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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목회와 인문학 - 첫 성탄을 맞이한 두 사람_금빛내렴 교수(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56
등록일시 : 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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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인문학 첫 성탄을 맞이한 두 사람 말씀 따라, 그림과 함께 나누는 성탄의 의미 금빛내렴 교수(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한 여자가 받은 뜻밖의 수태고지 누가복음서 1장 26-38절에 기록된 수태고지는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많은 작품들을 남기게 하였다. 수많은 이들이 이를 시각화하면서 전형적인 도상학적 양식이 수립되었는데, 주로 한쪽에선 천사가 방문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선 마리아가 독서 중에 천사를 맞이하고 있는 구도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는 수태고지 그림들 중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작품을 들 수 있는데 그도 전통적 도상의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고 책을 읽던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으로 놀라고 있다. 가브리엘은 오른손을 들어 마리아에게 인사하며 왼손에는 흰 백합꽃을 들고 있다. 마리아는 주저하며 왼손을 들어 천사를 맞이한다. 흥미로운 점은 다빈치는 순결의 상징들을 중첩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마리아는 주로 옷으로 식별하는데 그녀가 입은 푸른색의 옷은 순결을 상징하며, 천사가 왼손에 들고 있는 백합 또한 순결을 상징하는데, 때로는 백합이 마리아를 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데도 쓰인다. 가브리엘이 무릎을 꿇고 있는 밀폐된 정원 또한 마리아의 동정을 상징한다. 다빈치가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여러 시각적인 상징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천사의 날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날아다니는 새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감안하건대, 마치 맹금류의 날개를 연상시킬 정도로 자연 현실의 새를 닮아 있다. 다빈치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배경 묘사에도 공을 들였는데, 좌우로 이분하여 오른쪽을 인간이 만든 건축물로, 왼쪽을 자연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의 그림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간 세상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다빈치의 수태고지 속 인물들의 표정은 좀 모호하다. 천사와 마리아의 얼굴에서 감정 표현이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마리아의 얼굴은 아름답지만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세세한 표정 묘사보다는 전체 메시지 자체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이 그림은 다빈치의 첫 번째 주요 작품으로 간주되는 바, 이 그림에서 젊은 레오나르도는 원근법에 숙달해 있으면서도 몇 가지 초보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돌로 화려하게 장식된 탁자는 마리아보다 관객에게 더 가깝고, 독서대 위에 기대어 있는 마리아의 오른팔이 다소 길고 독서대 왼쪽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 즉, 그녀의 오른손은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관객과 더 가까운 것이다. 이는 다빈치의 초기작에 나타난 실수일까? 그동안 이 그림의 불완전함을 다빈치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난 미흡함으로 여겨왔으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다빈치가 의도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애초에 이 그림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끔 구상되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관람객이 관례대로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는 동선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 측면 아래에서 멈춰 서서 볼 때 그림 전체가 더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물의 벽돌, 마리아의 팔, 대리석 받침대의 장식품 등과 같은 특정 세부가 적절하게 정렬된다. 다빈치가 사용한 왜상(歪像, Anamorphosis) 기법은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왜곡시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인데, 사실 이 기법은 다빈치가 사망하고도 한참 후에 미술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구도적 어색함을 다빈치의 실수로 해석하든 의도로 해석하든, 이 구도는 보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첫째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재도 미숙할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완벽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당시에 자신이 지닌 최고의 역량을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사건인 동정녀 잉태를 표현하는 데 발휘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의 천재적인 완벽함이 더하여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한다. 둘째, 우리가 어떤 사실을 바라볼 때 하나의 방향에서 한 가지 시선만을 고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 꼭 그림을 정면에서만 봐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져보자. 이 그림은 오른쪽 측면에서 봐야 온전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시각의 전환은 성탄이 지닌 비밀을 파악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평범한 인간 삶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드러내는 이 놀라운 기적은 다른 시각과 회심의 결단을 통해서만 수용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 따르면, 안토넬로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약 1395-1441)의 유화 작품을 보고 이탈리아에 유화를 소개했다고 하는데, 유화의 특징과 선형 원근법을 활용한 그림을 모르지 않았을 그가 이러한 개인 초상화 방식으로 수태고지를 그렸다는 것은 마리아의 내면에 더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마리아는 일반적인 초상화처럼 관객을 바라보지 않고 왼쪽의 화면 밖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를 보고 있다. 안토넬로는 천사를 그리지 않고 오직 마리아만 젊은 여성으로서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와 함께 부가적으로 등장한 소품은 독서대뿐인데, 오히려 이 독서대가 화면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가는 효과를 보임으로써, 화면은 관객에 대해 더 열려 있는 것이다. 수수한 색채와 단순한 배경으로 우리는 마리아의 감정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얼굴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의 놀라움과 불안이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차분함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 이 소식은 놀람과 두려움의 소식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임을 천사가 알려주고 있지 않는가? 이 기쁨은 은혜를 입은 자,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 새번역). 마리아의 복합적인 감정은 손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왼손은 가슴의 옷을 여미며, 읽던 책에서 손을 떼어 일순 놀라 펼쳐 보인 오른손은 천사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동작으로 이해된다. 잠깐, 안토넬로가 유일한 소품으로 전통적인 도상을 따라 등장시킨 독서대 위의 성경은 어느 부분이었을까? 물론 누가는 마리아가 독서 중에 수태고지를 받은 것으로 쓰진 않았지만, 화가들은 상상력을 더하여 이 신비한 사건을 이해할 열쇠를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이 성경을 이사야서의 한 구절로 묘사하고 있는데, 참고로 다빈치의 <수태고지>에서는 아예 성경책 해당 부분을 펼쳐 보이고 있다.
마태는, 요셉에 대한 천사의 수태고지를 전하면서 -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 1:21 새번역) - 마태복음서 1장 22절에서 한 번 더 이사야서의 임마누엘 탄생의 예언을 상기시킴으로써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즉,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마리아와 요셉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핵심적인 성탄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남자가 받은 또 다른 수태고지 성탄에 관한 두(누가와 마태) 복음서의 이야기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지 투표를 하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누가의 이야기를 더 선호하고 손을 들어줄 것이다. 분량뿐 아니라 내용의 전개 면에서 더 극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의 수태고지에 비하면 마태복음서의 수태고지는 화가들뿐 아니라 성경 독자들에게도 관심이 덜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성탄의 신비에 관해 상호보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바, 우리는 이 둘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그 각각의 고유한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요셉에 대한 수태고지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서 1장 18-2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서의 수태고지에 비해 짧지만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관련 이미지를 찾기 위해 ‘요셉의 꿈’ 또는 ‘꿈꾸는 요셉’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열에 아홉은 구약 성서 속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구분하기 위해 흔히들 영어권에서는 ‘성 요셉 Saint(St.) Joseph’이라고 검색하면 신약 성서의 첫 등장인물 요셉을 찾을 수 있는 바, 그를 ‘성 요셉’으로 지칭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가 거룩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분을 모심으로 인해 우리 모두 ‘성도(Saints)’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누가복음서의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보다는 우리가 덜 주목하지만, 마태복음서의 요셉에 대한 수태고지 또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하나님은 꿈속의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상상 그 이상의 가장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의 수태고지 본문 전체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마 1:18-25), 주님은 마치 이렇게 요셉에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나는 네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 돌봐 주기를 원한다. 내가 너를 택하여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그를 돌보고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천사의 말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선택과 배려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요셉과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시각을 바꿀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마태는 요셉이 의롭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는 의롭게 처신하려고 마리아와 헤어지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요셉은 얼핏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맡아야 하는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일을 하려고 해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성육신의 비밀을 감수하는 것은 여간 큰 부담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거룩한 부담(Burden)을 질 때 그도 마리아와 함께 해산에 동참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어 ‘bear’라는 동사의 다중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낳다, 지니다, 참다, 견디다, 지다, 떠맡다, 부담하다’ 등의 여러 중층적인 뜻들을 지니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마 1:20 새번역). 그가 두려워하지 않고 마리아를 맞이한다는 사실은 곧 두려움 없이는 맞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마리아의 모체를 통해 맞이할 수 있다는 놀라운 역설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아기의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아기를 모심으로, 그 아기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성 가족’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성탄의 의미는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요셉은 잠에서 깨어난 후 주님의 천사가 지시한 대로 따른다. 그는 거룩한 ‘부담을 짐으로써’(bear)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에 곧 은혜와 사랑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피곤하여 체념한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리아와 대조적으로 그림 속 요셉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며 머물 곳을 애타게 찾고 있다. 비록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긴 하나 그의 오른손으로는 나귀를 탄 마리아를 붙들고 있고, 왼손을 높이 들고 고개를 젖혀 외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 귀에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티소는 1880년대 현지를 탐험하였는데, 이후 그림 속 석조 벽과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묘사함으로써 베들레헴 도시를 오늘날과 같은 분주하고 여유 없는 도시로 재현하고 있다. 함께 하는 해산, 함께 맞는 성탄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눅 1:29 새번역)는 말에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순종의 뜻을 밝힌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 새번역). 그녀 자신이 거룩한 부담, 거룩한 해산을 감당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수태고지를 받은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마 1:24 새번역). 그도 거룩한 부담, 거룩한 해산에 동참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에 동정녀의 잉태가 중요했다면, 하나님은 미혼 독신 여성을 선택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거룩한 사역을 마리아와 요셉과 분담하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리아와 요셉이 각자의 결단 속에서, 저마다 가진 오해와 우려를 불식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을 통해서, 그분의 놀라운 기적을 여실히 드러내게 하신 것은 아닐까?
마리아와 요셉이야말로 각자 자기 짐을 지고(bear) 예수를 따른 사람이었다. 마리아와 요셉이 없었다면 진정으로 기쁜 성탄절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 동일한 내용의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와 요셉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이며, 누가를 통해서뿐 아니라 마태를 통해서도 수태고지의 두 순간을 알게 된 우리는 또한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그리하여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한 마리아와 요셉뿐 아니라 매해 동일한 의미로 그리고 매번 새로운 의미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성탄의 인사를 변함없이 지닐(bear) 수 있는 것이다. 기쁜 성탄!,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メリークリスマス), 주와유 노엘(Joyeux Noël!), 프뢸리헤 바이나흐텐(fröhliche Weihnachten!), 펠리스 나비닫(Feliz Navidad!), 셩딴콰이러(圣诞快乐!, 聖誕快樂!)… 금빛내렴 교수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철학박사)하고 현재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초빙교수, 한국디자인사학회 연구윤리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미학, 예술철학, 미술사 및 디자인 문화 등 인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