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교회성장

교회성장연구소의 월간지로 목회를 위한 다양한 정보를 담고있습니다

교회성장세미나
[월간교회성장 - 교회성장세미나]은사공동체의 5가지 원리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30    등록일시 : 2005-01-31    인쇄
은사공동체의 5가지 원리



홍영기 목사 | 교회성장연구소장, yhong@pastor21.com

한국교회는 제 2의 종교개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1차 종교개혁이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과 믿음에 눈을 뜨게 했다면 제 2의 종교개혁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은사와 사역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운동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은사공동체에서 찾고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다면 놀랍게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공동체가 조직되는 원리입니다.
그레그 옥덴(Greg Ogden)은 교회가 은사공동체로 변화되는 현상을 두고 ‘새로운 교회개혁’이라고 불렀습니다.1) 교회의 갱신은 다름아닌 은사공동체로의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주님의 몸된 모든 교회가 은사공동체로 바르게 설 때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올바른 은사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은사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저는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보편성

은사공동체의 첫 번째 원리는 보편성입니다. 이것은 은사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4장 7절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은사 없는 지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신에게 은사가 있음을 알고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원에 대해서는 많이 가르치지만 은사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1920년대 대공황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양 목장 소유주였던 예이트 씨는 대출한 돈을 갚을 수 없어 목장을 잃어버릴 상황이 되었습니다. 도산 위기에 몰린 예이트 씨는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고, 가족들은 생활고에 허덕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정유회사에서 그 지역에 탐사를 나왔습니다. 조사차 동행한 지질학자가 그 땅에 기름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에 시추권을 요구했고, 결국 계약을 체결하고 땅을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1,000피트 지점에서 거대한 유정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한 유정에서만 하루 8만 배럴의 기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다른 유정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12만 5천 배럴의 석유를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이트 씨가 처음에 그 땅을 사들였을 때 그 밑에는 무궁무진한 기름이 묻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가 이미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부의 보조금으로 살아야 하는 가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실로 백만장자였지만 빈궁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그가 기름이 묻힌 땅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자연적 교회성장을 창시한 크리스천 슈바르츠에 의하면 1,200명의 크리스천 중에 80퍼센트가 자신의 영적 은사를 모르고 있었습니다.2)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은사를 알고 활용하도록 동기부여 해야 합니다. 레이 스테드먼은 『Body Life』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적 재능을 발견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발견할 수 있다. 즉 과거에 무엇을 잘했는지, 지금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흥미진진하게 여기는지, 교회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고려하면 은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은사발견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고 즐기던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인간 됨됨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3)
은사를 발견했으면 이제 은사를 활용하여 사역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에게 보편적으로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에 모든 성도가 일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큰 교회를 담임하는 친구 목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네 교회의 성도 수는 몇 명인가?” 친구 목사는 “한 5,000명쯤 된다네.”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금 물었습니다. “그럼 그 중에서 몇 명 정도가 교회 일을 담당하는가?” 그러자 친구는 “약 500명쯤 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 교회에는 실업자가 무려 4500명이나 있는 셈이군.’ 그렇습니다. 현대교회가 역동적이지 못한 이유는 소수의 성도들만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고, 나머지 성도들은 방관자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은사공동체는 은사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을 갖춘 교회입니다.

2. 다양성

은사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는 다양성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교회에 다양한 은사를 다양한 형태로 공급해 주심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은사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참된 은사공동체에서는 모든 지체의 은사가 가치있게 평가됩니다. 은사공동체에서는 다양성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신비로운 인체 활동을 보면 이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수 없이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세포는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물질을 유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포 안의 밀도가 세포 밖의 밀도보다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포 안의 체액이 항상 일정한 밀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포는 끊임없이 바깥으로 물질을 퍼 나릅니다. 이 때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반투막을 통해 세포 안의 물질이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을 ‘삼투압의 원리’라고 하는데 이런 원리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존속됩니다. 이러한 생명의 원리는 ‘서로 다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포 안과 밖의 밀도가 같게 된다면 삼투작용이 멈추어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양성은 교회공동체의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성령은 서로 다른 은사를 공동체에 허락하십니다. 어느 식사 시간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주인 여성이 식사대접 후에 디저트를 나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엌에서 나올 때 그만 바닥 양탄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봉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청소하려고 걸레를 찾아 나섰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지닌 사람은 “어쩌나, 양탄자를 보고 난 이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위로의 은사를 지닌 손님은 여인에게 급히 가서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위로했습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청소하는 전 과정을 감독했습니다. 또 권면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모두를 즐겁게 했습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손님은 양탄자를 다른 장소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자신의 은사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신앙의 인물이 다양한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음을 보여줍니다. 브살렐의 기능의 은사는 광야에 하나님의 회막을 세웠습니다. 나단의 예언의 은사는 다윗 왕 앞에서 책망의 말을 전달할 수 있게 했고, 솔로몬이 가졌던 지혜의 은사는 그의 법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가진 음악의 은사는 사울의 고통스런 질병을 치유하였으며, 엘리야의 믿음의 은사는 3년 간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어 비가 오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권위의 은사는 하루 삼천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만들었고, 바울이 가졌던 사도와 가르침의 은사는 이방인 선교 사역을 잘 감당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사공동체 안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존중하고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왕이 아침에 정원으로 가보니, 모든 식물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문 곁에 선 참나무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참나무는 소나무처럼 키가 크고 멋지지 않아서 삶을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역시 삶을 비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똑바로 설 수도 없고, 복숭아나무처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라늄은 라일락처럼 키가 크고 향기롭지 못했기 때문에 속이 타서 건강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정원 전체의 식물들이 전부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비꽃은 예전대로 밝고 명랑한 얼굴이었습니다. 왕이 제비꽃에게 물었습니다. “제비꽃아, 모두들 낙심해있는데 작은 꽃인 너는 용감하니 참 반갑구나. 너는 전혀 실망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구나.” 그러자 제비꽃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별로 대단하지 않지만, 만일 당신께서 참나무나 소나무나 복숭아나무나 라일락을 원하셨다면 그것을 심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이곳에 제비꽃도 원하셔서 심으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은 제비꽃이 되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은사공동체에서는 성도 각자가 은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헌신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은사의 다양성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통일되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3. 초월성과 합리성

은사공동체의 세 번째 원리는 초월성과 합리성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초월적인 동시에 일상적인 것을 포함하는 합리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선 은사는 분명히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의 성현 공자는 “나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은 기괴하고 초자연적이고 혼란스럽고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이 가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것, 다시 말해 초월적인 것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의 힘과 지혜를 초월합니다. 예를 들어, 신유의 은사는 인간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능력행함의 은사는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축사의 은사는 눈에 안보이는 영적 세력을 대적하는 힘이 됩니다. 믿음의 은사는 인간적인 믿음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탄지니아의 선교사인 식클러는 믿음의 은사의 초월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가 선교지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배 도중에 갑자기 성난 암사자 한 마리가 밀림에서 뛰어나왔습니다. 그 사자는 한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교인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도한 교인들은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그 원주민 목사는 교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두려워 마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암사자를 향해 외쳤습니다 “너, 사자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갯불이 떨어져 그 암사자를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자 앞에서도 떨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은사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모든 은사가 초월적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사는 상당히 평범한 것인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섬김의 은사, 대접의 은사, 행정의 은사 등은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은사들입니다. 영국 성령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역자 도널드 지(Donald Gee)는 “우리는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선에 서 있다. 우리는 은사 속에서 인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의 초월성을 일상생활에까지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4)
전세계적으로 집짓기 운동, 즉 해비타트 운동으로 유명한 밀러드 풀러는 봉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풀러는 법대를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는데 단기간에 떼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돈에 미친 그에게 실망한 부인이 이혼을 요청합니다. 청천벽력같은 제안을 받은 풀러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사회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참된 부는 봉사하는 삶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가리지 않고 땀을 흘리며 무료로 집을 지어주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즐기는지 『집짓는 일은 즐겁다』(The Excitement is Building)라는 책을 낼 정도입니다. 풀러의 예처럼 봉사의 은사나 구제의 은사는 일상생활에서도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이처럼 올바른 은사공동체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사가 나타나면서도 일상생활에서의 은사도 나타나는 균형을 필요로 합니다.

4. 상호의존성

은사공동체의 네 번째 원리는 상호의존성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사용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은 개별 지체가 서로 연관되어 움직입니다. 공을 차려고 해도 먼저 눈이 공을 인식하고, 그것을 뇌에 알리고, 뇌가 발에게 명령하고, 발이 움직이게 됩니다. 발이 움직이려고 해도 무릎과 발목과 종아리 근육이 함께 움직여야 공을 차게 됩니다. 유기체인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개별 성도의 은사가 상호 활용되지 않으면 건강하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암 치료 방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의사들에 의하면 암 치료에는 p53이라는 유전자의 분석이 관건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p53이라는 유전자는 전체 시스템의 일부로서, 다른 요소들이 변화를 일으킬 경우 이것 역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암을 치료하려면 벽돌집에서 블록 하나를 뽑아내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몸이라는 시스템 전체를 치료해야 암이 치료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은사공동체도 이처럼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지체가 무너지면 다른 지체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공동체에서는 모든 성도가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 하근찬 씨가 쓴 「수난시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제시대 때 아버지가 강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팔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도 군대에 갔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마을 읍내의 기차역까지 마중나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한쪽 다리가 잘려져 있는 장면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는 팔이, 아들은 다리가 잘려 나간 것입니다. 이 두 부자는 비통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개천 위의 외나무다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건널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 때 결국 아버지가 아들에게 등을 내밉니다. 아들은 처음에는 업히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지못해 아버지의 등에 업힙니다. 두 다리가 성한 아버지는 아들을 등에 업고, 두 팔이 성한 아들은 아버지를 꼭 잡았습니다. 그들은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걱정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교회공동체가 서로 협력할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벤처 기업들이 탁월한 아이디어나 혁신적인 기술이 있으면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기술 개발에 열중합니다. 그러나 뛰어난 아이디어가 곧바로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가 필요한데 그것이 ‘팀워크’(collaboration)입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의 전설적 벤처 투자가인 존 듀어(John Doerr)는 투자기업을 고를 때 팀워크를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매년 그에게 2,500개의 회사가 투자지원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자신의 기술, 상품, 서비스를 선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존 듀어는 그런 것보다는 회사의 핵심적인 팀의 실력과 인격, 그리고 팀워크를 본다고 합니다. 기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서로 의존하여 유기적으로 일하는 협동정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은사공동체에서는 하찮게 보이는 지체도 소중하며 또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2절은 “이 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슈바이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연극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에게는 주연도, 조연도, 어떤 배역도 맡겨지지 않았습니다. 배역을 받지 못한 그는 남은 학생들과 함께 박수치며 응원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들은 그 연극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의 어머니도 아들이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슈바이처야, 넌 어떤 배역을 맡았니?” “저는 그냥 박수치고 응원하는 거예요.” “그래, 참 잘 맡았구나. 그게 제일 좋은 역할이란다.”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섭섭해 하고 기분나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어머니는 감사해 하며 오히려 눈에 안보이는 역할을 맡은 슈바이처를 칭찬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서도 덜 중요하게 보이는 역할이나 은사들을 인정하고 칭찬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가 서로 은사를 가치있게 생각해고 협력해야 그리스도의 몸을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5. 목적성

마지막으로 은사공동체의 다섯 번째 원리는 목적성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음을 교회가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는 은사에 대한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느냐와 그렇지 않느냐는 매우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는 낙제를 하면 1년 동안 정학을 시키는 제도가 있습니다. 낙제를 하면 그 기간 동안에는 대학 근처나 집에서 살아도 안되고 오직 제 3의 지역에서 살면서 근신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 10명이 낙제를 했습니다. 대학 당국에서 그들을 놓고 상담을 했더니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버드에 입학한 이후 인생의 장기적인 목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야 다시 공부하며 전진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것이 없었습니다. 닉슨 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도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면 어떠한 도로도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은사의 목적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알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은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은사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느 깊은 밤 어거스틴이 성경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 속에서 주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 때 어거스틴은 깊은 꿈속이었지만 자신의 의식과 신앙을 지배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아니요, 전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주님의 영광만을 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를 사용하든지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또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힘있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은사는 사랑의 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맥고먼은 “물고기는 공중에서 헤엄치지 못하며, 새는 물 속에서 날지 못한다. 은혜로 주어지는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통해서 역사할 수 없다. 사랑은 가장 필수적 요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사의 목적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의 하나인 코카콜라는 세계에 없는 곳이 없고,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코카콜라를 만들었던 사람은 감리교 캔들리 목사의 형인 캔들러입니다. 어느 상점의 점원으로 있던 캔들러는 미국 남부 지역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부 지역의 물은 마시기에 좋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먹을 수 있는 좋은 음료를 개발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코카콜라였습니다. 그는 돈을 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음료를 만들려고 코카콜라를 만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은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고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은사공동체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1. 은사공동체를 세우는 첫 번째 원리는 보편성입니다.
2. 은사공동체를 세우는 두 번째 원리는 다양성입니다.
3. 은사공동체를 세우는 세 번째 원리는 초월성과 합리성입니다.
4. 은사공동체를 세우는 네 번째 원리는 상호의존성입니다.
5. 은사공동체를 세우는 다섯 번째 원리는 목적성입니다.

은사공동체가 올바르게 세워질 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에 보면 이 ‘안에’라는 전치사가 영어의 ‘in’이 아니라 ‘among’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인 개인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 가운데 세워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의 은사로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운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역동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성장클럽 회원 여러분 모두 올해에는 은사공동체를 바르게 세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은총이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미주
1) 그레그 옥덴. 새로운 교회개혁 이야기. (서울: 미션월드 라이브러리, 2000), p. 98.
2)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 사역의 3가지 색깔. (서울: NCD, 2003), p. 42.
3) C. Peter Wagner, Your Spiritual Gift Can Help Your Church Grow, (Regal, 1994), p. 123
4) 오성춘. 은사와 목회. (서울: 장신대 출판부, 2001). p. 78
5) 강영우.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p. 59.
좋아요 0    스크랩 0
Copyright ⓒ 2021 교회성장연구소 주소 : 07239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59 영산복지센터 4층.
대표 :이영훈  사업자등록번호 :113-82-03672  사업자정보확인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13-서울영등포-0784
개인정보관리자 : 김대학   대표번호 :02-2036-7912  팩스번호 :02-2036-7910
이메일 : icg21@pastor21.net   근무시간 -평일 09:00 ~ 17:00  점심시간 : 11:30-13:00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휴무
※ 본사이트의 자료를 다운로드 혹은 가공하여 배포하는 행위는 불법이며,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이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