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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다시 일어나는 젊은이> 부딪쳐야 열린다_정승환 목사(한우리교회)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0    등록일시 : 2014-08-22    인쇄

COVER STORY
2030 다시 일어나는 젊은이_ [젊은이]



부딪쳐야 열린다



글_정승환 목사(한우리교회)



포기하는 세대, 젊은이
한동안 청년들을 ‘3포 세대’라 불렀다. 지속되는 불황 속에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경제신문에 실린 <청년들이 앓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일자리 전쟁에 인간관계를 포기한다는 ‘4포 세대’, 주택구입을 포기한다는 ‘5포 세대’까지 포기 항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의 자녀들, 매주 얼굴을 맞대고 예배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이고, 아직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촌 동생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할 것을 예상도 못하고, 빛나는 청춘을 기대하며 공부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사는 앓고 있는 청년들의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해 준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늘어나는 일자리라 해도 임시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 많다. 고용여건이나 임금은 기성세대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지고 있다.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 많다. 졸업 후, 취업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으면서 청년들의 이자 연체율은 늘고, 신용도도 악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하루아침에 풀릴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쉽지 않은 세상이다.
이와 같이 생존마저 위협받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감당하자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무너진 세상을 회복하자, 이 세상을 복음으로 물들여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푸르른 계절이 오게 하자’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나도 죽을 것 같은데, 무슨 하나님의 사명입니까?”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상황이 다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살아야 하겠는가? 언제일지 알지 못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모든 상황을 해결할 때까지 넋 놓고 살아야 하는가? 물론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 인생 여정에서 생각지 못한 도움, 나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은혜로운 일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약 없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하나님 앞에 최선일까?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을 상황 같으니 다 포기하고 나 몰라라 하며 살아야 할까? 하나님이 주신 비전도 다 내려놓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선일까?



부딪쳐 깨트리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마주해야 할 문제라면, 문제 앞에 도피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때부터 마주하고, 부딪쳐보고,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지 않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두려움과 염려 속에 회피하려는 마음보다는 길을 찾을 때까지 부딪쳐보고, 하나님 앞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삶의 발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 많은 세상, 눈앞에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것이 많은 세상, 이것이 우리가 처한 삶의 환경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 앞에 놓인 삶의 환경이다. 청년의 때라고 이것이 면제될 수는 없다. 시기와 장소마다 좀 더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이것이 청년 때에 유난히 더 커 보이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시대가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동안은 누군가에 의해 벽을 넘어서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온전히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 청년의 시기는 앞으로 계속 부딪쳐야 할 세상과 처음 마주하는 시기이다. 청년의 시기는 내면의 근육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그래서 더욱 더 커 보이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때부터 부딪쳐보지 않는다면, 항상 문제는 거대한 벽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두려움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언젠가 한번 부딪쳐서 넘어야 할 삶의 벽이라면, 지금부터 부딪쳐보는 것은 어떨까?



젊은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
세상에서 생존을 이어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이고, 이 속에서 사명과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더 어려운 시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어떠하고를 떠나서 두려워 회피하는 삶이 그 삶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삶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맞설 수 있는 태도를 먼저 가져보자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가당키나 한 명령이었을까? 그러나 제자들의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일단 부딪쳐보기로 한 것이다. 배반한 유다를 대신하여 팀원을 새롭게 정비하고, 함께 모여서 기도 하며, 주님이 주신 명령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름의 답을 찾아갔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달라’고 말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종살이를 하고 있던 모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백성의 모습을 비전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사명과 비전이 당시 상황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모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신은 못한다고 하나님께 고백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모세가 믿음이 없었다고 말한다. 왜 믿음이 없었을까? 그만큼 눈에 보이는 상황이 믿음을 가지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상황에서 모세가 발걸음을 옮겼다는 점이다. 모세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부딪쳐보기로 한 것이다. 일단 부딪쳐보기로 결심을 하고 순종해보니, 두꺼웠던 문제의 꺼풀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믿음의 사람들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 일단 부딪쳐보려고 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부딪쳐보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도 비전을 주신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 부딪쳐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무엇인가? 그 결과는 뒤로하고, 일단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미리부터 두려워서, 미리부터 결과를 예측하고 다 포기하고 두 손 들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마음에 품고, 부딪쳐가며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마주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물론 역량이 부족하여 깨지고 넘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생각보다 벽이 거대하게 느껴져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지만, 보이는 것은 없는 상황이 계속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부터 두려움과 염려에 싸여 포기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부딪쳐보는 것이 후회를 덜 남기지 않겠는가? 그것이 영원 앞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다.
못 견디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거절당할 두려움에 고백도 못해보고 평생 후회하며 사는 것보다 정성을 담아 고백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 아닌가? 설령, 그 고백의 결과가 거절로 끝나더라도 말이다. 지금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삶의 내공으로 쌓인다. 실패를 결과로 보지 않고, 과정으로 본다면, 부딪치는 순간순간이 성장의 과정이 된다. 결과에 아쉬움이 남을 수는 있지만, 시도 자체는 부끄러움이 없는 정직한 용기였다. 물론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없는 시도로 남을 것이다.



승리하는 패배
이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독일팀이 우승을 했다. 그들은 참가팀 중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전력을 과시하며 상대팀들을 이기고 올라가며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이렇게 독일팀이 승승장구하는 과정 중에는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상대팀이 있었다. 바로 16강전에서 만난 알제리팀이었다. 그러나 경기 상황은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알제리 선수들은 끝까지 몸을 던져서 독일과 맞섰다. 연장전까지 이어진 경기에서 다리에 쥐가 나서 더 이상 달리기 힘든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공이 오면 다시 일어나 투혼을 불살랐다. 경기가 끝난 후 스코어는 2:1로 독일의 승리였지만, 많은 언론들은 알제리팀에게 박수를 보냈다. 알제리팀의 감독도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과 포옹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만약 알제리가 미리부터 독일이라는 거대한 팀을 두려워하고, 뒷걸음질치고, 회피하는 경기를 했다면 경기가 끝난 후 그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보낸 환호와 박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였다. 비록 결과는 패배였지만 누구도 그 삶을 두고 패배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알제리팀은 2014년 독일과의 경기에서 패배했지만, 이 경험이 앞으로 더 탁월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는 패배 같은 패배를 거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열매이다. 승리 같은 패배를 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귀한 열매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미리부터 가진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부딪쳐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삶의 시간이 다 흘러간다면, 그로 인해 후회 속에 과거를 추억한다면, 이는 패배 같은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있는 힘껏 부딪쳐보고, 돌파하려 해본다면 이는 그 결과가 기대와는 다르더라도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박수쳐줄 삶이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삶은 분명히 무언가를 남긴다. 그것이 삶의 또 다른 돌파구로 이어질 수 있다.



부딪치는 삶
하나님은 부딪쳐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룬 주의 백성을 성경 속에 많이 담아 놓았다. 이것을 바라보고 일단 삶에 당면한 문제들 속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할 방법들을 찾아보려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딪쳐보는 삶을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첫째, 가치 있는 비전을 소유해야 한다
인생에 있어 비전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비전은 인생의 목적지요,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전이 하찮은 가치를 담고 있는 비전이라면 부딪칠 만한 담대함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비전이라면 부딪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받고 세상과 부딪쳐보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가치 있는 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비전보다 더 가치 있는 비전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는 성경을 읽으며, 바울의 고백에 놀란 적이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그는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함으로 세상의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비전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생명보다 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자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이것이 가치 있는 비전의 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생명을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바라보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치 있는 비전이 돌파를 시도하게 한다.
성경에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비전이 있다.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다. 신음하고 고통 받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것, 이것보다 더한 비전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위해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을 방법을 찾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위해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 위대한 비전을 우리가 품고 있느냐이다. 시시한 비전은 장애물을 넘어갈 힘을 주지 못한다. 벽을 넘을 추진력을 주지 못한다. 인생의 어려움의 때를 견뎌낼 힘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위대한 비전은 사람을 준비하게 하고, 고난을 이겨내게 하고, 환란의 때를 견디도록 해준다. 가치 있는 비전이 사람을 가슴 뛰게 만든다. 영원한 가치를 담은 삶의 비전을 소유하는 자가 부딪치는 삶을 살 수 있다.



둘째,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신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것은 동행의 약속이다.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을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약속을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체험하고,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한다. 은혜의 자리로 부지런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계속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부딪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 있었는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뜨거운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박해만큼이나 뜨거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필자의 경우, 목회를 하면서 스스로 새벽기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삶에 힘겨운 일이 있을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새벽기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가 나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보내며 속상한 일이 있거나 마음에 괴로운 일이 있으면 속으로 이야기한다. “내일 새벽기도에서 보자.” 기도의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어찌 쉼 없이 부딪치며 나아갈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전도의 자리에서 거절과 냉대를 처음 당하고 나면, 비전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비전이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 가치를 유지할 힘이 다 떨어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말씀을 보고, 기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다보면 다 식어져버렸던 비전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날마다 일어서는 청년
한 청년의 고백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그는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이 매일 힘겨운 일이지만, 그곳에서 버티며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비결은 아침마다 출근하며 가지는 묵상시간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관계가 잘 세워져 있는 사람이 끝까지 간다. 은혜의 통로를 가진 자는 무너지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휘청거리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오뚝이처럼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서 부딪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다들 힘겨운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삶, 힘들다고 주저 앉아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부딪쳐보려고 해야 한다. 어찌되었건 부딪쳐보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미리부터 두려움과 염려 속에 주저한다면, 답을 보지 못한다. 넘어지고 깨지더라도 일단 부딪쳐보자. 부딪쳐야 열린다. 부딪치는 것이 열림의 시작이다.



정승환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Th.M)을 졸업했으며, 현재 한우리 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청년아 부딪쳐야 열린다』(토기장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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