형정열 전도사는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계기로, 교회에 매월 한 명의 교인들이 끊임없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더 나아가 5년 이내에 90% 이상의 지역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서부교회의 활발한 봉사는 이웃교회에도 건강한 도전이 되고 있다.

본을 보이고 노력하는 목회자

갈계서부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살전 1:7)를 2004년 교회의 표어로 정했다. 형 전도사는 표어대로 먼저 목회자가 본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섬김의 목회를 하고자 새벽기도회 시작 한 시간 전에 먼저 나와서 준비하였다. 예배당의 전기 불을 켜고, 온도를 알맞게 조절하고, 실내화를 가지런하게 준비하는 역할은 그의 몫이었다.

형 전도사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인가를 점검하고 다짐한다. 그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주님을 잊고 지낸 20대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학업을 위해 전주로 나가면서 신앙을 잃어 버렸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며 웅변 학원을 경영하던 그의 삶은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31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던 그는 남원시의회 의원직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 때 주변에서는 그에게 목회자로 서원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형 전도사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러 고심 끝에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테스트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족들과 일 년간 떨어져 있었다. 그동안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목회자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4번이나 보따리를 싸서 내려오곤 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 아내가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어머님을 모시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서울에 올라가서 수능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고향 근처의 전주에 있는 신학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나 같은 사람도 주의 종으로 쓰시기 위한 섭리가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조기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졸업 후 서울에 소재한 신대원 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도중에, 그의 어머님께서 소천하셨다. 그 때에 가족들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어머님의 소천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가 서울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님의 장례가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현재 성실히 목회하게 되는 점에 큰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많은 노인들에 대한 고귀한 사랑으로 승화된 셈이다.

새로운 갈계 서부교회의 꿈

매일 새벽 3시 반, 형정열 전도사는 교회의 새벽기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달콤한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게 농촌은 희망 찬 사역지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농촌교회는 많은 것이 열악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곳에 대한 건강한 비전을 갖고 있다. 농촌 목회현장은 목회자가 안수 받기 전의 과정 내지는 다른 사역지로 가기 전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앞으로의 교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성도들도 자신들의 목회자를 ‘얼마 있다가 갈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비전이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공유되지 못하고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비전을 제시하고 성도들과 그것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이것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됩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먼저 주저앉아 버리면, 교회는 결코 부흥할 수 없습니다.”

형정열 전도사는 세 가지 비전을 갖고 있다. 첫째, 그는 갈계서부교회에 대한 자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다. 흔히 농어촌 목회는 영성의 중요성보다 봉사에 치중하기 쉽다. 그래서 서부교회는 믿음의 행위, 선교사업과 함께 영적인 사역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경로대학의 운영 시에도 그것만을 치중하지 않고 신앙교육이 병행되도록 하고 있다.

특별히 농촌교회에서는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은 설교 시간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에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은혜, 깨달음, 가르침 등을 담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주일 설교 전에 몇 번이고 반복하여, 본문과 관련 구절들을 미리 외우고 들어갔다. 심지어 예배의 부름을 준비할 때도 가장 은혜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하루가 걸린 적도 있었다. 예배의 순서 중 한 가지라도 소홀한 부분이 없도록 그는 만전을 기했다.
50년이 넘은 갈계서부교회는 아직도 미자립 교회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형정열 전도사는 갈계서부교회가 나누어주는 교회가 될 것을 꿈꾸고 있다. 이웃 교회의 목회자에게서 힌트를 얻은 그는 기도 가운데 솔잎차 원액을 병에 담아 생산하게 되었다. 이 일은 작년 5월부터 준비하여 7월에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의 비전 제시에 부정적이었던 성도들도 이제는 모두 동참하고 있다.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며, 뚜렷한 목적을 제시하였기에 이러한 사역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갈계서부교회는 이 솔입차 원액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성도들은 재정을 투명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목회자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형 전도사는 이 일들이 진행되면서 3년 후에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것이라 선포하였다. 이것을 통해 나오는 수입 중 80%는 교회 건축에, 각각의 10%는 십일조와 구제 헌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솔잎차의 원액을 만드는 일은 교회 전체의 신앙 성숙을 가져오게 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35명이 이상이 앉아서 일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1,000원이라도 자신의 푼돈을 아끼시던 노인들이 먼저 헌금을 하는 모습에서 교회의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둘째, 동쪽에 있는 갈계교회와의 통합에 대한 비전이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8년도 동쪽에 있는 갈계교회가 먼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교단의 분열로 인해 교회가 동·서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형 전도사가 오면서 가장 큰 기도제목이 바로 교회의 하나됨이었다. 하나가 되는 조건이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자고 요청하였다. 만약에 필요하다면 자신도 그만 둘 각오도 하고 있다. 성도들은 처음과는 달리 연합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있다. 우리가 먼저 포용하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지역에 많은 영향력을 펼칠 것이다.

셋째, 이웃 교회와의 연합에 대한 비전이다. 현재 갈계서부교회와 가까이 위치한 교회들과 연합해서 금요 철야를 드리고 있다. 목회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말씀을 전하며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또한 글을 못 읽는 주민들을 위해 한글교실을 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경로대학으로 확장되었다. 목회자들의 조그마한 연합을 통해 교회가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런 사역들이 퍼져 나가면서 기독교적인 문화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연합한다면 농촌교회도 소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거두고 있는 목회의 결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겸손히 언급하였다.

“농촌교회는 거쳐가는 목회의 과정이 아닙니다. 저는 이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은 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합이 필요하지요. 이 모든 것은 저를 사랑해주며 따라준 교회 교인들의 섬김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취재, 글: 김한성 연구원 , john827@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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