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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 <설교자료서비스 - 기타자료> 히브리인들의 영적 실체에 대한 경험과 예수의 부활(1) - 김재진 교수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8    등록일시 : 2011-09-30    인쇄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읽기



히브리인들의 영적 실체에 대한 경험과
예수의 부활(1)


- 말씀을 통한 영적 실체(하나님)에 대한 경험 -




김재진 교수(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최초의 근원적 존재라고 생각하였고 이와 같은 생각은 스피노자와 아낙시만드로스의 범신론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역사와 삶 가운데서의 영적 실체이신 초월자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씀과 음성, 대화로 증언하고 있다. <편집자주>





1. 경험될 수 없는 만물의 근원(아르케?ρχ?)으로서의 신(神)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밀레토스라는 지방에 탈레스(Thales, BC. 624년경~546), 아낙시만드로스(Anaxiamndros, BC. 610년경~545), 그리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5년경~528) 라는 세 명의 철학자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철학사에서는 ‘밀레토스학파’라고 부른다. 밀레토스는 에페소스, 클라조메나이, 콜로폰, 사모스와 더불어 소아시아 연안에 위치한 ‘이오니아’ 지방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들의 철학을 가리켜 일명 ‘이오니아 철학’이라고도 특징지어 부른다. ‘이오니아 철학’의 특성은 ‘자연철학’, 더 자세히 말하면, ‘자연철학적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근원과 원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곧 만물의 존재 근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밀레토스의 탈레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최초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최초의 근원을 ‘아르케’(?ρχ?, Principia)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 ‘아르케’가 모든 만물의 참된 ‘실체’ 혹은 ‘본성’(ο?σ?α= 우시아)이며, 이 참된 근원(根源)으로서, 그것에서 사물들이 생겨나서, 다시 그것으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하였다(참조 롬 11:36; 요 1:3; 고전 8:6; 골 1:16).1) 그래서 그는 이 ‘아르케’를 ‘원소’(στοιχε?α)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개체들은 이 근원, 곧 ‘아르케’의 한 가지 ‘사건(상태: π?θο? = 파토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 그런데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 곧 ‘아르케’를 ‘물’(水)이라고 보았다.3)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탈레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쨌든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야기 했다는 점에서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萬物)의 근원(根源)으로서의 ‘물’(水)이 곧 ‘신’(神)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비문(碑文)에는 ‘들어서라! 여기에도 신(神)들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역시 밀레토스 학파의 한 사람인 아낙시만드로스도「자연에 관하여(περ? φ?σεω?)」라는 책에서 탈레스의 ‘아르케’ 이론을 발전시켜 ‘아르케(만물의 최초 근원)는 아페이론(τ? ?πειρον), 곧 ‘만물의 최초 근원은 무한자(無限者, das Unendliche)’ 혹은 ‘규정되지 않은 자’라고 정의하였다.5) 더 자세히 말하면, ‘만물의 최초 근원’은 ‘규정되지 않는 무한한 것’,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끝이 없는 것’, ‘영원한 것’, 그리고 ‘어디에나 항상 있는 것’, 곧 ‘아페이론’이라는 것이다.6) 이렇게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아르케’ 이론을 발전시켜 만물의 최초의 근원을 보다 ‘보편적인 실체’로 규정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이며, 죽지 않는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한 개념 정의는 이미 현대 기독교의 철학적 신학 - 특히 중세 스콜라(Scholar) 신학 - 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개념’에 많이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최초 근원(뿌리)으로서의 ‘아페이론’은 ‘죽지 않는 것이요, 썩지 않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7)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萬物) 안에는 이 ‘아페이론’, 곧 ‘정령’이 내재(內在)되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 사상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모든 ‘다자’(多者)들의 대립은 ‘아페이론’, 곧 만물의 근원인 ‘최초의 일자(一者) : das Erste’ 안에서 해소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만물은 바로 이 ‘최초의 일자(一者)’에게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자(一者)와 다자(多者)’의 사상은 후대에 플라톤(Platon, BC. 427-347)과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Plotinos, 204-269),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보에티우스(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524), 디오니시우스 위 아레오파기타,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쿠사누스(Nikolaus Cusanus, 1401-1464), 스피노자(Spinoza), 쉘링(Schelling) 및 헤겔(Fr. Hegel) 등에서 다시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일자(一者)와 다자(多者)의 동일성(同一性)의 철학(哲學)’(Identit?tsphilosophie)은 최근 소위 보수신학을 인도해 왔다는 미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에까지 전승된다. 왜냐하면 반틸은 ‘일자(一者)와 다자(多者)’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변증하기 때문이다. “나를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내가 ‘구체적인 보편’(Concrete Univers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보편’(The Universal), ‘개체’(The Particular), ‘하나와 여럿’(The one and many)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그러나) 사도들은 본래 비기독교적 근원을 가진 말들을 빌려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 일례로 사도들은 로고스(logos)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단지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을 들어서, 그들이 필로(Philo)가 창시한 비기독교적인 사상을 추종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8)



그러나 이상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은 ‘아르케’에 근원을 둔 만물의 생성은 엄밀히 말하면, ‘신은 곧 자연이다’(Deus sive natura)라고 말한 스피노자(Spinoza)의 ‘일원론적 범신론’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 곧 ‘하느님은 실체이며 곧 자연이다’(Deus sive substantia sive natura)라는 명제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은 신(神)이라는 실체 안에 있고, 그 실체는 모든 것 안에 있으며, 그 자체가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神)에게는 무한한 특성이 있어서, 이 우주의 모든 특성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사물(事物, Ding)들의 속성은 신(神)의 속성의 일부(一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곧 만물은 신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표출하는 ‘양태’(modus)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사상은 결국 모든 만물 속에는 ‘신’의 속성이 있다는 범신론(Pantheismus)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범신론에서는 神(신)과 자연의 절대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곧 만물은 신(神)의 변형이며, 신(神)은 만물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개의 사물, 그리고 인간까지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개별적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즉 세계는 신의 속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물은 신이 변화하는 모습 혹은 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양태이다. 따라서 ‘양태’(Modus)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의 속성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상 살펴본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ρχ?)에 대한 개념을 숙고해 볼 때, 그리스 철학에서 ‘신’은 역사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단지 ‘관념적으로 사유된 하나님’, 혹은 ‘이성적으로 인식되어진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은 스스로 주체성을 가진 ‘신’이 아니라, 단지 ‘원리’ 혹은 ‘법칙’일 뿐이다. 이러한 ‘신’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히브리인들인 경험한 하나님은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하며나 히브리인들이 인지한 하나님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영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영적 실체’를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대화(Dialogue)’를 통하여 경험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 철학자이 이해한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르케’, 곧 ‘신’은 히브리 사람들이 인식한 하나님과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어떻게 신의 존재를 인지하였는가?





2. 역사 속에서 대화를 통한 만남 통하여 경험한 하나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이성적 추론이나 자연학적 ‘원인’(原因) 추적을 통해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神)에 대하여 사색하고 추론 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조상들은 유목민으로서 가만히 앉아서 사색할 여유가 없었다(참조. 창 46:34).9) 그들은 밤에는 맹수들로부터 양떼와 염소 떼를 지켜야 했으며, 낮에는 가축들을 위한 푸른 꼴을 찾아서 부지런히 이리 저리 들판을 헤매어야 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별히 그들은 역사적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영적 실체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지한다. 현대 신학자들이 히브리 조상들이 경험한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에 대한 경험을 신화(神話) 혹은 전설(傳說) 등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직접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에 대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이점을 우리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람에 대한 기사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1-3)라고 약속해 주신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실제로 아브람이 들은 것인가, 아니면 아브람의 자의식(自意識)이었는가? 라는 질문들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우선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듣고 즉각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따라서 이후의 아브람의 삶의 역사는, 아브람 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바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에 의해서 전개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言約)이 전개(展開)되는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혹은 사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능력을 자연학적 유비를 통해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와 실질적인 삶의 역사를 통하여 경험하고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우리는 아브람의 소명기사(창 12:1-3) 이후에 계속되는 아브람의 삶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성경은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 12:7, 이밖에 12:7; 13:14; 15:1,7 등등)


그러므로 구약의 주제는 역사(歷史)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나열해 놓은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화 상대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 세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지는 사건들의 역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역사에는 역사적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분의 의지와 뜻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구약의 역사는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결단과 의지와 목적이 덧붙여질 수 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적 역사이다.10) 따라서 구약의 역사 기술에는 인간의 문화,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들의 역사 서술은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속에서 생긴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이행여부에 따른 결과적 진술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역사는, 바꾸어 말하면, ‘언약의 역사’이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영적 실체(하나님)와의 ‘만남의 역사’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역사 서술은 과거 지향적으로 지난 날 일어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 지향적으로 오늘 지금 만난 영적 실체(하나님)와 앞으로 어떠한 삶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 속에서 기술된 예언적 역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역사 기술에는 미래지향적 증언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예컨대 히브리 예언자들의 설교는 미래를 지향하여 역사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가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히 그들이 증언한 예언의 내용도 인간 문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전부다.11) 한 마디로 말하면, 히브리인들의 역사 서술 및 삶의 대한 문제는 이 세상의 문화(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만남에서 형성된 신앙적 관계에 대한 서술이다. 불트만(R. Bultmann)에 의하면, “예언자의 설교는 하나님이 그의 계획에 따라 과거에 - 은혜를 베풀고 벌을 내리면서 - 무엇을 했는지를 지시한다. 그 설교는 하나님이 그 백성의 끊임없는 반항에 대해 그의 계획을 어떻게 관철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그 설교는 현재를 심판하고, 임박한 위협적인 혹은 기쁨을 주는 미래에 직면한 현재의 책임을 첨예화한다.”12)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본래 지배 영역은 역사이고, 그의 활동은 민족의 역사’에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13) 반면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역사는 ‘자연의 역사’, 즉 ‘피조세계의 역사, 인간의 역사’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 역사는 ‘역사의 법칙’이 있을 뿐이지, ‘역사의 발전 및 전개’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이미 정해진 하나의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세상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된 것을 기술한 체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목표’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즉 ‘종말론적 전망’(Eschatological Perspective)이 히브리인들의 삶의 궁극적인 관심이었다. 왜냐하면 현재는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의 하나님을 히브리인들은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3. 영적 실체(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경험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이신 초월자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때로는 ‘비전’(Vision) 속에서 때로는 ‘꿈’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실질적인 ‘역사 현장’에서 일어난다. 우선 아브람은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창 12:1) 그리고 때론 ‘환상’(Vision)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그리고 때론 ‘실질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을 만난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 18:1-5)



이와 같이 인간 아브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곧 ‘영적 실체’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분명히 공통된 점은 ‘보이지 않는 영체 실체이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아브람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서로를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인 ‘영적 실체’에 대한 인식 방법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인식 방법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신 인식 방법’처럼, 인간의 이성에 의한 논리적 추론이나, 감성 그리고 사변적 표상이 있을 자리가 없다.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인식 방법은, 인간의 능동적인 이성 활동과 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감각적 경험’이다.14) 즉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먼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보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인식하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비교 행 3:14-15)



그러나 여기서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는 말은 다분히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한 증언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인식 방법은 ‘시각’(視覺)과 ‘감각’(感覺)을 통해서가 아니라, 청각(聽覺), 곧 ‘말씀을 들음’(H?ren)을 통해서 비롯된다.15)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0, 이밖에 참조 삿 6:22f; 13:22; 사 6:5)


이렇듯 하나님의 ‘불가시성’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속한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이성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걸어오실 때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그리스 철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Wesen)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즉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그의 말씀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히브리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의 존재를 -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 존재를 -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인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인식하였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말씀으로 경험하는 기사는 구약의 많은 인물들에 대한 증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야곱은 벧엘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와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한다.: 야곱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2-16)


[다음호에 계속]






<미주>


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2) 참조.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I; 강성위 옮김,「서양철학사」상권 ? 고대와 중세, (대구:이문출판사 1996), 55.


3) 참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水面)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물론 성경에도 탈레스가 이야기하는 ‘물’이 창조 이전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물 이전에 하나님이 계심을 증언하고 있으며, 탈레스가 말하는 ‘물’(水)은 하나님에 의해서 둘째 날에 창조되기 때문이다.


4) 이 말을 인용하여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신의「단편」에서 ‘들어서라! 여기에도 신들은 있다’라고 말하였다.


5) Windelband-Heimsoeth, Lehrbuch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J.C.B. Mohr, T?bingen, 1976, 30.


6) Johannes Hirschberger,「서양철학사」상권, 57.


7) ?자연학? 3권 4장 203,b,6. 특히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로 생물학적 ‘분열’이론을 제시하였으며, 천체의 회전을 발견하였고, 생물의 진화론을 주장하였다.


8)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5, 40.


9)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창 46:34)


10) 비교. Karl L?with, Friedrich Nietzsche, [Church History VIII, 3]. 1944, 18.


11) 참조. Gustav H?lscher, Geschichts schreibung in Israel(Skrifter utgivna av Kungl. Humanistika Vetenskapssamfundet I Lund, L), 1952, 110: “모세 종교에 있어서 야웨는 세계 문화에 대해 전혀 무관심 했다.”


12. Rudolf Bultmann,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 허혁 역,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3), 17.


13) 참조. Gustav H?lscher, Die Anf?nge der hebr?ischen Geschichtsschreibung(Die Heidleb. Akademie der Wissensch, Philhist. Kl.의 연구보고, 1941/42, 3권) 1942, 110.


14) 히브리어에는 ‘볼 수 있는’(?ρτ??), ‘만질 수 있는’(?πι??’) 즉, ‘-할 수 있는’이라는 음절이 붙여 형성된 형용사가 없다. 히브리어에는 단지 수동의 의미를 가진 ‘수동분사’(Niph’al)가 있을 뿐이며, 이는 때로 라틴어 수동형 동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점에 관하여: Gesenius-Kautsch, Hebr?ische Grammatik, § 116.


15) 이점에 관하여: H. Leisegang, Der Heilige Geist. I. 215, 219ff.; H. Jonas, Gnosis und sp?tantiker Geist. II, 1,1954, 94ff.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김재진 교수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 신학과(B.Th)
동대학원 조직신학(Th.M)
독일 튀빙엔(Tu··bingen)대학교
뮌스터(Mu··nster)대학교 신학박사(Dr.theol.)
전 계명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연구교수
현 케리그마 신학연구원 원장
현 [사] 한국기독교문화진흥원 부원장 이사
현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현 서울교회(통합) 협동목사



<저서>
「현실적 경험신학」, 「기독교란 이런 거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해설」
「성경의 인간학」 등 공저 및 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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