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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믿음의 발자국> 이단의 발생_전인수 교수(KC대학교 교회사)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63    등록일시 : 2016-06-08    인쇄
초대교회, 믿음의 발자국


초대교회에 닥친 세 번째 도전:
이단의 발


글 전인수 교수(KC대학교 교회사)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세 번째 도전은 기독교 내부에서 생겨난 서로 다른 신학사상이었다. 이를 교회사는 이단으로 정리한다. 우리는 흔히 정통이라는 것이 있고 나서 이단이 등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에서 정통은 이단에 반대하는 과정 중에 형성되어 갔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을 공유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방대하고 체계적인 신학을 갖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이단에 맞서는 과정에서 정통신학을 형성해 갔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외부에서 가해진 도전이었다면 이단의 출현은 교회 내부의 문제였다. 당시 이단은 로마제국과 같은 강력한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회의 일치에 위협을 가하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이에 초대교회는 이단과의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갔고, 주류교회의 정체성을 다듬어 갔다.
초대교회에는 기독교 사상이 발전하고 체계화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교회 내 다양한 신학적 사상이 출현하고 서로 경쟁하고 사라져갔다. 교회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과 세련된 지적 도전에 직면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그에 걸맞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단은 이렇게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과정 중에 출현했다. 때문에 당시의 이단을 교회를 파괴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면 이는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초대교회 이단은 기독교 신앙을 나름 잘 설명하려다가 오히려 기독교를 더 위태롭게 하게 된 이론이다.1) 기본적으로 선한 동기에서 출발했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단의 도전
이단은 처음에 교회가 유대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한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 중에 발생하였다. 유대교의 일신론에 근거했던 에비온파(Ebionites)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에도 신(神)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이 택하신 자’나 ‘참 선지자’로 보았다. 유대적 전통에서 예수를 구약의 선지자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양자론(Adoptionism)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예수가 세례 시에 하나님의 아들, 즉 양자로 인정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스 전통에 압도된 이단으로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가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계를 영과 육이라는 대립적인 관점(이원론)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우주라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는데, 인간의 몸도 이 감옥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별한 영적인 지식(Gnosis)을 통해 우주라는 감옥을 벗어나 본래의 자리인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겼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이 영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물질을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진정으로 연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눈으로 보기에 육체를 입었지만 이는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가현설’(假現設)을 주장했다. 이처럼 영지주의는 창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예수의 성육신과 역사성을 부인한다. 육체에 대해 불신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순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은 희생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교회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르키온(Marcion)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구약성서와 구약적 영향이 농후한 신약성서는 거부하였다. 그는 구약을 아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과 신약에서 말하는 구속주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른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와 대립하기 위해 다른 신인 ‘아바’의 보냄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예수의 탄생기록을 삭제한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는 최초의 성경비평학자였다. 그는 144년 로마교회에서 방출되었지만 자신의 교회를 설립하여 독립하였다. 그는 자신이 정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르키온은 유대교와의 철저한 단절을 시도했다. 그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기독교는 유대교 신앙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당시의 고민을 보여준다. 교회는 구약을 기독교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약을 점차 정경화하였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기독교의 구약적 전통을 인정하였고,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공의(구약의 하나님)와 사랑(신약의 하나님)의 조화라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교회의 제도화 및 조직화에 반대한 운동으로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있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당시를 성령시대라고 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인정하였고, 페푸자(Pepouza)에 새로운 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참 선지자는 엑스터시(Ecstasy) 상태에서 예언을 말할 수 있으며, 또 그 엑스터시 상태에서의 예언은 예언자의 이성적인 지성의 협력 없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제자도의 엄격함을 강조했다. 반면 주류교회는 ‘예언자는 자신의 감각이 유지된 상태에서 비열광적으로 말한다’고 보았다. 208년 직후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가 몬타누스 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몬타누스주의는 긴 기간의 금식을 강조하고, 재혼이나 순교를 피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또한 하늘의 예루살렘을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주장했다.2) 이런 도덕적 엄격함이 테르툴리아누스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 같다.
몬타누스 운동은 오늘날 오순절 운동과 흡사하다. 때문에 이를 초대교회판 오순절 운동이라고 부를만하다. 그러나 교회는 이 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회는 성령의 계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제동을 걸었으며,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교회는 성령을 빙자한 무질서보다 교회의 조직화, 서열화로 방향을 잡아갔다. 몬타누스주의는 지연되는 재림과 나태해진 교회의 신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응전
초대교회는 이단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단에 대한 대처로 교회 안에는 신조(Creed)가 중시되었다. 신조는 초대교회의 공유된 신앙을 가장 잘 이해시키는 이론적 틀과 방법론을 찾다가 나온 공적이고 권위 있는 진술이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신조의 교리에 대한 진술은 부분적이나마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를 보존한다. 이 신조는 정통교회가 쳐 놓은 일종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이 울타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된다. 그러나 이 울타리 밖에 있으면 이는 정통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조는 이단과의 싸움에서 ‘우리’를 확인하는 신앙고백문이었다. 이처럼 신조의 등장은 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도신경은 주류교회가 이단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의 최종적인 형태는 8세기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의 단편적인 형태는 이미 4세기에 보이며, 역사적 기원은 그 이전이라고 해야 옳다. 사도신경은 처음 세례 때에 사용되었다가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발전하였다. 초대교회는 사도신경을 통해 당시 이단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단은 본래 교회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이단적 사상에 공감하였다.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바로 세례를 통해 그 사람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사도신경은 주류교회가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정통신앙을 확인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반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류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사실 훗날 교회사에는 신조의 부정적 기능도 등장한다. 때로 너무 다양하고 번잡한 신조나 신앙고백이 오히려 성경의 단순한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특정교파의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 분열을 촉진하는 부작용이 생겼던 것이다. 때문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미국의 환원운동가들은 ‘그리스도’나 ‘성서’ 이외에 다른 신조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교회사의 역사적 정황에 따라 신조에 대해 그 신학적 이해를 달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시대 때의 사도신경은 그 역사적 가치가 충분했다.
초대교회는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 예수의 성육신과 육체적 부활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는 영지주의가 물질은 악하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창조신을 매우 저급한 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을 악으로 보는 이원론은 예수의 성육신과 육체적 부활도 부인했다. 마지막 심판을 언급한 것은 세상의 종말에 심판 받을 자가 없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내부적 싸움에 대한 응전으로 공통의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었다. 훗날 기독론 논쟁 때에는 공의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이끌어 낸다. 이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신조는 주류교회의 신학적 일치성을 확인하고, 주류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에 대한 확인 작업이었다. 공통의 신조를 고백한다는 것은 주류교회의 신앙에 동조한다는 신호였다. 신학적인 교리는 그 자체가 완전하거나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교리는 최소한 당시 다수의 교회 공동체가 이성적?성경적으로 기독교 진리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답변이라고 인정했을 때 교회 안에서 승인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조에서 이단과의 치열한 전장에서 피아를 구분해야 했던 초대교회의 치열한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신조 외에도 초대교회 당시 이단에 대처하면서 사도적 전승이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는 사도들이 죽고 난 이후 이를 계승한 사람들의 계보를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계보를 통해 영지주의자들처럼 사도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들을 비판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 안에서는 점차 감독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조직화되어 가던 교회의 구조적 특성과 더불어 이단과의 싸움에서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제도는 교회 안에 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감독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비롯한 주교제도가 생겼났고, 이를 정당화한다. 반면 개신교회는 이런 가부장적이고 군주적인 감독제가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의 이상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 사도적 전승을 주교의 계승이 아닌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경 또한 점차 정경화 되어 갔다. 사도 바울의 저작과 사복음서는 교회에서 일찍부터 읽혔다. 히브리서는 저자문제, 요한계시록은 비판적 국가관으로 인하여 정경으로 수용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경(Canon)을 확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도성(Apostolicity)이었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397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회의에서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단과 신조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이단들의 등장은 교회가 수용해야 할 사상과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단의 등장으로 교회는 신학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더 굳건하게 했으며, 때로는 폐쇄적으로 정리해 갔다. 또한 이단을 배제하고 주류교회의 신앙을 확인해 가는 과정 중에 신앙고백이 등장하였다. 때문에 신앙고백은 그 고백이 등장하기까지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조나 신앙고백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학적 이해가 선행되었을 때, 이를 더 깊게, 또한 감동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의미다. 동시에 신조를 올바르게 이해할 때 이를 평가하는 균형 있는 시각도 생긴다. 곧 신조는 당시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 한때 한국 교회 안에는 예배 시간에 이를 암기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이단을 평가하는 풍토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가 신조를 예배 시간에 고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를 세례 때에 고백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를 우리의 신앙으로 수용하느냐의 문제다. 사도신경을 생명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 신자들 중에도 사도신경의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부분이 쓰여 있었지만 현재는 그 내용이 삭제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신자는 드물다. 우리 안에 이미 사도신경에 대한 선택적 접근이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정통교리가 반드시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또한 교리도 역사적으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정통교리는 최소한 교회가 믿는 신앙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래서 정통교리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사는 대부분의 경우 많은 이들이 정통교리보다 더 나은 신앙적 진술을 표현하는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신학적 탐색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진술은 기독교 신앙을 더 위기로 몰아간다. 이것이 바로 이단이다.



그리스도대학교에서 신학을, 서강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전인수 교수는 KC대학교(前 그리스도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를,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
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남경대학교에서 중국근현대사로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신학이 공론화, 사변화하
는 것을 경계하며,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환원운동, 한국 교회의 주체적 신앙운동 및 선교역사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김교신 평전』, 『기독교 한국에 살다』(공저)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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