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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비판과 비판이론(批判理論, Critical Theory)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63    등록일시 : 2003-06-19    인쇄
시론

비판과 비판이론(批判理論, Critical Theory)

우리 속담에 ‘정 각각, 흉 각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친하다할지라도 흉보는 것은 별개라는 뜻이다. 남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가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비난의 수위가 높아만 간다. 비난은 고소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대통령이 고소당하기도 했다. 한국의 고소고발은 일본에 비해 열배이상 많다고 한다. 또 노사간의 갈등은 어떤가? 지하철, 택시, 화물, 병원, 기업, 금속 등 선진국에서는 호외를 발간할 만한 굵직한 대형 노사갈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계파간, 지역간, 보수와 진보간, 사회각계각층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한국사람은 피부와 인종, 그리고 언어와 문화까지 같다. 하물며 땅도 좁아 옹기종기모여 살 수밖에 없는데, 똑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나라치고는 너무 시끄럽다.

과거 군사정권에서야 권력에 대한 비판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당한 쿠데타로 세워진 권력은 군부독재로 이어졌고 철권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의 기득권층이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부당한 혜택의 폐해는 대다수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 때 감옥을 들락거리고 그나마 국가에서 받는 조금의 혜택조차 포기하고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판은 크게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작게는 약한 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용기 있는 외침이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대를 비판하는 것과는 질이 달랐다. 어쩌면 그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나 싶다.

명분은 사라졌는데 습관만 남았는지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총체적인 불신풍조는 저마다 자신의 이권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적 대립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 우리의 모습처럼 서로 상대방을 끌어내려 자신의 이득을 성취하려는 ‘비판’은 군부가 군림하던 십수년전의 ‘비판’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권력의 힘에 움츠리고 짓눌렸던 소외계층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됐고 눌렸던 감정이 일시적으로 표출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맞서 최근까지 사회의 중심부에서 권력의 부수적 혜택을 누려왔던 기득권층이 이제까지 받아왔던 이익을 쉽게 포기할 지 만무하다. 당연히 위기의식은 기득권의 세력을 규합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갈등이야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닌가?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비판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비판이라면 ‘비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생산적인 비판인지, 아니면 갈등만 야기시키고 사회혼란을 가중시키는 소모전으로 비화되는지는 전적으로 비판의 목적과 방법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건전한 비판의 목소리가 약하다. 기왕 서로 비판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건전한 비판이 바람직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면 건전한 비판은 무엇인가? 인텔리겐차(지식인의 사회참여)의 역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사례를 들어보자.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흥하자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사회조사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후에 ‘프랑크푸르트학파(Frankfurter Schule)’로 불리게 되는 연구소의 멤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Max, 1895-1793)’, ‘아도르노(Adorno, Wiesengrund, 1903-1969)’, ‘마르쿠제’와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기술”의 ‘에리히 프롬(Fromm, Erich, 1900-1980)’도 있었다. 이들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정립한 사상이 비판이론(批判理論, Critical Theory)이다. 그들의 목적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치즘과 같은 현실왜곡이나 획일적인 가치관에 따른 불평등과 권력을 계승하려는 획책을 방지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활동은 총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정신분석, 문화, 사회학, 하물며 당시 인류의 대안적 가치였던 맑스주의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나의 사상,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을 시도하던 전통적인 서구의 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활동했으며 현대사상과 문화비평의 기조를 이루는 ‘후기구조주의’ 의 모태를 이루었다. 부분적이나마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생산적인 비판’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비판이론(批判理論, Critical Theory)은 이제 제2세대를 맞이하였다. 최근에는 사회갈등, 국가 통치권과 시민의 권리 등 난해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주창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6-)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2세대 계보를 이어가며 지구촌 전역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구는 무엇이든지 통합하려는 사상적 본능이 있다. 사회갈등도 이처럼 총체적 접근으로 해결을 모색하지만 동양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도리에 호소한다. 공자의 가장 수제자인 자공이 뒷공론을 자주했다고 한다. 아마도 스승 앞에서도 다른 이들의 인물평을 자주 했었나보다. 하루는 자공이 공자 앞에서 다른 사람을 평하자 자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현명하냐? 나는 사람을 논평할 겨를이 없다.”

옛말에 호화불배인(好話不背人) 배인연호화(背人沿好話)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이야기는 숨어서 말하지 않고 숨어서 하는 이야기에는 좋은 말이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우리’문화는 대화와 타협의 조율을 선택하기보다 ‘너죽고 나죽자’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체사회보다 준거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은연한 ‘우리’문화의 덕목이다. 현대사회는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는다. 선도 악도 명분 앞에서 빛을 잃는다. 단지 필요에 따라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할 뿐이다. 누가 정말 옳은 소리를 외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명분과 이익에 따른 주장이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주도하고 있다. 정당 정치인은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지 오래고 교수사회는 계파간의 갈등으로 일찌감치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성직자로서 목회자의 자리도 그리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서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에도 각계각층이 모여서 대화하고 타협해서 억울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없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결코 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가치관의 보고인 성경이 비판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느냐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사야 51장 7절을 보면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지도자가 바른 길을 가고 지식인들이 올바른 말을 하고 목회자들의 선포가 하나님이 이땅에 향하신 뜻에 부합한다면 우리 사회에 더 이상의 갈등은 없을 것이다. 그런 꿈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결론에 대신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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