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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설교자료서비스 - 기타자료> 찬양하라, 내 영혼아! -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56    등록일시 : 2011-09-30    인쇄

성경적 설교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그리스 정교회의 찬양 경험



오래전 미국 시카고에서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의 경험이다. 루터란 신학대학교에서 초청받아온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두터운 슬라브족속의 바리톤/베이스 목소리로 찬양하는 걸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예배를 찬양으로 진행하는 듯 보였다. 찬양으로 기도하고 찬양으로 설교하고 또 찬양으로 경배하는 그들의 찬양은 그 넉넉한 몸짓과 그 풍성한 배음의 후광에 감싸여 좌중을 압도하였고 나를 포함한 회중은 그 장중한 분위기에 젖어 자세한 언어의 소통이 없이도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에 푸근해진 경험이 있었다. 그 짧은 경험이 근 20년 다 되도록 내 기억의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걸 보면 그때 그 아름다운 찬양의 순간이 거룩한 전율을 느끼게 했던 모양이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이 지나 나는 지금 이곳 샌 안셀모(San An selmo)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와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머무는 이 집 바로 옆에는 포도나무 담장을 연하여 작고 소박한 정교회 성당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내가 주일에 출석하는 장로교회는 오전예배 밖에 없는지라 황혼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정교회의 저녁예배는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 신묘한 3도 화성의 어우러짐과 흘러가는 찬양의 매혹과 함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닿아 예배당의 마당에 들어서면 그 찬양의 목소리는 보다 선명하게 들린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십여 명의 교인들이 선 채로 성호를 그으며 예닐곱 명의 찬양대원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에 맞춰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말하는 어조로 성직자와 교인들이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신앙고백과 함께 찬양하다가 다시 선율이 붙고 단선율이 화성을 갖춘 3도의 아름다운 공명으로 번져나가는 이 2시간 남짓의 예배에는 우주적인 조화와 균형 가운데 임재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신비감이 느껴진다. 그 모든 내용을 언어적 논리체계로 환원시켜 번역하지 않아도 감동과 감격의 벅찬 울림이 감도는 이 찬양의 신비는 내게 각별한 은혜의 선물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 긴 찬양의 예배와 예전 속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리고 높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여 그밖에 자신의 소원을 빌며 이런저런 개인과 집단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별스럽게 구하는 바가 없어 보였다.
내 찬양이 내 신앙의 여정을 통틀어 이토록 간절하고 극진한 적이 있었던가. 내 몸짓이 그 찬양의 열정 속에 우주의 조화와 신성의 기묘함을 담아내며 만유 가운데 공명된 적은 또 얼마던가. 감동하는 영혼만이 진정으로 찬양한다. 아니, 진정으로 찬양할 줄 아는 자만이 영혼 깊은 곳에서 샘솟는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을 거룩하게 담아낸다.




찬미, 찬양, 찬송의 세분화된 의미



신약성서의 우리 말 번역에서 ‘찬미’, ‘찬양’, ‘찬송’의 뜻으로 풀어낸 동사의 원어들을 조사해 살펴보니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어휘로 정리된다. 첫째, 드물게 사용되지만 psallo라는 단어가 있다(고전 14:15; 엡 5:19; 약 5:13). 여기에서 그 명사형으로 psalmos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 같다. 이 단어는 본래 ‘수금을 뜯다’는 의미로 고대에 현으로 된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를 지칭했다. 거기에서 이 단어는 수금의 반주에 맞추어 찬양을 부르는 것까지 포함하여 확대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로 앞의 경우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eulogeo인데 신약성서에서 이는 형용사형인 eulogetos로 종종 쓰인다. 보통 ‘찬송하리로다’(막 11:9; 고후 1:3; 엡 1:3)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원뜻은 감탄의 어조를 담은 ‘복이 있도다’ 또는 ‘송축 받을진저’에 더 가깝다. 예배와 예전의 맥락에서 하나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찬양으로 복을 빌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뜻이 이 단어의 의미망 속에 포착된다. 셋째와 넷째, 가장 보편적인 의미의 찬양을 뜻하는 동사로 hymneo(막 14:26)와 aineo/ epaineo(행 2:47)가 있다. 전자는 악보와 곡조가 있는 찬양의 의미로 오늘날 찬송가(hymn, hymnal)의 뿌리가 되는 어휘이고, 후자는 신약성서의 찬양 관련 어휘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보통 위대한 성취와 공적을 기리는 칭송과 예찬의 언어와 자세를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각종 어휘의 분석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찬양이든 찬미든, 또는 찬송이든 지극한 정성을 담아 공교로운 음악적인 표현기법과 함께 표현되는 그 모든 행위가 창조주의 존재와 영광을 발견하고 그 정체를 드러내며 그 존엄함을 기릴 줄 아는 피조물의 가장 숭고한 특권이라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욕망으로 똘똘 뭉친 생명체는 그 무엇이라도 본질상 어떤 타자를 기리며 찬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어떤 생명체는 이 우주만물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지고한 자세로 경배하고 노래한다. 또 거기에 아름다운 선율과 조화로운 뜻을 담아 공교롭게 찬양할 줄 안다는 것은 그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대단한 존재 미학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신약성서의 모든 찬양 관련 어휘들과 그 저변의 맥락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감동하는 영혼을 최대치로 표현하며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의 예배 행위를 그 최고치로 드러낸다.




노래로 주님을 송축하는 뜻



앞의 단어들 중에 두 번째로 필자가 설명한 eulogeo/eulogetos는 찬양의 근거가 하나님의 경륜이 가득 찬 구원의 섭리에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이방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미치게 된 신적인 경륜을 종종 이 축복의 언어와 함께 표현한다. 이는 또한 예루살렘에 메시아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그 도성의 주민들이 환영의 뜻을 표하며 반길 때 호산나의 외침과 함께 사용한 찬양의 어휘이기도 하다(막 11:9).
얼핏 생각할 때 축복으로서의 찬양이 우리의 어감과 정서에 어색하게 비칠 수도 있다. 통상 편리하게 사용하는 ‘축복’이란 말이 하나님이 지상의 생명을 향해 은총을 베푸는 ‘강복’과 개념의 혼선을 겪는 터라, 우리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축복할 수 있다는 게 망측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비는(축복하는) 분이 아니라 복을 내려주시는(강복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축복은 사람이 사람에게, 또 사람이 하나님께, 또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상기 어휘는 그 축복이 찬양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냥 메마른 어휘가 아니라 선율과 곡조가 있는 노래로, 그 가운데 정감과 흥분의 열정을 적극 표현하면서 송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찬양의 개념을 포착하면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은 생명임을 자각할 때 하나님을 향해 송축의 언어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할 수 있다. 이러한 찬양의 행위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분이 영원한 창조주 아버지이며 그 아버지가 보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 축복을 담은 찬양의 어휘와 상통하는 언어 행위가 바로 크게 존숭하며 높이는 증폭의 언어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신약성서의 유사 찬양 어휘들로는 megalyno(눅 1:46)와 doxazo(눅 13:13; 고전 6:20) 등이 있다. 전자가 하나님의 존재가 얼마나 무궁하고 광대한지 그 높고 크심을 인정하여 이를 기리고 예찬하는 말이라면 후자는 그 하나님을 빛 가운데 진리와 영광을 담보하는 분으로 존중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다운 모습을 밝히 드러내는 또 다른 찬양의 어휘이다. 흔히, ‘찬미하다’ ‘영광을 돌리다’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한 마디로 이 땅의 피조물이 바라볼 수 없는 놀라운 빛 가운데 아름답게 거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최대한 인정하고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제사/제물로서의 찬송



찬양의 다종 다기한 의미 가운데는 제사로서의 의미도 있다. 기도와 함께 찬양은 모든 성도가 한 가지로 드리는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헌신의 뜻을 담아내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가령,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4-15)라는 구절에서 찬송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배를 통해 드리는 제물로서의 값어치가 있음을 증언한다. 이로써 찬양은 대번에 자신의 입술이 표현하는 감격의 즉흥적인 기분이란 차원을 넘어 그 입술로써 맺어야 할 삶의 열매로 자리매김된다.



히브리서의 상기 구절이 시사하는 찬양의 맥락은 우리가 지상에 머물 영원한 도성이 없이 떠도는 나그네 인생임을 전제한다. 그 나그네의 여정은 정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목표 지향적인 여정이다. 그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의 삶은 물론 순례자의 여정 가운데 즐겁게 열려 있다. 그 즐거움 대신 역경이 밀려와도 메마른 삶의 길 위에 찬양이 제사로 드려지고 제물로 바쳐지는 한 그 순례의 여정은 견딜 만하고 즐길 만한 삶의 길이 될 터이다. 따라서 찬양은 예배의 가장 앞자리에 위치하며, 어쩌면 예배의 전부와 전체가 되어도 무방한 뭇 영혼의 궁극적인 갈망이다. 이 시대 우리 예배와 예전이 종종 세속의 냄새를 풍기며 도떼기시장의 난장처럼 보이는 것은 정갈하게 승화된 찬양의 부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것은 궁극 이전의 욕구를 앞세워 우리 영혼을 궁극의 지극한 정점으로 승화시키려는 제사와 제물로서 찬양의 헌신이 결여되거나 감격이 없는 형식적인 예전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이리라.




찬송을 통한 고난의 극복



찬송은 동시에 풀이 죽은 생명의 좌절과 고난의 장벽을 통과하는 신앙적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는 찬송이 지닌 영적인 힘을 가리킨다. 우리 삶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마음의 중심은 만사형통을 지향하지만 수시로 크고 작은 고난의 환경에 노출되는 게 우리네 일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로 기도도 힘들어질 때 우리는 탄식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 성령이 우리 탄식과 함께 코드를 맞춰 탄식할 때 우리의 탄식은 그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고 창발적인 극복의 의지를 분출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찬양은 자기 극복과 도약의 촉매제로 하나님의 영적인 개입과 동참을 불러일으키며 돌파구를 열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행전 16장 16-40절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서 갇혔을 때 찬양이 어떻게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는지 잘 예시한다. 이 성읍에서 바울은 귀신 들린 한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봉변을 당한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6-18)



귀신 들린 이 여종이 점을 쳐서 그 주인들에게 상당한 수익을 올려주었는데, 바울의 축귀로 그 점술사업의 명맥이 끊기자 분개하여 그들이 바울 일행을 고발하였다. 이로 인해 그 도성의 관리들 앞에 끌려가 바울과 실라는 옷을 찢기고 혹독한 매질을 당한 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거기서 이 두 사람은 그 발이 차꼬에 든든히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또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4-26)



찬송이 그저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표출하는 기분에 맞춰지는 것이라면 이러한 찬송은 미친 짓이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열조는 이처럼 즐거울 때뿐 아니라 힘들고 괴로울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마음을 얽어매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소망 어린 미래를 내다보는 찬양의 힘에 기댄 결과였다. 따라서 야고보서 5장 13절에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말할 때, 이는 고난 → 기도, 즐거움 → 찬양의 형식으로 경직된 이분법의 도식을 가르친 게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즐거울 때 찬양하듯이 고난을 당하고 역경에 부대낄 때도 그것을 넘어서는 비결로 삶을 얽어매는 족쇄와 옥문을 부숴버리는 찬양의 또 다른 괴력에 눈떠야 할 것이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은 제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에 눈뜬 모든 영혼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하고 수행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신앙적 표현 행위이다. 그 표현이 굳이 ‘행위’일 수 있는 까닭은 거기에 메마르고 무딘 목소리가 아니라 풍성한 울림을 동반한 선율 속에 감탄과 감동이 어우러진 영혼의 총체적인 몸부림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찬양은 두 방향으로 그 위기의 조짐을 간파해야 한다. 한 가지는 교회의 제도화된 찬양대가 만들어내는 전문화된 대규모 집단 찬양의 위기이다. 거기에는 세련된 조직과 음악적인 정제미를 통해 예배와 설교의 장식적 분위기를 돋구어내는 기능은 있을망정 우주의 균형과 질서를 수렴하며 창조주의 지고한 영광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자주 실종된다. 또 한 가지는 회중의 예배와 예전에 불리는 찬양이 깊은 신앙적 탐구와 발견 이후 자연스런 감격이 분출되는 식으로 영혼의 고양과 충일감을 이끌어내기보다 대체로 형식적인 예전의 일부로 겉도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찬양의 지엽적인 취급과 소외 현상은 교회에서 찬양대와 그 지도자를 어떤 비중으로 대하는지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나타난다.



언약궤를 운반하는 길목에서 깊이 감격하여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온몸으로 부른 다윗의 찬양과 같이 삶의 진정성을 실어 온전히 제사와 제물이 되지 못하는 의례적인 찬양, 무기력한 삶의 자맥질 가운데 극복과 도약의 의지도 추동하지 못하는 회중 찬양은 결국 개인의 일상적 시간 가운데 찬양의 탈락이라는 기현상을 낳는다. 우리의 신앙적 경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바쳐지는 일상 속의 찬미와 감동의 표현에서 출발한다면, 이 시대의 영성이 보여주는 대세는 경건과 거리가 먼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근원에서 솟구치는 찬양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 숭고하게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자명종이 된다. 자신의 있는 것들을 송두리째 뒤집으며 불거지는 그 근원을 향한 열기를 누가 제어할 수 있으랴. 오늘도 필자의 이웃 정교회의 그 작은 무리들은 선 채로 성호를 그으면서 서로 목소리의 높낮이를 맞춰 우주의 중심을 향해 아름답게 비상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를 모사하는 그 조화와 균형의 갈구 속에, 나는 그 가사의 말뜻을 가끔 놓쳐버려도 뭉클 하는 순간만은 꼭 기억한다. 그 순간이 내게 오로지 한 가지 전갈을 보낸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차정식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B.A.)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M.Div.)
The Divinity School, The University of Chicago (Ph.D.)
전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객원교수, 현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



<저서>
「바울신학 탐구」, 「예수와 신학적 상상력」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 「하나님 나라의 향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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