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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목회와 인문학 -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가?_조영호 교수(안양대학교 겸임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34
등록일시 : 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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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인문학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인문학으로 읽는 사랑, 플라톤의『뤼시스』를 중심으로 조영호 교수 (안양대학교 겸임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보다는 분노가 우리 사회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 없는 오늘,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중요한 삶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에게 삶의 고달픈 현실을 위로하며,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란 가치를 부여하도록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격려와 위로, 따뜻함이 주로 사랑을 이해하는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는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용서, 헌신, 자기희생이란 개념까지 포함한다. 베풂을 입는 (사랑받는) 입장에서는 더할 것 없이 좋은 게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인용구가 보여주듯이 플라톤은 자신의 책 『뤼시스』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그에 의하면 사랑의 의미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사랑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젊음의 거리 뤼케이온에서 소크라테스는 히포탈레스를 만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메넥세노스와 뤼시스가 진정한 필리아(사랑)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다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메넥세노스의 답은 차이가 없다고 말하며, 사랑하는 자가 상대에게서 사랑을 되받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고 말한다. 즉, 짝사랑처럼 A가 B를 사랑할 때, B가 A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랑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받는 사람이든 한쪽만의 사랑일 경우에는 둘 중 어느 쪽도 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상호적인 사랑의 경우가 아니라면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시 메넥세노스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것이 친구인 것에게 친구인 것인가?, 아니면 친구인 것이 적대적인 것에게 친구인가?”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질물은 던진다. “정의로운 것이 부정의한 것에게, 혹은 절제된 것이 제멋대로인 것에게 혹은 훌륭한 것이 나쁜 것에게 친구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마도 “아니요”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면 위에서 논의했던 논지와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들은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고, 반대되는 것이 반대되는 것에게 친구인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사랑 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훌륭한 것이 훌륭한 것에게’, ‘나쁜 것이 나쁜 것에게’, ‘훌륭한 것이 나쁜 것에게’ 친구일 수 없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즉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들끼리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의 가능성은 단 하나만 남는다. 즉, “훌륭한 것에게,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만이 친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가능성에는 여전히 물음이 남는다. 그럼 훌륭한 사람에게 누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훌륭한 사람은 자족하므로 친구가 필요 없는데,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한 몸은 건강하기 때문에 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병이 그 몸에 다가와 있으면 그로 인해 몸은 의술을 필요로 한다. 이때 병은 나쁜 것이지만 의술은 도움이 되는 훌륭한 것이다. 몸은 그 자체로 보면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몸은 병 때문에 훌륭한 것인 의술을 반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나쁜 것이 그 곁에 와 있기 때문에 나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된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들의 친구”라는 유일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결론을 성경의 말로 다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사랑할 만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최고의 궁극적 친구이고 우리도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요 15:12-14).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우리 시대의 헛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욕구, 즉 이기적 욕구에 대한 추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현대인의 대부분은 사랑의 대상, 우정의 대상을 자신의 욕구의 척도에 맞추어 상대를 “나와 맞지 않아”, “나의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기적 욕망의 나르시즘일 뿐이다. 이러한 왜곡된 현대인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타자를 위한 삶과 사랑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나의 욕구의 소유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보살피고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조영호 교수 안양대와 협성대를 졸업하고 독일 부퍼탈/베텔신학대학교(Kirchliche Hochschule Wuppertal/Bethel)에서 박사(D. Th.) 학위를 받았다. ‘공간신학’, ‘경제신학’, ‘생태적 창조신학’, ‘기후 위기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윤리적 과제’, ‘신정론’ 그리고 ‘인간론’ 등에 대해 연구하며, 현재 안양대학교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백석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 ![]() |