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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마음치유> 열정과 심리의 상관관계_임경수 교수(계명대학교 기독교과 목회상담학)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0    등록일시 : 2017-03-01    인쇄


<현대인의 마음치유>


열정과 심리의 상관관계


임경수 교수(계명대학교 기독교과 목회상담학)



지독히 어떤 일을 사랑하거나, 어떤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다. 첫째는 내가 그것을 정말로 좋아해서 하는 것이다. 선천적 경향이 그것을 너무 좋아해서, 아니면 그 사람이 나에게 너무나 잘 조화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가진 심리적 결핍을 그 물건이나 사람이 채워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첫째의 이유로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둘째 이유로 인해, 내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것은 문제를 발생하게 할 소지가 다분히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외적 형태에 있어서는 같은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랑으로 보인다. 겉으로 들어난 열정을 통해서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비록 시작은 구분하지 못하지만 마지막 결과는 판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남녀가 사랑할 때, 고백이 너무 지나쳐서 ‘당신 없이는 못 산다’, ‘당신이 같이 있지 않으면 죽겠다’는 식의 고백을 듣고, 이 말에 끌려 사귀거나 결혼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은 매우 격정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지만, 이 고백은 자신의 심리적 욕구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배려한 말이나 태도는 아니다. 얼마나 귀중한 목숨인데, 한 사람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 만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결핍이 크기 때문에 상대를 통해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것이다.

“열정이 담겨있는 바른 사랑은 상대방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먼저 알고, 그것에 따른 헌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나의 요구에서 시작되지 않고, 상대방의 뜻과 요구에 파악하고 그것을 이루도록 헌신하는 것이다.”

한 내담자는 남자의 사랑의 요구에 못 이겨서 결혼을 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남자는 주로 ‘당신이 없으면 죽는다’는 식의 사랑고백을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선호하는 남성형이 아니어서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열정적인 사랑고백을 들어며 ‘누가 이 사람보다 나를 사랑할까?’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혼했다. 그러나 대게 이런 식의 사랑고백은 고백자의 결핍을 상대방이 채워주길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이기적이다. 이 여성은 결혼을 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남편으로부터 수년간 폭행을 당했다. 폭력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이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구타를 하였으니, 다른 남자들은 얼마나 더할까 하는 망상에 빠져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좋은 남성을 만나 새로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부나 가족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상대가 나에게 잘해주기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를 향한 기대치의 50%만 할 수 있어도 그들은 매우 훌륭한 가족이다. 100%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이다. 자기가 원하는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원망하며 저 사람은 나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배우자, 가족, 이웃은 없다. 개인이 가진 요구는 이상적이고, 주관적이다. 성도가 목사를 향해 가지는 기대감도 마찬가지다. 교회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100%완벽한 사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사도 정서를 가진 사람이고, 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사항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과도한 기대를 가지는 성도들이 있다. 역으로 목사가 성도들에게 거는 기대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장점과 동시에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밝은 면과 동시에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내 편에서의 일방적으로 원하는 것, 내 입장에서만 상대를 보려는 것은 항상 불편한 관계를 낳고, 불균형으로 인해 악을 낳게 된다.

우상, 또는 우상주의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 많이 언급되는 용어다.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물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기독교인들에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나의 입장에서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유아는 성장하면서 부모가 모든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부모가 내 뜻에 의해서 움직이고 조정이 된다는 생각처럼, 우리 안에 있는 우상주의는 그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과 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 내면세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뜻을 익히고 따르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에 따르라는 식의 신앙은 유아기적 신앙이다.”

누구나 이러한 어린 시절을 겪듯이 우리도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러한 유아기적 신앙단계를 거쳐갈 수 있다. 유아가 부모의 적극적 응답에 의한 ‘전능성의 환영’을 느끼는 것과 같이, 처음 신앙생활의 체험은 마치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매료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자기신념이다. 심리학에서 이러한 구조를 가진 아이는 더 이상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본다. 자신이 신뢰하는 부모가 자신의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듣지 않을 때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아이는 정신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다가 여성이 절교를 선언하면, 남자는 실망을 느끼고 좌절한다. 간혹 절교를 선언한 이성을 찾아가서 가해를 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신앙의 열정이 과연 어디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정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 여성이 자신의 에너지를 교회에 쏟으며 목회자로부터의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심리적 용어로 ‘전이’(Transference)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어느정도 발생하는 일이다. 문제는 너무 과하게 일어날 때이다. 서구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며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한국은 집단사회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집단적 움직임이 개인들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2002년 월드컵은 온 국민을 열광으로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대부분의 국민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4강까지 갈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얼굴에 페인팅을 하고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채 한 목소리로 응원했다. 당시에 천여 명이 모여 있는 광장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외치는 함성이 사람들을 축구에 몰입시키는 위력을 느꼈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정을 지켜보며 큰 흥미를 느꼈다. 회사원들은 모든 일을 제쳐놓았고, 학교도 휴강을 하거나, 시험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자리에 앉아 응원을 하려고 밤새 자리는 지키는 이들도 있었고, 붉은 물결이 전국을 덮었다. 외신이 바라본 우리나라 사람의 열기는 대단했다. 이러한 집단적 열정이 마치 광기처럼 비쳐지기도 해서 어쩌면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애에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었다. 한 외신 기자는 시청광장에서 응원하는 열기를 취재하기 위해 시청역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던 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기사를 썼다. 한 사람은 붉은색 티셔츠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흰색상의를 입고 있었다.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흰 상의를 입은 사람에게 왜 흰 옷을 입고 가느냐고 물었다. 외신기자는 그들의 대화를 바탕으로 반드시 붉은 색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획일성에 대한 글을 썼다. 열정 뒤에 도사린 암묵적 강제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왜 축구경기를 응원하러 가는데 반드시 붉은 색 옷을 입어야 하는가? 응원자체가 중요하고, 개인에 따른 기호도 있을 텐데 왜 한국인들은 획일적인 요구를 하는 것일까?

“열정이 가진 장점은 공동체를 뜨겁게 하나로 묶는 동력이다. 그러나 ‘다양성에 대한 무시’라는 맹점도 공존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다르기 보다는 ‘틀리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면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은 나와 틀리다’고 생각하면 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열정에는 타협과 협상이 없고 양보하는 순간 이단아로 낙인  찍힌다. 잘못된 열정은 사람과 세상을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게 한다. 이분법적 시각은 흑백주의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북한사회의 구조나 지도자들이 하는 일들을 볼 때 마다 흑백논리로 인해 답답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늘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을 찾는다. 왜 나와 다른 사람을 적으로 여기고 있는가? 왜 대다수의 사람이 반드시 집단이 정의해 놓은 것을 추종해야 하는가?

새로운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의 유입으로 사회는 조금씩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교회와 교인들의 생각은 다양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저하고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 왜 획일적이어야만 하는가?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수용, 그리고 믿음에 대한 교훈을 획일적인 방법으로 교육하고 있지 않은가? 이 획일적인 방법을 통해 교회는 교인에게, 가장은 자녀에게 획일적 방식으로 진리를 전수하고 있다. 필자가 접한 기독교인 내담자 중에는 이러한 획일적 교육방식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 한 내담자는 매우 엄격한 율법적인 구조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어기면 큰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여 스스로를 옥죄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의 양육형태는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수 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녀들에게 똑같이 억압하는 형태의 교육을 하였다. 그의 마음과 얼굴에는 평안이 없었다. 그런데 배우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발적으로 즐겁게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이제껏 추구한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은 스위스 바젤대학 출신이었고, 분석심리학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내향형의 사람이었다. 내향형의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이 사람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싫어한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수학과 체육이었다. 체육은 자신이 잘하지 못하니까 싫어했고, 수학은 답을 찾는데 공식을 대입하여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답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을 찾는데 이미 있는 공식을 대입하고, 그것을 통해 답을 가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1=2’ 라는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워서 그것에 집어넣어 결과를 가지는 것이 과연 진리일까?’라는 회의론은 그의 이론에 가득 차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진단이 나왔는데, 아이들을 획일적으로 학교에 집어넣고, 방과 후 특정시간까지 학업을 해야 하고, 참된 교육이 아닌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입시공부를 하던 아들이 한 말이 생각난다. 자신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한국에서 교육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의 말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해맑은 아이의 얼굴이 입시를 치르면서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획일성을 요구하는 입시제도와 학교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을 병들게 하고, 부모와 사회를 원망하며 살아가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획일성은 거기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잠시 좋을 것이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용하는 사회의 요구에 적합하면 영웅이 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 때문이다. 상위권의 범주에 드는 학생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자기 자신도 마치 최고봉에 등정한 것과 같은 착각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사회에 부적합하고, 무능한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입시철이 되면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목표하는 학교에 가게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입시과정을 통해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 중심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무당을 찾아가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규모 있는 신앙을 가진 것 같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심으로 가득하고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키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70-80년대에는 수험생의 30%정도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 70%는 개인 사정이나 가정형편상 취업을 해야 했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가지 못하고 취업 현장에 뛰어들었는데 왜 교회는 대학에 진학하는 30%에 더 관심을 가졌을까? 이러한 풍토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등부를 졸업한 후 교회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교회가 광의적인 안목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을 간 사람만이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진리는 숫자를 대입하거나,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습득하는 것은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며 영원한 진리는 아니다. 소수민족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전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교육방식 때문이었다. 유태인들은 이미 정해진 사실과 설명에 대하여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고, 질문과 함께 번민하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바로 그것이 유태인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앙드레 지드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진리를 찾았다는 사람을 믿지 말고, 진리를 찾고 있다는 사람을 믿어라.’ 이 말은 우리가 주장하는 열정에 대해 ‘얼마나?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도록 요청한다.

열린 마음이란 진리를 찾으려는 과정에 대한 열정을 가진 마음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생각하고 따르는 마음은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흑백논리에 빠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내용보다는 형식에 얽매여 있는 개인, 사회 그리고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스쿠버 다이버가 켈리포니아 해안에 있는 동일한 지점에 있는 곳을 습관적으로 다이빙을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이빙을 해서 바다 속을 보는데 그날따라 바다 안의 광경이 너무나 좋아서 감탄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들어온 장소인데 왜 그리도 좋게 보였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그런데 답은 하나였다. 그가 바다를 들여다보는 마음의 자세가 달랐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외적인 환경이 바뀌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바뀔 때, 하나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던 것들이 특별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다를 보는 느낌이 왜 이리 변하지 않을까? 세상관이 왜 이리 바꾸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다.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답에 가까운 것을 찾고, 열정의 함정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이 가진 함정은 획일성을 요구하고, 다양성을 배격한다. 물론 열정은 응집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자체에 머무르면 상당히 위험한 사적 집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또한 그것은 신앙이 아닌 사적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 된다. 이념은 율법적이고 사람을 정죄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사람을 살린다. 


임경수 교수

서울신학대학 신학과(B.A.), 미국 Garrett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석사(M.Div.), 목회상담학(M.T.S.), 시카고 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박사(Ph.D.) 학위를 받은 임경수 교수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 교육학과,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심리학과를 수학했다. 한국기독교상담심리치료 학회 감독(Supervisor), 한국목회상담협회감독, 한국임상목회협회 감독, 한국가족문화협회 감독, 계명대학교 교목실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기독교학과 목회상담학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주요 저역서로는 『Male Mid-life Crisis: Psychological Interpretations, Theological Issues and Pastoral Intervention』(Oxford New Yor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0), 『애착이론과 역기능발달상담』, 『인간발달이해와 기독교상담』, 『심리학이 모르는 기독교』, 『오후수업:중년리모델링』, 『인생의 봄과 가을: 중년심리이해와 분석』, 『심리학과 신학에서 본 인간이해』, 『실존주의심리치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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