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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교회성장 - 교회성장세미나]중보기도자의 자기 개발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570
등록일시 : 200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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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자의 자기 개발
교회성장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회성장연구소의 홍영기 목사입니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도 모두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가을의 문턱인 9월에도 여러분의 교회와 사역 위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9월호 특강은 ″중보기도자의 자기 개발″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찰관이 청소년 집단에게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폭행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경찰관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폭도들은 계속 폭력을 가하다가 경찰관을 내버려두고 떠났고 경찰관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길바닥에 흘린 피는 마치 이런 말을 써놓은 듯했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타인의 고난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보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엠 바운즈는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훨씬 더 위대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자가 되려면 부단한 자기개발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위의 사건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사단은 힘없는 영혼들을 괴롭히고 영적 생명을 위협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책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성도들은 참된 중보자가 되어 그들을 사단으로부터 지켜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쓰임받는 중보기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자신의 내면의 경건함을 추구하라 첫째, 중보기도자는 자신의 내면의 경건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정결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중보기도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여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시편 66편 18절에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했고, 야고보서 5장 16절에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04년 웨일즈에서는 거의 십만 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웨일즈에 일어났던 부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판사들은 자기들이 끼는 흰 장갑을 기증했는데, 이는 별로 재판할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간 사건도 별로 없었고, 횡령이나 착복, 강도와 살인 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음주률이 반으로 줄었으며 부흥이 일어나던 해에는 사생아 출산율도 44%로 하락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부어진 데에는 회개가 그 열쇠였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부흥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중보기도자가 먼저 이와 같은 회개를 할 때 부흥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매여있는 사람은 중보기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중보기도자는 개인의 성결과 성숙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중보기도 생활을 이루는 확고한 기반입니다. 이엠 바운즈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내놓고 죽은 설교는 다른 성도들을 죽인다. 모든 것은 설교자의 영적 자질에 달려 있다.″라고 했습니다. 설교와 마찬가지로 중보기도도 중보기도자의 영적 성숙과 경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포용할 수 있는 인격이 필요합니다. 중보기도자는 중보기도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가져야 합니다. 리즈 하웰즈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합니다. 리즈 하웰즈는 자기 마을의 매춘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음식도 그들이 먹는 것처럼 먹습니다. 하루에 두 끼만 먹었는데 빵과 치즈와 수프가 전부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인도에 있는 소녀 과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단지 죽 한 사발을 먹었습니다. 그것도 이틀에 한 번씩 먹었습니다. 모두 중보기도 대상자와 일체감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늘을 떠나 인간과 동일하게 되시는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걸으셨고, 우리가 굶주렸듯이 굶주렸으며, 우리가 절망할 때 함께 절망감을 느끼셨고, 우리가 유혹을 받은 것처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험한 후에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중보기도 대상과 일체감을 가지고 고통을 공유할 때에 참된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노력으로 억지로 일체감을 가지려 하거나, 일체감이 생기도록 조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일체감은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경건이 있을 때에 얻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고, 그들이 느끼는 대로 느끼며, 그들이 보는 대로 보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새로운 이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중보기도의 은사를 개발하라 둘째, 중보기도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중보기도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디 제이콥스는 중보의 은사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기도하고 더 확실하게 응답을 받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중보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 그에게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40년 동안 중보기도를 해오던 분인데 하나님께서 옆에 있던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경책에 그의 이름을 썼습니다. 성경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고, 그 중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또한 할머니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그저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하늘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것이지 이것을 통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할머니는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삶 속에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파레토 법칙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는 파레토 법칙이 적용됩니다. 세상의 20%의 사람이 80%의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의 책 분량이 80%의 내용을 전달합니다. 20%의 정치가들이 80%의 지지투표를 얻습니다. 20%의 세일즈맨이 80%의 보험을 팔곤 합니다. 교회에도 영적인 파레토 법칙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세계 교회의 20%가 80%의 성도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80%의 교회가 20%의 성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헌신된 20%의 성도에 의해 80%의 성도가 움직입니다. 피터 와그너는 자신의 관찰 결과를 통해 교회 안에 중보기도자가 5퍼센트 정도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5%의 이른바 결정적인 소수(critical few)가 중보기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율이 절대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소수의 사람을 발견하여 그들의 은사를 개발시켜 주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개발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은사도 처음부터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족하고 약합니다 그러나 마치 어린 아기가 자라면서 성숙해지듯이 은사도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것 같지만 개발하고 훈련하면 세련되어 갑니다. 가르치는 은사와 같은 자연적인 은사이건, 방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이건 그것을 개발할 때 은사는 활용 가치가 커집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은사가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자의 은사를 개발하려면 교회적으로 일정한 직분을 맡겨주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긍휼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심방전도사로, 봉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집사로, 권면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상담목사의 직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의 직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중보기도자의 직분을 주고 세워준다면 그들이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은사가 나에게는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절히 소망하고 간구하면 은사가 개발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있는 은사의 가능성들을 개발하여 사역을 위해 극대화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3. 중보기도의 생활화를 이루라 셋째, 중보기도자는 중보기도의 생활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동을 심으십시오. 습관을 거둘 것입니다. 습관을 심으십시오. 인격을 거둘 것입니다. 인격을 심으십시오. 운명을 거둘 것입니다.″ 이 말처럼 행동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며, 인격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습관처럼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자는 일종의 파수꾼과 같습니다. 파수꾼처럼 중보기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에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파수꾼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만약 파수꾼이 나머지 시간 동안 충실하고 마지막 5분간 잠을 잤다고 해도 그의 임무는 완전히 무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의 아랍 병사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 당시 소규모의 접전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초소를 열심히 지키던 아랍 병사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보고 초소를 빠져나와 집으로 갔습니다. 누가 이런 밤에 침투를 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유대인 하가나는 아랍의 본부인 세미라미스 호텔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세 명의 정탐꾼이 몰래 기어 들어가 검문소를 통과했습니다. 한 순간 발각되어 사살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험도 없었습니다. 보초병들을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너무나 손쉽게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순간의 방심은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자는 기도를 습관화하여 무시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습관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스톤웰 잭슨은 기도를 생활화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습관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놓았기 때문에 물 한잔을 입에 댈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편지 말미에 기도문을 반드시 첨가했으며, 우편배달부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강의실을 나가고 들어오는 학생들을 위해 단 1분이라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지 뮬러도 ″나는 매일 여러 시간을 기도한다.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나 기도한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이 중보기도를 생활화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태어날 때 아기로 태어나지 거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중보기도의 영웅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훈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저자인 박종훈 집사는 처음부터 매일 7시간씩 새벽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 5분도 기도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1시간씩 기도를 드리기까지는 3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매일 7시간씩 초인적으로 새벽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12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자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되 매일같이 목표를 정하고 조금씩 기도량을 늘려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중보기도가 삶 속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훈련하라 넷째,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올바른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이유는 단지 우리의 회개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보통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중보기도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에 기도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에서 수도사 로렌스의 한 친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적으로 기쁨 속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중보기도자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개발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둘째, 고요한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은 경건의 시간 중 20%만 기도하고 나머지 80%는 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나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 모두 쉽지는 않다. 우리는 인스턴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다리거나 듣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인내한다면 그것에 따라오는 보상은 엄청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머지않아 곧 듣게 될 것이다.″ 기다리고 음성을 듣는 훈련은 침묵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야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사막의 교부인 아르세니우스의 체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르세니우스는 원래 황제의 궁정 학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깊이 깨닫고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떠나라, 침묵하라, 기도하라!″였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로마 항구로 나가 알렉산드리아로 항해하여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막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결국 위대한 교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침묵을 견디는 훈련이 기도의 사람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셋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잠잠히 맡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방법으로 중보기도 하도록 인도하셨다고 해서 다음 번에도 동일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 늘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옛날 어떤 집에 재주를 잘 부리는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워낙 재롱을 잘 부려서 주인이 예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주인은 날씨가 너무 더워 밖에 나가 낮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파리가 날아와서 주위에서 맴돌며 성가시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원숭이는 주인의 잠을 방해하고 주인을 괴롭히는 파리들을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파리들을 붙잡을 수 있을까 궁리했습니다. 그 결과 넓적한 돌을 가지고 와서 주인의 콧잔등에 앉은 파리들을 향해 내리쳤습니다. 원숭이로서는 주인을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코를 크게 다치고 병원에 실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모르면 엉뚱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타인의 곤경을 막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지런히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5. 성령으로 충만하라 마지막으로 중보기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중보기도란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지시를 받아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자는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체험을 하면 기도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 중에 성령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1943년 독일군이 로마에 당도하려는 목적으로 살레노에 이르렀습니다.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리즈 하웰즈는 ″살레노의 기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셨고 갑자기 기도 중에 강하게 역사하셨다. 우리는 찬양하고 기뻐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 이탈리아에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우리의 심령 속에 증거하셨다. 승리는 너무 확연한 것이기 때문에 시계를 보고 우리는 일어나 찬양을 불렀다.″ 그 후 월요일에 독일군이 살레노를 침략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영국군의 지원 없이는 살레노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군대가 교두보를 세우기 전까지는 진격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유 없이 총격이 그쳤고 주위가 죽음과 같이 고요해졌습니다. 총격이 사라지고 밤 11시부터 새벽까지 전혀 독일군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영국군은 교두보를 완성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성령의 체험은 삶에 대한 확신과 강한 믿음을 주며 중보기도의 원동력이 됩니다. 중보기도자의 역할은 의지와 결단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삶을 지속시키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성령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을 초대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것은 흐르는 시냇물 옆에 서서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곁에서 성령의 생수가 흘러가는 상황이라면 엎드려서 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인격적으로 초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모실 때에 성령께서 중보기도를 인도하십니다. 정말로 깊은 수준의 중보기도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구하거나 심지어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기도하시는 것이 깊은 기도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간증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월남 전쟁터에 보낸 한 어머니가 조 목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아들이 걱정이 되어 밤마다 잠을 못 이루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조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성령님은 우리의 빌 바를 아시므로 자매님의 기도를 성령님께 맡기십시오. 성령님께서 대신 기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후부터 이 자매님은 아들을 위해 성령님께서 대신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그 아들이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전방에서 날라 오는 포탄을 피해 3미터 앞으로 뛰어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무서운 힘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그 자리에 엎드려라.″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잽싸게 그 자리에 엎드렸는데 바로 그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분명히 자기가 뛰어가려던 바로 그 지점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청년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자기의 어깨를 누르면서 엎드리라고 소리치던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한 기도를 성령님께 맡길 때에 성령께서 아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고 그를 구해 주신 것입니다.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드리던 어느 목사님이 어느 날 성령께서 기도를 시키셔서 세 시간 이상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잔디를 깎다가 갑자기 방울뱀의 공격을 받았으나 무사했습니다. 또 어느 어머니가 갑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여러 시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도를 드리던 그 시간이 아들이 타고 가던 버스가 다른 버스와 정면충돌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수십 명이 죽었지만 아들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무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중보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강권하심으로 기도할 때에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온전한 성령의 인도를 방해하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내가 세운 계획대로 다 하고, 육신의 정욕도 다 채우고, 취미생활도 하고, 그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문을 열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참된 중보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보기도자의 자기개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중보기도자의 자기개발을 위해서는 첫째, 자신의 내면의 경건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둘째, 중보기도의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셋째, 중보기도의 생활화를 이뤄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최고의 중보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시요, 우리의 모델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보면서 중보기도자로서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남을 위한 중보의 삶으로 사셨듯 그를 따르는 우리도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여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중보기도의 용사가 되어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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