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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의 추억 - 심방의 실제]어려운 사람, 나는 이렇게 관계를 맺는다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09    등록일시 : 2006-01-31    인쇄


어려운 사람, 나는 이렇게 관계를 맺는다



이상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목회상담학 / su814@hanmail.net

살아가며 늙어가며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반드시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회상담은 이러한 현실적이며 필연적 인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 만나야 하고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나는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 “그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현실적 질문에 목회상담은 구체적인 대화법이라든지,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상담의 궁극적 목적은 “방법론 제시”를 뛰어넘는다. 목회상담은 보다 근원적 답변 제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에 대해 알기보다 “그를 만나야할 필요성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는가?” 되묻는다.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는 이유가 관계에 참여하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에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은 ‘기술’과 ‘기교’를 구하기보다 근원적 물음을 이끄는 ‘세계관’에 목숨 거는 일이다.


‘세계관’(Weltanschauung)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Perspective)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인식된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떤 이는 이를 일생의 특별한 사건들(Meaningful events)로 인식하고 해석한다. 다른 이에게 그것은 그저 날마다 일어나는 일상(Routine happenings)의 연속처럼 여겨질지라도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결단이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존재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절절히 소망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그들이 바라보는 것과 듣는 것은 정녕 세상과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락들1)이 사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2) 바로 이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목회상담이다. 그렇기에 목회상담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회상담은 ‘방법론’(Methodo-logies)이 아니라 ‘세계관(Worldview)을 살아내는 적극적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하십시오’라고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 ‘세상에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세상에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기보다는 관계 맺기를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불안이 내게 있음이 아닐까.


그렇다면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따지기 전 ‘관계 맺기 어렵다고 느끼는 나의 불안에 대한 접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혹자는 ‘어떤 기술이 있어야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닙니까?’ ‘당장 우울증에 시달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일을 경험한 사람들을 찾아가려면 어떤 비결(Know-how)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일러(Baylor)대학의 에반스(C. Stephen Evans)교수는 이에 대해 구체적 방법, 즉 목회상담의 왕도(王道)를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에게 목회상담의 왕도는 방법론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세계관, 즉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다고 주장한다(C. Stephen Evans, 1989: 20, 141).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로 소위 관계 맺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더욱 관계 맺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떤 비결이 있어야 사람을 만나고, 어떤 방법이 있어야 사람을 만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왕도’와도 같은 기술이 없다면 나는 그를 만날 수 없는가? 여기에서 필자는 단언하고자 한다. 어떤 기술이 있어야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목회상담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사교적 기술에 능통한 사람이다. ‘만나기 어렵다’ ‘관계 맺기 어렵다’는 인식은 나의 인식이지 내가 만나려는 그의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은 나의 오해요 편견이다.


그가 어떤 일을 당했건, 어떤 상황에 처해있건 간에, 그를 만날 때 ‘나는 그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의 상황과 처지에 관계없이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 있는 소중한 인격체이다.


더 나아가, 관계 맺길 원하는 나 역시 그가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결코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스위스의 내과의사이며 목회상담가였던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그의 책『강자와 약자』에서 “세상에 강자와 약자는 없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며 단지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 있을 뿐이다”(Paul Tournier, 2000:20-26)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가 만나려는 그는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언제든 우리는 그가 경험하며 아파하는 상황에 처해 질 수 있다는 인간 실존의 연약함에 대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그’가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게 사람 만나는 기술이 없다 해도 그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처지와 조건에서도 말이다. 이것이 목회상담의 세계관이다. 내가 그를 나와 다른 타인인 ‘그 혹은 그것’으로 인식한다면 그를 만나고자 할 때 어쩌면 내게 기술과 기교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곧 그’이며 ‘그가 곧 나’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생각을 뛰어넘어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어떤 관계 맺기 기술과 기교가 필요할까.


유대교 신학자인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시공을 초월한 ‘인격적 만남’을 역설하였다(Martin Buber, 1977:14). 부버의 인격적 만남은 전 존재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나와 너’가 만나는 것이지 ‘나와 그(것)’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는 인격적 만남은 ‘나와 너’의 실존적 동일함을 인식함과 동시에 ‘나와 너’는 공동 운명체요,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동반자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너’라는 존재의 의미가 퇴색된 그래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극작가요 소설가인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표현대로 그것은 무관심으로 형성된 사랑의 비극과도 같은 것이다.3) 무관심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너’가 사라진 ‘나,’ ‘나’가 사라진 ‘너’그래서 ‘나와 너’가 함께 있으나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도, 공유나 공존함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무관심은 관계적 인간이라는 인간의 본유적 상태를 깨뜨리는 근원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소위 관계 맺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와 너’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가 나이며 내가 그이다’라는 생각은 연민과 동정(Sympathy)과는 다른 공감(Empathy)의 태도이다. 내게 과연 ‘공감’이 있는가를 되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여자(Participant)의 자세를 갖게 된다. ‘그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은 ‘나의 삶을 그의 삶과 연결시키겠다’는 의지이며, ‘나와 너’는 한 몸이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개체가 됨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목회상담 세계관으로 행해지는 상담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종의 방법론처럼 소개를 해 본다면, 먼저 상담가는 자신과 내담자가 동일한 선상에 서 있는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한 상담가는 아픔의 중앙에 서 있는 내담자를 공감하며 만나야 한다. 공감하며 만난다는 것은 내담자의 아픔의 자리에 상담가 역시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기에, 나의 아픔의 자리에서 그를 만나 나 역시 그와 함께 아파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함께 아파하는 둘 사이에 흐르는 ‘함께’의 정신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잃게 만든다. 서로 간에 ‘듣는 것’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듣는 것이 말하게 된다.’ 욥의 세 친구는 욥과 함께 밤낮 칠일동안 함께 있었다(욥 2:13). 그러나 그들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욥의 아픔에 귀 기울이기보다 욥에게 어떻게 말할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욥의 세 친구가 욥을 돕지 못했던 것은 욥의 아픔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경은 바울의 입을 통해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증언한다(롬 10:17).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말미암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 신뢰는 ‘서로의 말에 서로가 귀 기울일 때’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내 옆에 있는지 없는지, 그가 내 옆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의 눈에 눈물은 없는지, 입에 한숨이 그득하지는 않은지 들어보아야 하며 또한 바라보아야 한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박동현 교수의 수상집,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하여』에 실린 글 가운데 “그 누구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이라는 글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아내와 같이 있을 틈이 없는 남편은,
자녀와 같이 지낼 시간이 없는 어버이는,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없는 자식은,
교인들과 함께 지낼 겨를이 없는 교역자는,
제자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는 선생은,
좋은 남편, 좋은 어버이, 좋은 자식, 좋은 교역자, 좋은 선생이 되기 힘듭니다
(박동현, 2004:74).

하나님을 향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때로 우리 옆에 누가 있는지 우리는 산만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이야기로 이끌어 내야 한다. ‘나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나와 너’는 하나가 된다. 신뢰를 형성하는 인격적 만남을 이루며 말이다.


넷째, 듣는 것이 말하게 되는 관계, 즉 신뢰가 바탕이 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때, 상담자와 내담자는 함께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나와 그’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없이는 그 상황이, 아픔이, 좌절이 해결될 수 없다는 실존적 인식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아픔을 당한 내담자는 아픔의 자리에서 혼자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오히려 상담자와 함께 아픔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필자의 교내 홈페이지 “목회상담이야기”에 올려놓은 필자의 글 한편을 상담 사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자신을 ‘걸레’라고 표현하던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을 싸잡아 ‘걸레’라는 말로 표현한 뒤 한없이 서럽게 울었던 자매였습니다. 가슴 무거워 긴 한숨 한번 쉬고 싶었으나 그것도 상처가 될까싶어 그저 젖은 눈으로 자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가 돌아 간 뒤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며칠 후 용기를 내 그 자매에게 아래 시가 담긴 글을 보냈습니다. 이 아무개라고 불리우길 원하는 이현주 목사님의 글입니다.

“걸레만큼만”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좋겠네
유리창 걸레는 유리창 보다 깨끗하고
마루걸레는 마루보다 깨끗하고
똥 걸레는 똥보다 깨끗하니
똥을 만나면 똥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마루를 만나면 마루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보다 조금 더 깨끗한
오. 걸레만큼만, 이 세상사는 동안에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참 좋겠네.


이 글을 본 자매가 또 몇 날이 흐른 뒤 찾아와서는 내내 울다갔습니다. 이번에 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나도 울었는데 둘이 울다 자매가 간다길래 자매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돌아가는 자매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정말 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필자가 신앙고백처럼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마른 눈으로는 세상이 잘 보이지만 하나님이 잘 안보이고, 젖은 눈으로는 세상이 흐릿하고 울퉁불퉁 보이지만 하나님이 더욱 잘 보인다’는 말이다. 자매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살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를 만져주고 계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매의 눈물과 한숨에 동참하며 많이 아팠지만 필자나 자매나 모두 하나님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추구를 통해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의 이러한 사례를 읽는 혹자는 ‘그래서 뭐?’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상담이 성공했는가?’ ‘어떻게 그 자매가 변화되었는가?’ 궁금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목회상담은 성공과 실패로 구분되어지는 통계적 방법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 사례를 통해 거듭난 내담자는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가? 실패한 사례를 통해 아파하는 내담자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가? 성공과 실패를 추구하기보다 의미를 추구하기 원했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 추구의 모습을 뛰어넘는 다차원적 인식, 즉 존재(Ontos)를 뛰어넘는 의미(Logos)를 추구하라고 요구한다(Viktor Frankl, 1969:22-26, 73-77). 이러한 인식의 연속선상에서 필자는 글을 읽는 독자 제위께 부탁하고 싶다.


“목회상담을 살아갑시다.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에게 나는 필요한, 아니 너무나 절실한 존재입니다. 찾아가 그의 삶에 참여합시다.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도록 그의 삶에 참여합시다. 그래서 아파하는 그처럼 젖은 눈과 가슴 답답함을 느껴봅시다. 그 가슴 답답한 아픔의 정점에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 봅시다.”

Key Point Box


심방을 위한 관계맺기


1. 관계맺음이란 ′방법′이 아니라 ‘세계관을 살기’이다!!
2. 관계맺기 어려운 사람은 없다. 다만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나의 불안감만이 있을 뿐이다!!!
3. ‘내가 너’이고 ‘너가 나’일 때 진정한 관계맺음은 가능하다!!

이상억 교수
한남대학교 영어영문학(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Faith Evangelical Lutheran 신학교(M.A)
미국 Princeton 신학교 (Th.M/Ph.D)
Instructor of Pastrol Care and Counseling
현 장로회신학대학교 목회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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