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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세미나
[월간교회성장 - 교회성장세미나]설교의 중요성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11    등록일시 : 2003-01-11    인쇄
교회성장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회성장연구소의 명성훈 목사입니다. 오늘도 회원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다사다난했던 2002년이 가고 200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회원 목사님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과 꿈을 허락해 주셨습니까? 올 새해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성장클럽도 새로운 모습으로 일신하여 목사님들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003년 교회성장특강은 교회성장의 절대적인 요소인 설교에 대해 강의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115호 특강은 ″설교의 중요성″입니다. 미국의 23대 대통령인 에드먼드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디의 설교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드먼드 대통령은 설교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무디의 설교를 들은 에드먼드는 삶이 변화되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3). 말씀전파에 힘쓰라는 권면은 설교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가 그렇게 설교하기 좋은 시대는 아닙니다. 시각 매체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설교듣는 것을 곤욕스러워 합니다. 사람들의 집중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정제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현대에 설교가 존속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나 토론, 영상물 등으로 설교를 대체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곤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설교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과거보다 현대인은 영적으로 더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만큼 현대인의 영혼은 더 공허한 상태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갈급한 영혼을 해갈시켜줄 설교말씀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는 ″오늘 교회의 가장 절실한 필요는 진정한 설교이다. 교회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진실한 설교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는 설교를 폐기해야 할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야 할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는 어떤 면에서 중요할까요? 저는 5가지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이다





첫째,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을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를 통해, 신약 시대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교회 시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시는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이라는 기능적 측면만을 가지고 설교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개신교와 천주교 젊은이들이 모여 ′교회의 날′이라는 행사를 갖습니다. 그 때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놓고 토의가 벌어집니다. 1980년대에 설교가 토의주제로 떠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인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몰아내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삶과 유리되어 있으며 예배를 지루하게 만드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신자를 전도해오면 오히려 설교를 듣고 떨어져나가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설교를 없애자는 극단적 제안을 했습니다. 이것은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동원된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설교의 중요성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지루한 설교 때문에 성도들의 교회이탈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양적 성장의 차원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듯, 하나님은 설교 중에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서울신대 정인교 교수는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말을 걸어오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설교를 신성한 것으로 보고 존중했습니다. 칼빈(J. Calvin)은 ″인간의 입으로 나온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설교 속에서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되 그가 주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실 뿐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대언자로서의 자기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설교말씀은 설교자의 입을 떠나는 순간 인간의 말 이상이 됩니다. 클레버리 포드(D. W. Cleverley Ford)는 ″설교란 강의처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진단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충고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대사로서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습니다. 바르트는 설교를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말씀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설교가 청중에게 감명과 흥미를 안겨다주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였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믿었을 때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물론 설교에 인간적인 요소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의 활동이 축소되지 않습니다. 설교는 신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능력있는 설교가 되려면 신적 요소 뿐 아니라 인간적 요소가 배합되어야 합니다. 특히 설교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설교자는 청지기처럼 위탁받은 말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한 증인들로서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 확신없는 설교는 아무런 힘을 낼 수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에 전하는 행위입니다. 아모스가 말한 것처럼 이 시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며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갈(암 8:11)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은 해결될 것입니다.





2. 설교는 성도들을 살찌우는 영적 양식이다





둘째,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을 살찌우는 영적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영적 음식입니다. 일반적인 음식은 육신만 살찌게 합니다. 하지만 설교는 성도의 영, 혼, 육을 살찌웁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30분 하는 설교가 교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는가?″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30분씩 정기적으로 수십 년 동안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의 교육적 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목회자가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얼마든지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습니다.





이엠 바운즈(E. M. Bounds)는 ″목사란 설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만들지만, 그 설교는 사람을 만듭니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은 자녀들의 육체를 자라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해 전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성장시킵니다. 특히 성경을 잘 가르치는 설교는 성도들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성장 촉진제입니다.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을 양육하려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 즉 말씀에 근거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가르침은 모든 훌륭한 설교의 기초입니다. 가르침이 설교의 전부는 아니지만 설교는 교육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설교에는 가르침이 있어야 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진실하고 풍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시간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감동이 교훈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가르침 없는 감동은 부실한 기초 위에 지은 건물과 같습니다. 가르침과 감동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보폭발의 시대인 지금 오히려 성도들의 성경지식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바나 연구소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미국 기독교인의 25%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0%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또 성령을 하나의 힘이나 권능으로 대상화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60%에 이릅니다. 성도들의 구원관도 문제가 있는데 3분의 1이상이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혼합주의의 탁류 속에서 교육설교는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교육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교육이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불행 중 하나이다. 화려한 주제의 설교는 무한히 많이 있다. 교훈설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참뜻을 알려주지 못하면 수많은 전도설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효과적인 교육을 하는 것은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성경지식 뿐 아니라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도 필요합니다. 교리설교가 딱딱하다는 이유로 회피되고 있지만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찰스 스펄전의 초기 저작에서는 교리설교가 과반수가 넘었다고 합니다. 교리가 결여된 채 단지 위로만 있는 설교는 공허한 외침이 될 수 있습니다.





교육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적용의 과정을 다루는 것입니다. 설교를 강연과 구별시켜 주는 것이 적용 여부입니다. 단순히 진리를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진리를 삶 속에 심어주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8장). 성도들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설교가 훌륭한 설교입니다. 성도들을 말씀으로 살찌우고 행함의 차원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설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이다





셋째,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수천 명을 회개시키셨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은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십니다. 오늘날도 성령에 붙들린 목회자들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하여 설교했습니다. 오늘날의 설교가 힘이 없는 이유는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였던 고든(A. J. Gord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의 침체는 최상의 영감 제공자인 성령을 무시한데서 기인한다. 진정한 설교는 단순히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사용된다.″ 고든의 말처럼 설교자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 프로스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시간이 되었는데도 프로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회 비서가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비서는 ′누구와 대화 중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계속해서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자 비서는 엿들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안 가시면 나도 안 갑니다″하는 프로스의 애걸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궁금증이 더한 비서는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프로스 목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준비는 다했지만 성령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면 혼자 갈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스 목사의 예화처럼 설교자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목사는 한 설교세미나에서 설교자가 구해야 할 것들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 둘째,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셋째, 최선을 다하여 원고 준비를 하되 원고에 의지하지 마라. 넷째,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라. 다섯째,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위해 기도하라. 여섯째,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고 설교하라. 일곱째, 성령의 자유로우신 주권에 융통성 있게 응답하라. 이처럼 성령의 역사에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충만한 설교의 비결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설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죄인을 회개시켜 신자로 만들고, 신자를 변화시켜 헌신자로 만드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오늘날이 설교의 위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때 타임(TIME)지에서 미국 남부의 인종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사 내용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이제 스스로의 무력함을 내보이고 있다. 그 징조들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종차별 금지에 대한 설교가 많아지고 있는데도 교회 안에서는 인종차별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설교를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만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4. 설교는 성도들을 치료하는 힘이다





넷째,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을 치료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종의 영적 병원입니다. 세상의 병원은 육신의 병을 고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병든 마음과 육신을 함께 치료합니다. 사람들은 정신적 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많은 문제를 안고 교회에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설교시간은 어떻게 보면 수술하는 시간과 같습니다. 역동적인 설교는 기본적으로 ′목회적 돌봄′입니다.





해리 포스딕(Harry E. Fosdick)은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포스딕의 명성은 널리 퍼져서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이 관광코스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포스딕 목사의 설교가 사람들을 끌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설교가 상처입은 마음을 아물게 하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던져주었기 때문입니다. 포스딕 목사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회의 핵심은 설교라기보다 상담이다. 사실 모든 설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는 대신 포스딕의 설교를 듣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현대인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해줍니다.





설교가 청중들의 삶과 유리되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Karl Rhaner)는 설교의 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 그것은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이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윌로우크릭의 빌 하이벨스(Bill Hybels)도 ″만약 청중들이 설교에 흥미가 없다면, 설교의 전달법이 극적이라도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가 되려면 청중들의 삶과 관련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마음 속으로 느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마음과 마음이 전달될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기형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기형아가 과연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막대기로 기형아의 한쪽 머리를 때리라고 말했습니다. 한 쪽이 울고 반대쪽이 웃고 있으면 둘이고, 같이 울게 되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가 성도들의 아픔을 공감하게 될 때 치료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성도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책도 열심히 보아야 하지만 사람도 열심히 만나야 합니다. 심방을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를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George Whitfield)는 자신의 일기에서 ″나는 한 주간 독서하는 것보다 오후 심방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중앙교회의 이복렬 목사는 심방이 성경연구와 함께 설교준비의 중요한 축이라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성경만 봐서는 안됩니다. 현실적으로 성도들이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상황에 맞는 설교를 할 수 있고, 교인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5. 설교는 교회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다





마지막 다섯째로,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교회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돌아볼 때 부흥과 갱신은 말씀선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나 존 칼빈, 존 낙스 등은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 부흥운동도 윌리엄 퍼킨스나 토마스 굳윈의 강단 선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서도 설교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서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뒤따랐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점은 강단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설교자의 말씀이 좋은가를 먼저 고려합니다. 1990년도의 한 조사에 의하면 63%의 성도들이 예배시간 중 설교에 가장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또 기독여민회가 2002년 10월 한달 동안 서울, 경기, 전주 지역의 교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의 78%는 예배가 곧 설교라고 응답했습니다. 즉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설교에 큰 기대를 걸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설교는 전도성장, 교육성장, 봉사성장의 세 가지 교회성장을 가져옵니다. 설교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바로 전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설교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불신자를 구원하는 도구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찰스 피니는 ″설교란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그것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혼을 탈취하여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드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성도들이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자기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그래서 설교가 교훈적으로 빠지고 복음전도적인 요소는 배제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구원에 관한 설교, 전도설교를 정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설교는 새신자 정착과 양육에도 큰 효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새신자들이 처음에는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옵니다. 하지만 새신자가 정착하기까지는 설교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허브 밀러(Herb Miller)는 한번 방문한 새신자가 다시 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에 의하면 친구 때문이 9.7%, 예배 때문이라고 답한 비율이 82.7%였습니다. 친구보다는 예배, 즉 설교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는 새신자의 믿음을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새신자는 일대일 양육이라는 친밀한 환경에서 뿐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양육됩니다. 이처럼 설교는 교회의 교육성장을 가져오는 요소입니다.





설교는 또 평신도들을 헌신자로 동기부여하는 통로입니다. 많은 평신도들이 교회 내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실직자로 남아 있습니다. 오브리 말퍼스(Aubrey Malphus)에 의하면 교인들의 90%가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평신도들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설교입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비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이 가져올 유익과 축복에 대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비전이 공유될 때 성도들의 헌신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신념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북전쟁 중에 링컨은 백악관 근처의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설교자인 걸리(Gurley) 목사는 박사 학위가 있는 지적인 목회자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수행원이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각하는 오늘밤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설교는 아이디어가 좋고 성경적이고 멋이 있었어. 하지만 그 설교는 실패했어. 왜냐하면 걸리 박사는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거든.″ 링컨의 말처럼,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헌신된 봉사자로 만드는 것은 목회자의 설교에 달려 있습니다. 훌륭한 설교는 전도와 양육과 헌신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금까지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정리해 볼까요.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이다


둘째, 설교는 성도들을 살찌우는 영적 양식이다


셋째, 설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이다


넷째, 설교는 성도들을 치료하는 힘이 된다


마지막 다섯째, 설교는 교회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다 였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단지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설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불신자가 신자로, 신자가 제자로, 제자가 사역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의 교회에도 역동적인 설교를 통해 많은 성장의 열매들이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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